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오지 않는 꿈/박정만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2. 9. 10:41
오지 않는 꿈/박정만
번호 : 2749   글쓴이 : 도정화
조회 : 9   스크랩 : 0   날짜 : 2006.12.03 22:38

          

          오지 않는 꿈 - 박 정 만-
          초롱의 불빛도 제풀에 잦아들고 어둠이 처마 밑에 제물로 깃을 치는 밤 머언 산 뻐꾹새 울음 속을 달려와 누군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문을 열고 내어다보면 천지는 아득한 흰 눈발로 가리워지고 보이는 건 흰눈이 흰눈으로 소리없이 오는 소리 뿐 한 마장 거리의 기원사(祈願寺) 가는 길도 산허리 중간쯤에서 빈 하늘을 감고 있다. 허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다 풀뿌리같이 저마다 더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지고 나는 꿈마저 오지 않는 폭설에 갇혀 빈 산이 우는 소리를 저 홀로 듣고 있다. 아마도 삶이 그러하리라 은밀한 꿈들이 순금의 등불을 켜고 어느 쓸쓸한 벌판길을 지날 때마다 그것이 비록 빈 들에 놓여 상할지라도 내 육신의 허물과 부스러기와 청춘의 저 푸른 때가 어찌 그리 따뜻하고 눈물겹지 않았더냐. 사랑이여, 그대 아직도 저승까지 가려면 멀었는가. 제 아무리 밤이 깊어도 잠은 오지 아니하고 제 아무리 잠이 깊어도 꿈은 아니 오는 밤, 그칠 새 없이 내리는 눈발은 부칠 곳 없는 한 사람의 꿈없는 꿈을 덮노라.

박정만 시인의 약력 및 시정신
번호 : 235   글쓴이 : 나르치스
조회 : 29   스크랩 : 0   날짜 : 2006.12.06 09:22

 

 

박정만 朴正萬 (1946. 8. 26 - 1988. 10. 2)                                                     

 

1946년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66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이야기〉로 당선되었다. 1971년 경희대 국문과를 수료하고, 1972년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공모에 시 〈등불설화〉,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었다.


학원문화사·중앙문화사 등의 출판사와 《월간문학》 《어깨동무》 등의 잡지사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에 고려원(주) 편집부장이 되었으며, 1979년에는 첫 시집 《잠자는 돌》을 출간하였다. 1981년 5월 작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회사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는 날까지 시달리면서 집필에만 전념하였다.


한국의 전통적 서정시를 주로 썼으나, 필화사건에 잘못 연루되어 곤욕을 치르고 난 뒤 결혼생활도 파괴되고 병마에 시달리는 등 개인적 슬픔이 계속되면서 작품 속에도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988년 10월 2일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1989년 현대문학상, 1991년 제3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백과사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 <어느덧 서쪽> 문학세계사
시집 <잠자는 돌> 고려원 1979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오상사 1986
동화집 <별에 오른 애리> 샘터사 1986
수필집 <너는 바람으로 나는 갈잎으로> 1987
선시집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문학사상사 1987
시집 <서러운 땅> 문학사상사 1987
시집 <저 쓰라린 세월> 청하 1987
시집 <혼자 있는 봄날> 나남 1988
시집 <슬픈 일만 나에게> 평민사 1988
유고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 실천문학사 1988
박정만 시선 <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 나남 1988
박정만 시선집<다시 눈뜬 아사달> 외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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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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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한 점 없는데 온 세상의 풀꽃들이 일제히 시들어 버렸구나. 朴正萬 ! 그대 또한 저와 같아서 적막한 그대의 한 생애가 가을 들풀처럼 저물어 버렸구나. 바로 그 얼마 전만 해도 그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화전을 하며 <살인적으로 행복하다>던 그대, <한세상 살다보니 병도 그만 홑적삼 같다>고 조그맣게 행복해하던 그대가 그토록 쉽게 무너져 갔구나. 正萬아 ! 사람의 운명이란 것이, 그것이 서로 엇갈린다는 것이 정녕 백지 한 장 차이라더니, 그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인 朴正萬 ! 그대 이름은 우리에게 저 무모하기만 하던 60년대 후반의 낮고 우울한 그 겨울을 생각나게 한다네. 4·19와 5·16의 뒤끝에서 어둔 기류가 안개처럼 이 땅을 뒤덮고 있던 우리의 文靑시절, 무너져 가던 명동 [은성]이나 무교동 낡은 골목 주점을 허기져 기웃거리던 저 목마름 속에서, 함께 시를 논하고 인생을 다투던 그때 우리의 그 유치함과 맹목의 순수함이 새삼 생각난다네. 그대는 옛모습을 그대로 남루한 입성과 어렴풋한 취기로 순수 하나만을 그냥 더불고 살아가고 있더니만 이렇게 그대 먼저 인가의 불빛 하나 없을 저 차운 바람 속 저승의 어둔 모퉁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을 것인가. 저 고통스런 70년대와 참혹하기만 하던 80년대의 뒤안길, 헐벗은 가로 어느 골목길에서 홀로 절망과 허무라는 天刑의 病苦를 통음하면서, 모든 허욕을 떨쳐버리고 한올 한올 절망의 실로 처절하게 시의 피륙을 짜내면서 시인의 자존심과 시의 위의를 지켜 나아가려던 그대 朴正萬 !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 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이라는 그대 싯구 하나가 끝내 아픈 화살이 되어 우리 심장에 날카롭게 박혀오는구나.

