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김영랑의 시 모음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2. 29. 12:13
김영랑 시모음
번호 : 1670   글쓴이 : 조주흥
조회 : 14   스크랩 : 0   날짜 : 2006.04.29 13:40



가늘한 내음 - 김영랑

내 가슴속에 가늘한 마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ㄴ 산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읜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우에 철석 갯물이 놓이듯
얼컥 이-는 홋근한 마음

아! 홋근한 내음 내키다마는
서어한 가슴에 그늘이 도나니
수심뜨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랏빛  


북으로
북으로
울고 간다 기러기

남방의
대숲 밑
뉘 휘여 날켰느뇨

앞서고 뒤섰다
어지럴 리 없으나

가냘픈 실오라기
네 목숨이 조매로아






강물 - 김영랑

잠자리가 설워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베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디
흐르다 못해 한 방울 애끈히 고이였소

꿈에 본 강물이라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거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철 흘러가면서
아심찮이 그 꿈도 떠싣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자꾸 강물은 떠싣고 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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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대(降仙臺) - 김영랑

강선대 돌비늘 끝에
하잔한 인간 하나
그는 버-ㄹ써
불타오르는 호수에 뛰어내려서
제 몸 사뤘더라면 좋았을 인간

이제 몇 해뇨
그 황홀 만나도 이 몸 선뜻 못 내던지고
그 찬란 보고도 노래는 영영 못 부른 채

젖어드는 물결과 싸우다 넘기고
시달린 마음이라 더러 눈물 맺었네

강선대 돌비늘 끝에 벌써
불사뤘어야 좋았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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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 김영랑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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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더 아실 이 - 김영랑

  그 밖에 더 아실 이 안 계실거나
그이의 젖은 옷깃 눈물이라고
빛나는 별 아래 애닯은 입김이
이슬로 맺히고 맺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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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색시 서럽다 - 김영랑

그 색시 서럽다 그 얼굴 그 동자가
가을 하늘가에 도는 바람슷긴 구름조각
핼슥하고 서느라워 어데로 떠갔으랴
그 색시 서럽다 옛날의 옛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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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호령도 하실 만하다 - 김영랑

창랑에 잠방거리는 섬들을 길러
그대는 탈도 없이 태연스럽다

마음을 휩쓸고 목숨 앗아간
간밤 풍랑도 가소롭구나

아침 날빛에 돛 높이 달고
청산아 봐란 듯 떠나가는 배

바람은 차고 물결은 치고
그대는 호령도 하실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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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 - 김영랑

언제부터
응 그래 저 수백리를
맥맥히 이어받고 이어가는 도란 물결소리
슬픈 魚族 거슬러 행렬하는 강
차라이 아쉬움에
내 후련한 연륜과 함께
맛보듯 구수한 이야기 잊고
어드맬 흘러갈 금호강

여기 해뜨는 아침이 있었다
계절풍과 더불어 꽃피는 봄이 있었다
교교히 달빛 어린 가을이 있었다.

이 나룻가에서
내가 몸을 따루며 살았다.
물소리를 듣고 잠들었다.
오랜 오늘
근이는 대학을 들고
수방우와 그리고 선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도시 믿어지지 않은,

이 나룻가
오릇한 위치에 내 홀로 서면,
지금은 어느 어머니가 된
눈맵시 아름다운 연인의 이름이,
아직도 입술에 맵돌아
사라지지 않고,
이 나룻가 물을 마시고 받은
내 청춘의 상처
아- 나의 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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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밭에 봄마음 - 김영랑

구비진 돌담을 돌아서 돌아서
달이 흐른다 놀이 흐른다
하이얀 그림자
은실을 즈르르 몰아서
꿈밭에 봄마음 가고가고 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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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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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소란소리 - 김영랑

거나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디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 예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아놓은 바람이어니
묵근히 옮겨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 다리 날아본 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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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냐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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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옛날 온 꿈이 - 김영랑

내 옛날 온 꿈이 모조리 실리어간
하늘가 닿는 데 기쁨이 사신가

고요히 사라지는 구름을 바래자
헛되나 마음가는 그곳뿐이라

눈물을 삼키며 기쁨을 찾노란다
허공은 저리도 한없이 푸르름을

엎디어 눈물로 땅 우에 새기자
하늘가 닿는 데 기쁨이 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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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훗진 노래 - 김영랑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
꽃은 까득 피고 벌떼 닝닝거리고

