16.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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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月靜 강대실 2007. 10. 1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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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림자
번호 : 12조회수 : 72005.09.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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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그림자



                                                                                      이명선

 



 

  언제라도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실 줄만 알았던 아버지였는데......


  암이란 사형 선고가 내려지면서부터 아버지의 삶은 물고기 비늘처럼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큰 바위 같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이끼처럼 붙어 살면서 읍내에나 나가야 한 둘 있었던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하는 나를 언제나 애처로이 바라보시던 아버지에게 학교 운동회 때에는 자식으로서의 용맹스러움도 보여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

 

 


  병든 배추 잎 같은 얼굴에 몸은 심하게 야위어 한번도 피어보지도 못하고 복통이 일어나면 아버지는 그 넓직한 등을 내 앞에 쓱 내미셨다. 아파서 온 방을 헤매다가도 아버지가 큰 등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하며 바싹 달라 붙었다. 기진맥진한 난 얼마 안돼 축 늘어져 잠이 들고 만다.



그런 고통으로 아버지의 얼굴에 하나 둘 주름을 새겨 넣었고 그 주름이 늘어나면서부터 난 그림자처럼 늘 아버지의 곁을 따라 다녔다.


  아버지가 일에 지쳐 있을 땐 호미 자루를 함께 들었고 기계 새끼를 꼴 때면 함께 기계를 밟아가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힘 들지? 쉬엄쉬엄 하거라 하시면서 당신은 이마에 흐른 땀을 씻을 틈조차 아끼셨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은 등짐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서성일 때 내 아버지는 호미로 쟁기로 땅을 더욱 넓게 파야만 했다. 아들을 늦게 둔 아버지가 안스러워 비록 딸이지만 대신하고 싶었으나 여자이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이 트기 전 농약을 주러 나가셨던 아버지가 때가 지나도 돌아오질 않아 불길한 예감에 십리길이나 되는 논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지게 위에 농기구를 챙기시고 한 손에는 하얀 고무신을 들고 계셨다. 나를 보시더니

 

  "얘야 신발 좀 찾아 봐라!" 하신다.

 

  "거기 신으셨잖아요?"

 

  "아니 이것 말고."

 

  "하나는 들고 계시잖아요" 했지만,

 '아니 이것 말고'를 몇 차례 되풀이 하며 열심히 신발을 찾고 계셨다. 난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한참 동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날 그 웃음이 원망스럽다.


  텅 빈 위장, 눈 앞에 어른거리는 별무리, 신발이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힘 든 아버지의 모습이 허공에서 맴돌고 있다.


  아버지의 나뭇짐이 그렇게 꼭 커야만 했던 이유를 이젠 알 수 있다.


  먼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오시는 아버지의 나뭇짐엔 연분홍 진달래가 지게 위에서 무등을 타고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또한 아버지의 한 여름 풀 짐 속엔 사랑을 담고 오셨다. 올망졸망 칠 남매를 생각하며 지게 깊숙이 참외를 숨기고 돌아 오시면 코를 킁킁거리며 단내를 맡았다. 욕심꾸러기 동생이 제일 크고 잘 익은 참외를 남이 볼세라 깊이 감추고 다른 동생들의 참외에 혀를 날름거린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비밀 장소에선 익다 못해 곯아빠진 참외가 코를 찌른다.


  '예끼 이것아 ,남이나 먹게 두지 저도 못 먹고' 하시며 아버지는 꾸중 대신 눈웃음을 지으셨다.


  내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 별지기였다. 새벽 별보고 논 밭에 나가셨다 저녁 별을 한아름 짊어지고 돌아오신다.


  저녁상을 물리면 어느 노래 말처럼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처럼 기계 새끼를 열심히 꼬셨다.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땀을 쥐어 짜야만 했다. 가끔 교대를 하면서 이 다음에 친정에 오면 새끼 많이 꼬아 드릴께요 이렇게 밖에 생각 못했던 내가 정말 바보스럽다.


  그런 아버지의 발이 찢어져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지난 날들이 이젠 치유 될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해를 거듭 할수록 지을 수 없는 영상들이 꿈 속의 악몽으로 이어진다. 꿈 속의 그 아버지는 언제나 냉정하셨고 불러도 대답 않고 등 한번 내 앞에 내밀지 않으신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 아침이면 미치도록 그립다. 새벽 어스름이 창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아버지의 잔영으로 기진맥진 한다.


  그리움을 남기고 간 아버지께서 중병으로 누워 계셨을 때, 아버지를 위해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픔을 반으로 나눠어 가질 수만 있다면 하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


  이런 막연한 생각 속에서 언니와 난 겨울 수박을 찾아 나섰다. 생전에 못 잡수어 보신 겨울 수박, 참외를 찾아 남대문 시장을 도는 동안 내 눈에는 시장을 가셔도 쓴 막걸리 한 잔을 입에 대시지 않고 돌아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품에 안은 수박 덩이 위엔 눈물이 흘러 수박 무늬가 둘로 셋으로 겹쳐 보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니 아버지의 큰 등에 가려져 하늘이 동전만하다.


  암이란 사형 선고 속에서도 곧 일어나겠다고 호언장담 하시던 아버지는 병마의 위력 앞에선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렇게 가실 아버지를 위한다고 안락사까지 끄집어내야 했던 어리석음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해 애쓰시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의 두께 만큼 아버지의 그림자는 세월에 덮여가고 있다.

이제는 우울한 추억을 벗어 버리고 내 안에 깊게 자리한 아버지의 그림자를 바람에 구름 가듯 날려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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