 과연 그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아득한 절망에 이르게 하였고, 마침내 저 죽음의 세계로 치닫게 하였는가? 아마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성이 자유인이었던 그대 성격탓이 클 것이려니와 직접적으로는 저 참혹했던 80년대 초의 어이없는 횡액과 뒤이은 방황 때문이 아닐는지, 그 무자비한 군사정권의 폭력과 온갖 상업주의가 판치는 이 볼모의 연대의 그대는 인간적인 자존심과 시인의 양심을 지켜보려다가 처참하게 좌초해 간 것이 아닐까 말일세. 그러기에 자네의 싯구에는 온통 시퍼런 허무와 한의 칼날이 섬뜩섬뜩 빛나고 있었던게 아니었겠는가? 우리 뜻있는 사람들이 모두 아끼고 사랑하던 그대 詩人 朴正萬 ! 그대 깊고 잠의 머리맡에 끝없이 떠돌고 있는 초록별 하나 보이고, 그 곁에 살아서 그리도 고단하던 목숨 하나가 비로소 편안히 놓이는구나. 그래 이승에서의 그대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웠길래 그대는 <그리운 저 무덤>을 생각하면서 죽음과 그리도 가까워지려 했었는가? 그대만큼 죽음을 따뜻하게 감싸안으면서, 처절하게 허무를 전신으로 끌어안고 싸워간 진짜 시인들이 우리 시사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이제 이미 죽음을 그대 속에 통과시킨 그대, 죽음보다 강한 그대가 어찌 무엇을 더 두려워하랴. <침잠하는 돌 속에 산이 잠기고/ 산자락에 엎드린 수정무지개/ 잘 있거라 눈부신 잠의 木棺위에서/ 생은 다만 玉 같은 어둠의 浮標였으니>라고 자넨 노래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대는 素月보다 깊은 한과, 말라르메보다도 더 그윽한 허무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새삼 아프고 안타까울 뿐이네.

 부디 편안히 잠들거라, 우주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간 그대 朴正萬 ! 우리 모두 아끼던 자유인, 천부적인 서정시인 朴正萬 ! 지금쯤 그대 죽어 홀로 걸어가고 있을 저승길 모롱이 천지 가득 오늘처럼 함박눈 나리여 이승에서 그토록 고단했던 그대 목숨 하나 포근하게 위무해 주려니.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 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내리는 서쪽으로/ 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라고 노래하던 [작은 戀歌]가 문득 아프개 되살아오네.

 그대 부디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그곳에서 꽃피워 보게. 그리고 시의 별로 떠올라 우리 어둔 지상의 삶을 비춰 주게. 이제 마른 눈물로 간구하노니, 그대 고혼의 명복을 빌 따름이로다.       
<김재홍>

 

도봉에 살면서 / 박정만 시인
번호 : 1   글쓴이 : 진부령
조회 : 6   스크랩 : 0   날짜 : 2006.11.12 13:04
도봉에 살면서



- 박정만(朴正萬)





어둠이 꽃뱀처럼 눈을 뜨는 시간에

불타는 해바라기 꽃그늘에 누워

무참하구나

나 해바라기 꽃잎 같은 한 생명을 또 얻었으니



울지 말아,

너 뻐꾹새 숨어 우는 목소리로.

살붙이 뿔뿔이 흩어지고 더러는 죽고

손이 없어

빈 손으로 양형(楊兄)의 누님이 너를 받았다.



이 밤에는 꿈도 오지 말고

등불만이 홀로 남아 있거라.

내가 살던 정다운 옛집을 꿈꾸며

빈 공터에 나가

마른 잡초와 부서진 각목으로

네 살의 허울과 내 마음을 태우노라.



아닌 밤 이 휘황한 불빛은 무엇인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우리들 영혼의 작은 반딧불.

아내여, 핏발선 삼눈에 삼불을 쓸어 안으며

시름으로 시름을 덮어도

그 위에 웬 시름이 이다지도 쌓이느냐.



오늘도 다리 건너

일없는 남의 땅, 맹아원(盲啞院) 뒤뜰에 자라난

십년생 낮은 솔숲에 드러누워

선가귀감(禪家龜鑑) 첫장만을 넘기다 넘기다

저무는 저녁산, 저녁해를 지고 오노라.



박정만(1946~1988) 시인은 전북 정읍 출생으로 지난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8년 10월 2일, 만 42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재시인이다.

내 대학 후배로서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는 훌륭한 시인이었지만 우리 나라 문단의 촌스럽고 협소한 풍토 때문에 살아있을 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간경화로 요절한 뒤에야 그나마 그를 아끼는 평론가 김재홍 교수 등이 박정만 시인을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박정만 시인은 김소월의 맥을 잇는 우리의 전통적 서정시인으로서 그의 탁월한 시적 감수성과 언어 구사력, 시적 운률 등은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해한(解恨)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고독과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때로는 즐기고 때로는 가슴을 치면서 절절한 목소리로 한국적 정서를 노래했다.