그대 내 그늘 없는 소리를 들으실까
안개 자욱히 푸른 골을 다 덮었네

그대 내 흥 안 이는 노래를 들으실까
봄물결은 왜 이는지 출렁거린디

내 소리는 꿰벗어 봄철이 실타리
호젓한 소리 가다가는 씁쓸한 소리

어슨 달밤 빨간 동백꽃 쥐어따서
마음씨 냥 꽁꽁 주물러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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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김영랑

눈물에 실려가면 산길로 칠십리
돌아보니 찬바람 무덤에 몰리네
서울이 천리로다 멀기도 하련만
문물에 실려가면 한걸음 한걸음

뱃장 우에 부은 발 쉬일까보다
달빛으로 눈물을 말리까보다
고요한 바다 우로 노래가 떠간다
설움도 부끄러워 노래가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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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속 빛나는 보람 - 김영랑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은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후젓하고 줄데없는 마음만 예나 이제나
외론 밤 바람슷긴 찬 별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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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 눈결에 쏘이었소 - 김영랑

뉘 눈결에 쏘이었소
온통 수줍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복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이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어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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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두시고 - 김영랑

님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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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 - 김영랑

  다정히도 불어오는 바람이길래
내 숨결 가부엽게 실어보냈지
하늘가를 스치고 휘도는 바람
어이면 한숨만 몰아다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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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김영랑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우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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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자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어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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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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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 -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세월을 끊임없이 흐려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후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길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고나
  
몇 해라 이 삼경에 빙빙 도-는 눈물을
슷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었노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진을 껶으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城 밑을 돌아다가는 죽음의 자랑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 마조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봄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디야
옛날 왕궁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히 우시다 너를 따라 가셨더라니
고금도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많은 귀양길
천리망아지 얼렁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생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으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진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산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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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 김영랑


향내 없다고 버리실라면
내 목숨 꺾지나 말으시오
외로운 들꽃은 들가에 시들어
철없는 그이의 발끝에 조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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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 김영랑

가을날 땅거미 아름픗한 흐름 우를
고요히 실리우다 훤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이뇨
임으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으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못 돌아오는
먼― 지난날의 놓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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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아가는 마음 - 김영랑


떠날아가는 마음의 파름한 길을
꿈이런가 눈감고 헤아리려니
가슴에 선뜻 빛깔이 돌아
생각을 끊으며 눈물 고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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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앞 맑은 새암 - 김영랑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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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 김영랑

걷던 걸음 멈추고 서서도 얼컥 생각키는 것 죽음이로다
그 죽음이사 서른살 적에 벌써 다 잊어버리고 살아왔는디
왠 노릇인지 요즘 자꾸 그 죽음 바로 닥쳐온 듯만 싶어져
항용 주춤 서서 행길을 호기로이 行喪을 보랐고 있으니

내 가버린 뒤도 세월이야 그대로 흐르고 흘러가면 그뿐이오라
나를 안아 기르던 산천도 만년 하냥 그 모습 아름다워라
영영 가버린 날과 이 세상 아무 가겔 것 없으매
다시 찾고 부를 인들 있으랴 억만영겁이 아득할 뿐

산천이 아름다워도 노래가 고왔더라도 사랑과 예술이 쓰고 달금하여도
그저 허무한 노릇이어라 모든 산다는 것 다 허무하오라
짧은 그동안이 행복했던들 참다웠던들 무어 얼마나 다를라더냐
다 마찬가지 아니 남만 나을러냐? 다 허무하오라

그날 빛나던 두 눈 딱 감기어 명상한대도 눈물은 흐르고 허덕이다 숨 다 지면 가는 거지야
더구나 총칼 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悲運의 겨레이어든
죽음이 무서웁다 새삼스레 뉘 비겁할소냐마는 비겁할소냐마는
죽는다 ---- 고만이라 ---- 이 허망한 생각 내 마음을 왜 꼭 붙잡고 놓질 않느냐

