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스크랩] 김년균 시인 원고

월정月靜 강대실 2007. 3. 8. 17:47
 

고향에서

                          김  년  균


고향에 가니 생각난다.

호박잎을 꺾어다 삶아먹던 슬픈 시절,

하늘엔 살상을 일삼는 무기들이 휘날리고

내리는 비의 절반쯤은 눈물이 섞였나니,

호박잎은 무럭무럭 눈물이 섞인

빗물을 먹고 멍석 만하게 자라서,

우리네 가난한 배를 채우라고,

우리네 슬픈 마음을 달래라고,

울타리마다 무성했다.

병도 없이 잘 자랐다.




꽃밭에서

                         김  년  균


얼굴을 잠깐 내밀어도 산너머 강 건너

멀리서 벌떼들 날아들고,

몸을 조금 스쳐도 그 향기 진동하여

동구 앞 길목에 넘쳐나고,

입술을 한번 대어도 메마른 가슴팍에

단물이 우러나서 포동포동한 살이 되고,

슬픔을 삭이는 찬란한 노을이 되고,

혹은 입에 쓰다 해도, 속병을 없애는

보약이 되어 양기가 솟구치느니,

너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 자 있으랴.

어느 누가 눈감고 저만을 내세우랴.  



<김제문학>에 수록할 시 3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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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웃  외2편

                                 김  년  균


왜정 때 징용(徵用)에 끌려갔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


너무도 억울해서,

뒤만 바라보면 오장(五臟)이 뒤집혀서,

하루도 깊은 잠을 못 이루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웃을 잘못 둔 줄 알아라.”


아버지는 살아생전

오로지,

이 말씀뿐이었다.



헛허허허

―일본의 ‘망언’에 붙여

                             김  년  균


이상한 소리가 거리에 꽉 찬다.

모이는 사람마다 울화가 들끓는다.

눈치 없는 달이 늦도록 밝다.


뭐라고? 독도가 제것이라고?

헛허허허, 헛허허허.

지나는 소가 웃겠다. 세상의 온갖 짐승들,

들짐승 날짐승 피라미 하루살이까지도

밤새우며 웃겠다.


한때는 이 나라 땅덩어리를 집어삼키려고

반만년 비단처럼 올곧게 자란 순한 백성들

멱살잡고 끌어다가 짓밟고 주리틀고,

마지막 심장까지 장난감처럼 주물럭거리며

병신을 만들기 일쑤이더니,


그 버릇 아직도 못 버렸나.

이제는 남의 땅도 제것이라고 생떼 쓰며

걸핏하면 눈 부릅뜨고 공갈치고 야단이니,


태초에 그랬다 하듯이,

맨 나중 지구에 불꺼지고 물도 바람도 사라져

하늘과 땅이 뒤엎어지고,

산 자도 죽은 자도 갈 길이 없어지거든,

일본아, 허영에 빠진 슬픈 친구야,


그런 말은 제발, 

그때에나 가서 하라.




火旺山에서   

                              김   년   균


화왕산에 갔다가

늦가을 억새풀 우거진 산정(山頂)에 오르다가

나는 보았다.

손에 휘어진 지팡이 짚고 어깨에 헐거운 배낭을 메고

낯선 얼굴을 마주하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의 모양새는 용케도 서로 같지만, 그러나

몸 속에 절인 짜디짠 속내는 각기 다르다는 것을.

등뒤에 감춰둔 뜻과 생각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빼곡이 쌓인 포부와 야망은, 그 빛깔과 형체는

조금도 같지 않고, 갈 길도 영 다르다는 것을.

저 높은 하늘의 별을 따려고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 

모진 바람에도 꼼짝 않는 돌과 나무의 정기를 받으려고

짐승과 새들조차 마을 아래로 쫓아내 버리고

돌과 나무를 밑동까지 만지고 짓밟는 사람,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웃의 영화를 탐하면서

가파른 산을 헉헉거리며 오른다.


화왕산에 갔다가

산은 높지도 않은데 땀흘려 심장까지 적시다가

나는 알았다.

가는 길이 달라도 저들이 함께 오를 수밖에 없듯이

세상의 길은 혼자서만 걸을 순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어울려서, 혹은 뒤엉켜 가며

어느 길이 좋을까, 너른 길은 어딜까, 기웃거리며

모르는 길은 묻고 막힌 길은 뚫고 굳은 길은 파고,

앞뒤서 받쳐주고 끌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달리는 열차도 힘들면 괘도 밖으로 떨어지는데,

아무리 높고 잘난들 쓰러져 눕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한 자들이 벌써 산아래 널려 있다는 것을.

혹시라도 누군가 붙잡아 줄까 싶어

허공에 손 내밀며 참회의 눈물도 흘린다는 것을.


화왕산에 갔다가

거친 세월에 멱살 잡혀 여기까지 끌려온 나는

산의 중턱에도 오르지 못하고 망연히 돌아서며

조그만 이치를 깨닫는다.

석양은 언제나 꿈길처럼 눈물나게 호화롭지만

금세 어둠에 젖어들고,

산은 저렇게 얼굴이 고와도 그 밑을 보면

단지 돌밭이라는 것을.


길은 어차피 다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누군가 말하듯,

화왕산은 항상 창녕에 꼿꼿이 서 있고

나는 서울에 돌아와 또다시 흘러간다. 



<약력>

1942년 김제시 축산면 출생. 1972년 월간 <풀과 별>(시), <현대문학>(수필)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장마> <갈매기> <바다와 아이들> <사람> <풀잎은 자라나라> <아이에서 어른까지> <사람의 마을> <하루> <오래된 습관> 등과 수필집으로 <날으는 것이 나는 두렵다> <사람에 관한 명상> 등이 있음. <한국문학> 편집장, (주)지학사 편집국장, (주)문학사상 편집인 겸 전무이사, <월간문학> 편집국장 등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출처 : 김제문협
글쓴이 : 김제문협 임상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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