시도 좋았고 노래도 잘 불렀다. 술은 지나치게 좋아했다. 마음이 아주 여린 사람이었다.

큰 눈망울에 선한 눈을 지닌 인간적인 , 너무나 인간적인 사나이였다. 그는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주옥 같은 시편들은 오래오래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리라.



그의 시 <도봉에 살면서>는 박정만 시인의 초기 작품으로서 그의 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찍 연애결혼을 한 그는 첫딸 송이를 낳고 전주에서 잠시 조그만 가게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도봉산 자락 단칸방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취직이 어려운 때라서 그는 얼마동안 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 무렵에 장남 찬연(용학)이를 낳게 되었다. 아주 어려웠던 시절, 두 아이를 기르게 된 아비로서, 가장으로서의 아픔이 그 특유의 유장한 가락으로 읊어진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시중의 하나이다.



그의 무덤은 양수리쪽 '무궁화 공원묘지'에 자리를 잡고 있고 근년에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입구 호수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정성수(丁成秀)>


카페 - (詩를 배달하는 우체부)에서
출처 : 진부령 원문보기 글쓴이 : 진부령

 

 

낮은 목소리로...박정만
번호 : 2825   글쓴이 : degas38317
조회 : 26   스크랩 : 0   날짜 : 2006.10.31 07:45

산정에 올라오면 먼저 머물 자리를 마련한다.

금년의 나는 지난 해의 내가 아니므로

자리도 새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억새밭에 자릴 잡았다.

먼 산정에는 어느덧 억새꽃이 무성하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산 너머로 해는 지고

장엄한 어둠이 살에 스미는 것을 느낀다.


삽시간에 별들이 돋았다.

사람의 눈매가 그렇듯이

어떤 별은 글썽글썽 눈물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별밤엔 혼자서 무엇을 하나.


나는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더욱 낮게

풀뿌리까지 닿도록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차르트를 듣다가 생각지도 않게 발견한 시인입니다.
테니슨의 눈물보다 더한 눈물을 얘기하는 듯 해서 올립니다.

 

문학과 인생&좋은시 (32)

시인의 요절과 마지막 시 박정만 | 문학과 인생&좋은시
2006.07.29 18:15

시인의 요절과 마지막 시 박정만

  

  

194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남.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잠자는 돌』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저 쓰라린 세월』 『혼자 있는 봄날』 『어느덧 서쪽』 등이 있음.
동화집 『크고도 작은 새』 『별에 오른 애리』 산문집 『너는 바람으로 나는 갈잎으로』
1988년 작고.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김 영 석 | 시인


박정만은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낸 친구이기도 했지만 학교로 따지면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내리 같은 학교를 다닌 3년 후배다. 대학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모습에서 순하디순한 토끼를 연상했다. 갈색의 크고 투명한 눈이 그랬고, 숫된 시골아이가 낯선 곳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하여 괜히 씩―하고 웃는, 그런 웃음을 버릇처럼 곧잘 보이는 양이 또한 그랬다.
죽을 때까지도 그의 그런 숫보기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무슨 문단의 행사에 다녀오거나 글 쓰는 친구들을 만나고 왔을 때, 그는 “광대뼈를 흔들면서 사교계를 좀 누볐지.”라고 익살스럽게 과장된 한 마디를 날리면서 예의 그 씩―하는 웃음을 짓곤 했다. 내 요량으로는 그 말의 속뜻이 ‘낯짝 두껍게 젠 체하면서 세상 나들이하느라 참 혼났네.’쯤으로 들렸다. 그만큼 그는 세상살이를 아주 낯설어 했고 자신의 삶이 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져 몹시 주체스러워 했다.
그는 애초부터 이 세상에 잘 적응이 안 되는 피를 가지고 태어난 떠돌이였다. 그래서 그는 아주 생래적으로 죽음을 꿈꾸었던 듯하다. 엄청난 양의 그의 시편들 어디에나 떠돌이의 슬픔과 죽음의 푸르스름한 이내가 감돌고 있다. 그의 시와 삶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다음의 초기 시 몇 구절을 보라.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 「잠자는 돌」 1, 2연

한 마장의 하늘을 떠도는
떠돌이의 피를 가지고
자네, 민들레 꽃씨 같은 얼굴을 하고
어디로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략)
나무 그늘 돌 위에
고단하게 쓰러진 저녁 어스름.
쓸어도 쓸어도 쌓이고 쌓이는
그 수정水晶의 푸른 어스름. ―― 「풍장 2」 1, 3연