망각하자 ---- 해본다 지난날을 아니라 닥쳐오는 내 죽움을
아 ! 죽음도 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허나 어디 죽음이사 망각해질 수 있는 것이냐
길고 먼 世紀는 그 죽은 다 망각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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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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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 김영랑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碑돌 세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碑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恨되는 한마디 삭이실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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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터 - 김영랑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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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보면 흐르고 - 김영랑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흰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쓰런 눈물에 안겨
흩은 잎 쌓인 곳에 빗방울 듣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흘러가건만

그 밤을 홀히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서 떨어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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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 김영랑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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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이란 말 - 김영랑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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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자 - 김영랑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우리는 바다 없이 살았지야 숨막히고 살았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튀겨나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꺼꾸러져버릴 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 바다가 터지도다

쪽배 타면 제주야 가고오고
獨木船 倭섬이사 갔다왔지
허나 그게 바다러냐
건너뛰는 실개천이라
우리 삼년 걸려도 큰 배를 짓자꾸나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우리 큰 배 타고 떠나가자꾸나
창랑을 헤치고 태풍을 걷어차고
하늘과 맞닿는 저 수평선 뚫으리라
큰 호통 하고 떠나가자꾸나
바다 없는 항구에 사로잡힌 마음들아
툭 털고 일어서자 바닥 네 집이라

우리들 사슬 벗은 넋이로다 풀어놓인 겨레로다
기슴엔 잔뜩 별을 안으렴아
손에 잡히는 엄마별 아가별
머리엔 끄득 보배를 이고 오렴
별아래 좍 깔린 산호요 진주라
바다로 가자 우리 큰 바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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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 김영랑

바람에 나부끼는 갈잎
여울에 희롱하는 갈잎
알만 모를만 숨쉬고 눈물맺은
내 청춘의 어느날 서러운 손짓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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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람 그립고야 - 김영랑

밤사람 그립고야
말없이 걸어가는 밤사람 그립고야
보름넘은 달 그리메 마음아이 서어로아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사람 그립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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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지도 않는 입김 - 김영랑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숨은 마음 기어 찾으며
삶은 오로지 바늘끝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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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 김영랑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터-요

떠받는 名鼓인디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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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암(佛地庵) - 김영랑

그 밤 가득한 山정기는 기척없이 솟은 하얀 달빛에 모두 쓸리우고
한낮을 향미로우라 울리던 시냇물 소리마저 멀고 그윽하여
衆香의 맑은 돌에 맺은 금이슬 구을러 흐르듯
아담한 꿈 하나 여승의 호젓한 품을 애끊이 사라졌느니

천년 옛날 쫓기어간 신랑의 아들이냐 그 빛은 청초한 수미山 나리꽃
정녕 지름길 섯드른 흰옷 입은 고운 소년이
흡사 그 바다에서 이 바다로 고요히 떨어지는 별살같이
옆산 모롱이에 언뜻 나타나 앞골 시내로 사뿐 사라지심

승은 아까워 못 견디는 양 희미해지는 꿈만 뒤쫓았으나
끝없는지라 돌여 밝은 날의 남모를 귀한 보람을 품었을 뿐
토끼라 사슴만 뛰어보여도 반드시 기려지는 사나이 지났었느니

고운 輦의 거동이 있음직한 맑고 트인 날 해는 기우는제
승의 보람은 이루었느냐 가엾어라 미목청수한 젊은 선비
앞시냇물 모이는 새파란 소에 몸을 던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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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마음 - 김영랑

아파 누워 혼자 비노라
이대로 가진 못하느냐

비는 마음 그래도 거짓 있나
살잔 욕심 찾아도 보나
새삼스레 있을 리 없다
힘없고 느릿한 핏줄 하나

오! 그저 이슬같이
예사 고요히 지려무나
저기 은행잎은 떠날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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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 환히 - 김영랑

빛깔 환히
동창에 떠오름을 기둘리신가
아흐레 어린 달이
부름도 없이 홀로 났네
月出東嶺!
팔도사람 다 맞이하소
기척없이 따르는 마음
그대나 홀히 싸안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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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 김영랑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개풀 수줍어 고개 숙이네
한낮에 배란 놈이 저 가슴 만졌고나
뻘건 맨발로는 나도 자꾸 간지럽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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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Pluie D'Ete

문학 전시관 (kumari문학관) /http://kumari.namoweb.net/200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