「잠자는 돌」은 내가 알기로 고등학교 시절의 작품인데 등단 후에 개작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보듯이 그는 벌써 이때부터 죽음을 꿈꾸고 있다. 그는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굳세게 어둠을 짚어가야 하는 어금니는 처음부터 뿌리가 없어 슬픈 귀동냥으로 마을마다 떠다니고 있다.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는 떠돌이의 삶과 그런 삶이 종내 그릴 수밖에 없는 죽음의 슬픔이 「풍장 2」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돌 위에 쌓이고 쌓이는 수정의 푸른 어스름은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떠돌이의 가슴에 늘 이내처럼 감돌고 있는 슬픔과 한이리라.
박정만이 지닌 그 토끼 같은 순진성과 죽음을 향한 떠돌이의 피가 때로 묘한 광기와 열정을 만든다는 것을 안 것은 그를 안 지 한참 뒤의 일이다. 기억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때가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세상이 좀 어수선할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태일 형과 함께 관철동 어느 구석집에서 우연히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조태일 형은 나와 정만이의 대학 선배니까 오랜만에 나누는 세 선후배간의 허물없는 자리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술기가 꽤 올랐을 때였다. 시에 대한 각자의 평소 생각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태일 형과 박정만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들어 보니 조태일 형은 박정만의 시가 개인적인 서정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적인 충고를 하고 있었고, 정만이는 조태일 형의 시가 시적 감성과 언어감각이 결여된 채 지나치게 목적의식에만 기대고 있다고 맞받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만이의 말투와 태도는 평소의 그것이 아니고 생판 딴 사람 같은 열기와 격정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의 논쟁 아닌 논쟁이 점점 술기와 더불어 거칠어지는 듯싶더니 드디어 정만이의 무슨 말 끝에 조태일 형이 정만이의 뺨을 후려치게 되었다. 그러자 묘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던 정만이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냅다 술잔을 들어 조태일 형의 면상에 패대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형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형은 그 우람한 체격의 치수에 딱 맞게 말없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피를 그저 쓰윽 한 번 훔치고 나서 거푸 소주 몇 잔을 들이켜더니, “나 먼저 나간다. 다음에 보자.”하는 말을 남기고는 나갔다.
두 사람이 그 뒤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여전히 잘 지낸 것은 물론이다. 박정만의 그 토끼같이 순한 심성 속에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의 시에 대한 주장과 고집이 오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광주사태를 겪고 난 5공초 암울하던 때, 정만은 청진동 근방의 모 출판사 편집장 일을 맡고 있었다. 봄볕이 더없이 화사한 어느날 오후. 나는 최명희(아, 그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와 그 출판사 부근의 조용한 술집에서 정만이를 불러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그랬듯이, 글러먹은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몹시 침울하고 다소간 체념적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곧잘 그렇듯이 이야기는 회고조로 변했고 취기가 오르면서는 다시 글러먹은 문학과 글러먹지 않은 문학으로 화제를 바꾸어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다. 희미한 기억들을 모아보면, 박정만은 요약컨대 시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연면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며, 그 표현은 마땅히 우리말의 가락과 뜻이 미묘하게 결합된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리말에 대한 시적 감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글러먹은 시에 대해 개탄했던 것 같다. 이에 최명희도 동의하면서, 우리의 것을 우리 세대에 복원하고 세련시키지 않으면 우리 문학은 큰 줄기를 하나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며 대략 전통주의적 입장을 이야기했고, 나는 이들의 말을 다소 예스럽게 표현하여 조선주의 또는 조선혼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동의했던 것 같다.
한참 이야기가 도도할 무렵 열려진 뒷문을 내다보니 보자기만한 뜨락에 새로 돋은 여린 풀잎들 위로 화사한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많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나는 그런 봄볕의 정경을 보면 슬프다 못해 그만 처참해지고 만다. “처참하구나, 처참해.” 무심코 뱉은 내 말에 정만이 눈치를 챘는지, “형, 저 봄볕이 우리들 먹으라고 하늘에서 뿌리는 청산가리요, 청산가리. 저 청산가리 소주에 타서 마시고 우리도 그만 청산가리나 됩시다.” 하고 말을 받았다. 이어 우리는 “자, 청산가리 한 잔.” “청산가리 곱빼기로 또 한 잔.” 하고 외치면서 거푸 잔을 들었고, 정만이는 드디어 물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의 18번을 달뜬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봄날에는 꽃 안개 아름다운 꿈속에서 처음 그대를 만났네……” 그런데 낌새가 이상하여 옆을 보니 술은 입술에 대는 둥 마는 둥하던 최명희가 흰 무명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누이처럼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니 정만이는 제 식으로 잘 직조된 조선말의 영롱한 시들을 썼고, 최명희도 또한 제 식으로 조선혼을 소설에 수놓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잘 알려진 대로 박정만은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악명 높은 서빙고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다. 그때 모래내에 있던 그의 전셋집을 찾아갔는데 예의 그 어색하게 씩―하고 웃는 모습은 이미 예전과는 달리 아주 메마르고 하얗게 풀이 죽어 있었다. 골병 든 삭신의 어혈을 푸느라고 무슨 한약을 막걸리에 달여먹고 있노라 했다. “갇혀 있던 방 철창 너머에 소학교가 있는데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햇살처럼 들려와요. 그때 현실과 꿈이 한가지라는 생각이 듭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의 뿌리 없는 떠돌이의 삶은, 그의 시 구절처럼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수정의 푸른 어스름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아주 때를 만나 작파한 듯 잠자는 돌을 향하여 막 굴러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혼, 그리고 어느덧 양식이 된 술.
내리막길을 굴러가는 사람의 절박함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그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는 삽화 하나. 그가 골병 든 심신을 달래면서 술을 마시다가 탈진하면 더러 링거나 영양제 주사를 맞곤 했는데, 그때 주사를 놓아주던 처녀 간호사 염모 씨와 서로 정이 들어 상계동에서 동거 비슷한 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그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형, 빨리 좀 집으로 오세요. 빨리요, 큰일 났어요.” 쫓기듯 이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필시 그의 말투로 보아 무슨 큰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 짐작하고, 상황판단과 응변에 있어 누구보다 믿음직한 이윤기를 급히 불러내어 같이 달려갔다. 방안에서는 여러 사람의 거칠고 험악한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들어 보니 염씨의 집안 사람들 몇이 염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것이었고, 정만이는 막무가내로 그걸 가로막고 있는 중이었다. 말리고 자실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자식이 셋이나 딸린 중년의 이혼 남자에게 어느 부모가 토달지 않고 아직 처녀인 딸을 고분고분 내놓겠는가. 결국 중과부적으로 염씨는 끌려 나갔고, 우리는 정만이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길이 뛰는 정만이를 우리도 더는 어쩔 수 없어 놓아주었더니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맨발로 댓걸음에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을 맨발로 내달려 가더니 염씨를 잡고 죽어라 매달렸다. 그러나 힘으로 어찌 당하겠는가. 뜯어 말리는 힘에 의해 길 복판에 나둥그라지며 그는 좀 어떻게 해달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사정하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눈빛은 내리막길로 굴러가는 자의 마지막 안간힘, 이승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안타까이 잡아보려는 본능적인 절박한 몸짓,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뒤 그는 염씨와 상계동의 작은 교회에서 열 명도 채 안 되는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기원정사라는 암자가 있는 변두리 야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튼다. 그러나 이미 가속도가 붙은 뿌리 없는 떠돌이의 숙명적인 내리막길을 그 부인 혼자의 힘으로는 처음부터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의 곡기를 끊고 술로 버티며 때때로 미친 듯이 시를 써 갈기던 그는 벌써 저승과 교신을 하고 있었다. 끝내 그 부인도 떠나고 그는 홀로 남아 오로지 시와 술에 한사코 매달렸다.
“형, 시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밤낮이고 끊임없이 들려요. 어떤 때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죽어라고 그걸 받아 적어야만 해요. 그걸 받아 적지 않으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요.”
이것이 그 무렵 그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시를 끊임없이 써야 했고, 그 시 쓰는 행위는 또한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잉걸불을 부채질하며 사위게 했다. 거기에다 그의 양식은 오직 술밖에 없었다. 그가 죽기 전 한 달도 채 되지 못하는 사이에 써낸 수백 편의 시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가 죽기 바로 전, 봉천동 어느 초라한 개인 병원에 잠시 입원하고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를 들려주던 그 목소리들이 좀 뜸해졌어요. 내가 더 이상 쓸데없어 이제 다들 가버렸나 봐요. 이런 게 평화가 아닌가 싶네요.” 그의 말소리가 거의 바람소리가 다 되었다고 느끼면서, 잠자는 돌 위에 쌓이는 그 수정의 푸른 어스름이 벌써 짙은 어둠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나는 그때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그의 딸로부터 전해 듣고 달려가, 그가 없는 빈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여기저기 노트쪽에 써 갈긴 짤막한 시들을 무슨 유골 조각 줍듯 가려서 훗날 그의 시 전집 속에 함께 담았다. 그때 수습한 마지막 그의 시, 그것이 “나는 사라진다 /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종시」 전문) 라는 것이다.
삶 자체가 천형인 그런 사람이 있다. 시 아니고는 아무 데도 마음을 부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박정만이었다.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 출생.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썩지 않는 슬픔』
      『나는 거기에 없었다』, 논저에 『도의 시학』 외 10여 권이 있음.

 

 


김남주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남.
1974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등이 있음.
옥중시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2』
산문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시와 혁명』1994년 작고.

 

 

김남주는 ‘대지의 시인’이었다


             김 준 태 | 시인


·시인의 사명은 귀향歸鄕이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인은 그 민족과 함께 울고 웃지 않으면 안 된다. ―가르시아 로르까
·흙(혹은 대지)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은 힘이 없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문학도 그렇다. ―김남주
·김남주는 요절시인이 아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 시인이다. 행여 시간을 놓칠세라 황급하게 고향의 논밭으로 돌아간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이다. ―김준태

오랜만에 고향 해남을 찾아간다. 광주에서 삼백 리 길, 서울에서 천 리 길인 한반도의 ‘땅끝’ 마을 해남. 지금이야 두 시간이면 족히 닿을 수 있지만 60년대 그 시절만 하더라도 광주에서 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던 해남 가는 길. 그러나 나는 천 리면 어떠랴 만 리 길이면 또 어떠랴 하면서 고향 가는 날은 온통 들뜬 심정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께서 “내가 열반에 들거든 내 유품들을 저 해남 대흥사(대둔사)에 모셔라. 해남 땅은 삼재(三災 : 물·불·바람 혹은 전쟁·전염병·흉년 따위의 재앙)를 면할 수 있는 천하의 명당이니라.”고 말한 곳이 아닌가. 84년의 생애 중에서 무려 41년 동안이나 용맹정진한 묘향산 보현사를 제쳐두고 굳이 남녘땅 해남 대흥사를 택한 서산대사. 아마 그래서 님의 말씀처럼이나 해남은 지리학적 의미로서의 ‘땅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다시 담아 놓을 수 있는, 그리하여 그 무엇들을 다시 꽃 피우게 할 수 있는 그런 ‘시작始作의 땅’으로서 더 간절한 의미를 갖는 땅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어느덧 영암 월출산 터널을 지나 해남군 지역으로 들어선다. “월출산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 두어라 해 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걷히랴.” 영암 월출산 풀티재를 넘을 때마다 언제나 읊조리곤 했던 고산 윤선도의 시구를 두어 차례 입술에 올리는 사이 내가 탄 버스는 그렇게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 해남의 논밭을 가로질러 달린다.
바로 이때인가 싶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먼 옛사람’이 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한 김남주 시인이 구름과 바람결을 헤치고 다가와 미소짓는다. 나보다 한국문단에는 늦게 나왔지만 두 살이 위인 동향 선배 김남주 시인. 그는 자신의 고향마을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해남읍내에서 남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 삼산면 봉학리란 마을. 완도로 가는 국도에서 조금 비껴 서자 전형적인 한국의 소나무 숲 사이로 그리웠던 시절의 새떼들이 쏟아내는 노래 소리가 한창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그의 생전 필생의 시와 사상과 행동을 지배했던 ‘고향의 흙(대지)’이 어디로 무너져 내리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서 이 봄날 파릇파릇 숨쉬느라 바쁜 모습들이다.
“나의 아버지와 고정희 아버지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지. 그래서 한때는 서로 사돈을 삼자고 농담 아닌 진담, 진담 아닌 농담도 즐겁게 나누며 살았던 모양이야. 저 건너 고정희네 마을도 우리 마을처럼 대흥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로 농사를 짓고 있지.”
살아 생전 김남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려니 아닌 게 아니라 김남주 생가와 고정희 생가는 고작 1.5km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1980년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 생년월일을 짚어보니 전자는 1946년생으로 봉학리에서 태어났고 후자는 1948년생으로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물론 봉학리와 송정리는 행정구역상으로 같은 삼산면에 속하며 예로부터 대둔산 대흥사의 사찰문화권에 깊숙이 뿌리를 대었던 마을로 보인다. 두 마을은 대흥사와는 불과 2.5km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대둔산 최고봉인 두륜봉을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김남주의 고향집 마당에 들어선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남주! 오랜만일세.”
“준태 자네도 참 오랜만이네. 이미 아홉 해 전에 죽은 내가 무슨 얘깃거리가 된다고? 허허, 하지만 염려할 것 없네. 내 개인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태어난 ‘우리 동네’에 얽힌 얘기를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네. 우리 동네… 가진 것이라곤 흙과 나무와 새소리밖에 없는 우리 동네… 그리고 저 죄 없이 누워 있는 논밭들과 농부들의 황폐한 얼굴빛… 하지만 이 흙 위에 서면 언제나 내 가슴엔 힘이 솟구친다네.”

1988년 12월 21일. 전주교도소에서 9년 3개월만에 출감한 김남주 시인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 몇 대목을 이 자리에 옮겨와 보면 감회가 깊을 것 같다. 내가 5·18필화사건으로 고교교사에서 해직된 후 신문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던 그 무렵 인터뷰다.

―김남주 시인, 그럼 우리에게 있어 시인은 누구이고, 무엇입니까?
“시인은 우선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비켜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민족문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으니까요. 시인은 싸우는 사람과 동의어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앞으로 생활을 어디에서 할 예정입니까?
“고향에 내려가서 흙의 노동을 할 것입니다. 건강과 시를 보살피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문학의 힘은 노동과 자기와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솟구치는 것이기도 한데 문학은 이를테면 민중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지에서, 흙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시)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문학 역시 대지(흙)와 노동에서 발을 뗐을 경우 절로 힘이 빠져버림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노동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개한 원시인에서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지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듯이 60년대 한국 민족문학의 정점을 김수영·신동엽이 이루었다면 70년대는 김지하이고 80년대는 김남주이다. 온몸을 바쳐 싸웠던 실천행동에서도 그랬었지만 이들의 문학적 성과물 또한 한국시를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이끌어 올렸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들은 없는 줄로 안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이 대지(흙)를 바탕에 깔고 씌어졌다는 그 말이다. 자유와 투쟁을 노래한 시이든, 통일을 노래한 시이든, 민중과 민족을 노래한 시이든, 광주학살에 분노한 시이든, 자기변혁을 노래한 시이든, 아니면 고향의 풀꽃들을 노래하는 서정시이든―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은 흙과 대지 위에 분명히 자신이 두 다리를 탄탄하게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남주의 시적 상상력하며 시적 언어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의 고향 해남의 논과 밭에서, 그리고 거기에 사는 농민들의 삶 속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메마르지 않고 생경하지도 않고 촉촉이 물기를 내뿜는다. 거칠게 쏟아대는, 메시지가 강한, 정치현실을 질타하는 시에서도 그의 시편들은 방금 쟁기로 갈아 엎어놓은 흙 알갱이처럼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다가 마침내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적시거나 흔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혹은 농민시인)’이란 레테르를 그의 이름 앞에 또 하나 더 붙여놓아도 좋을 그런 시인인지 모른다.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한 함성지 사건과 남민전 사건 등으로 10여 년을 옥살이한 김남주. 그러나 그는 오히려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었다. “시인은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시대의 중대한 문제와 싸우는 해방전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행동으로 외치다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옥독獄毒으로 마흔아홉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그가 즐겨 부른 노래들은 전투적인 노래가 아니었다.
그의 18번은 남인수의 노래로 알려진 「고향의 그림자」 따위다. 수배자 혹은 보호감찰 대상자가 되어 언제나 쫓겨다니며 숨어 살아야 했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께서 땅에 묻히던 날마저도 감옥문을 나갈 수가 없어 ‘신세타령’하듯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로 시작되는 노래를 섧게 섧게 부른 것이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 똑딱선 프로펠라 소리가 이 밤도 /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를 부를 때 그의 두 눈동자는 항상 고향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 글썽이던 김남주의 농촌적 순결성―그것이 바로 그의 시의 무기가 아니었을까.

아기무덤 고와서

안아 주고 싶고

어미무덤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고

나는 몰랐네 예전에
우리나라 무덤이 이렇게
곱고 포근한 줄을
나이 들어 애기 낳고
추운 날
양지바른
산에 들에 가서야 알았네
―― 「무덤」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옛 마을을 지나며」

시 「무덤」과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읽노라면 어느새 내가(아니 우리들 모두가) 그의 고향마을 가까이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아니 우리들 모두가 저마다 자신들의 고향 산모롱이쯤에 닿아 있음을 고요히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멀지 않았던 옛날, 적어도 김남주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시절만 하더라도 고향 마을로 가는 양지바른 산비탈에는 아기무덤과 어미무덤이 함께 누워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손에 쥐듯 제비꽃 몇 송이를 피우며 누워 있는 아기무덤과 어미무덤―그 모습이 한량없이 예쁘다며 시인은 “아기무덤 고와서 꼭 안아주고 싶고 어미 무덤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다고 말한 뒤 “우리나라 무덤 이렇게 곱고 포근한 줄을 …추운 날 양지바른 산에 들에 가서야 알았”노라고 노래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 서정시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감동이 깊은 시로 읽혀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기무덤과 어미무덤을 죽음의 흔적으로 보지 않고 꼭 안기고 싶은 생명체인 듯 노래하는 시인은 역시 시 「옛 마을을 지나며」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새로운 발견을 하고 환희에 젖는다. 단순한 나무 끝이 아니라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들을 위해 홍시 하나쯤은 남겨두는 우리네 농촌 사람들의 마음을 “조선의 마음”이라고 크게 비유하며 추켜올려 세운다. 감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홍시(까치밥) 하나에서 우리 민족의 ‘여유’를 발견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바라고 바랐던 우리 민족의 ‘희망’ 그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유가 없으면 희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통일할 수 있는 여유도 또한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옛 마을을 지나며」는 단 4행밖에 안 되는 시이지만 ‘큰 시’라는 느낌이 불끈 들게 됨은 어쩔 수가 없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다”라고 노래했다. 그 말은 시인이 민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하기 위해서(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는 시인 자신이 그 나라 사람들의 고향의 흙과 자연, 그 모든 생명체들의 꿈틀거림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내가 해남에 가서 만난 시인 김남주가 “대지에 뿌리박은 문학(시)이야말로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고 실천적으로 강조한 말은 내일의 한국문학에 분명히 유효한 코드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김남주― 그는 남녘 땅끝 마을이 낳은 ‘대지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 「고목」을 읽으며 그와의 만남을 끝낸다. 「고목」은 차라리 「거목」이라고 제목을 고쳐도 좋을 시가 아닐까. 김남주 고향 역시 몇백 년 족히 넘은 듯한 거목이 한국의 여느 마을처럼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 거목은 어쩌면 김남주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이나 푸르게 가지와 이파리를 퍼뜨리고 있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 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고 싶다. ―― 「고목」

김준태 1948년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지로 문단에 나옴. 현재 조선대 국문학부 초빙교수.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칼과 흙』 『지평선에 서서』 외. 세계문학기행집 『슬픈 시인의 여행』 등 다수

 


고정희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남.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 출사표』 『아름다운 사람 하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1년 작고.

 

그가 남긴 여백


          박 해 란 | 여성학자


해마다 6월 첫 주말을 해남행으로 잡아 놓은 지 벌써 12년째다.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 동인들은 그렇게 1년에 한 번씩 해남 송정리의 고정희네 집(태어났던 곳과 잠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 한동네에 살아도 친구나 지인의 집을 방문한다는 일이 점점 번거로운 행사가 되어가는 게 요즘의 도시생활이다. 그러나 해마다 고정희네 집을 찾는 일만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또 아리게 한다.
고정희 생가에 들러 아직도 체취가 흠뻑 남아 있는 그의 유품들을 둘러 보고, 청량한 솔바람이 반겨 주는 그 무덤의 푸른 잔디를 쓰다듬고, 나날이 주름이 늘어가는 큰올케가 정성 들여 마련한 돼지고기와 수박을 배불리 먹고, 그리고 저녁 늦게 대흥사를 기웃거리는 일과는 또문 동인들에게 이제 하나의 신성한 의례로 자리잡았다. 분망하다 못해 분열적이기까지 한 일상에서 허우적거리던 동인들은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고정희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는다.
동인들뿐만 아니다. 살아 생전 곳곳에서 고정희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이물없이 동행하기도 하고 생전에 고정희와 아무런 연결이 없었던 해남 지역의 문인들도 절반은 손님처럼 그리고 절반은 주인처럼 부드럽게 어울린다. 10년 되는 해부터는 고정희를 이름으로도 알지 못했던 어린 소녀들이 함께 해남행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정희의 무덤에 술을 따르고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 나의 친구 고정희는 이렇게 서서히 역사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친구 고정희―이 말이 맞나? 1991년 6월 7일(?) 필리핀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또문 월례논단에서 ‘여성주의 문체혁명과 리얼리즘’이란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그는 지리산으로 떠났다. 가뜩이나 작은 몸피가 오랜 이국생활로 한층 줄어든 몸에 커다란 배낭을 지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그는 뱀사골 계곡에서 발을 헛디뎠다. 그의 장례식은 11일날 광주 지역의 문인 친구들이 마련한 민족문학인장으로 치러졌는데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내내 미흡해 했던 또문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 직후 여성주의적인 의식을 새로 치르기로 이미 뜻을 모으고 있었다.
고정희가 죽은 지 한 주일이 지난 6월 15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고정희를 보내고 부르는 마당>이란 이름으로 치러진 추모제는 전통적인 의례형식을 살리되 자매애를 강조하고, 고정희가 비록 기독교인이었지만 기독교에 제한되지 않고 불교와 무교까지 아우르는 형식을 취한 매우 독특한 의례로서 참석자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되었다.
또문 동인들은 일생 흘릴 눈물을 그 한 주일 동안 다 흘렸던 것 같다. 나도 정말 끔찍스럽게 울어댔다. 내 몸 어디에 그토록 풍성한 눈물보가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울음이 그치는 짬이면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아니, 고정희란 사람이 나한테 이토록 가까웠던가, 그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존재였길래 나를 이렇게 울리는 걸까.
솔직히 추모제를 치르는 내내 나를 비롯한 또문 동인들은 고정희에게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별과 나이와 직업을 초월해서 고정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상 이상으로 광범위했다. 해남을 떠나온 이후 20여 년 간 고정희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또 고정희의 사람 사귀는 법을 생각해보면 그건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정희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이들이었으며 하나같이 고정희의 죽음이 던진 충격 속에서 헤매는 중이었고 졸지에 사랑하는 벗, 후배, 선배를 잃은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또문 동인들은 이제 비로소 그들이 알았던 고정희가 고정희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추모제에 왔던 고정희의 친구들에 비하면 나와 고정희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물론 또문의 몇몇 동인들과 비교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데 있어서 시간은 단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내가 고정희와 알고 지낸 기간은 햇수로 쳐서 고작 7년밖에 안 됐을 뿐만 아니라 다정한 전화나 편지 한 장 오고 가지 않은 지극히 덤덤한 사이였다. 그리고 또문 동인지나 여성신문을 만들면서 함께 일했던 그 짧은 기간에도 어쩌면 다정한 말보다 사나운 말로 서로를 긁어대기 바빴었다. 만약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에야 겨우 친구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모를 그런 사이였다. 무엇보다 나는 고정희를 친구로 삼기에는 그와 내가 살아온 길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고정희 역시 같은 생각이리라 짐작했다. 나는 그를 인간미가 증발된 쇠고집퉁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나를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정실부인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 동시에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그토록 억울하고 안타까웠던 건 단지 우리 시대의 걸출한 시인이자 실팍한 여성운동가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그를 내 인생의 중년에 만난 귀한 친구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죽어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고정희를 만난 건 1984년 가을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마련된 과 특강에서였다. 기실 『이 시대의 아벨』 이후 난 그의 열렬한 독자였다. 자칫 중산층 가정주부의 몰사회성에 빠져들려던 내게 그의 시는 일종의 각성제 구실을 단단히 했던 터였다.
‘한국 여성문학의 흐름’이란 주제였지만 강의 말미에 그는 갑자기 ‘광주를 잊으면 안 됩니다.’라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아마도 수강생들이 여성문제에만 파묻혀 민족과 민중의 문제를 간과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신촌역 앞의 토속주점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난 선생님의 시를 읽었다면서 약간은 아양을 떨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함박꽃처럼 피어 오르던 그의 웃음. 하지만 눈매에 담긴 쓸쓸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던 그 기묘한 조화.
그 이후 7년간 고정희와 나는 자주 만났다. 특히 1988년 여성신문의 창간을 전후한 1년 동안은 편집주간과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거의 매일 만났고 매일 마셨고 매일 싸워댔다. 우리집이 여성신문사와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고정희는 걸핏하면 신문사 일을 끝낸 늦은 밤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손에 들고.
싸움의 주제는 언제나 두 가지였다. ‘민중이냐, 여성이냐’와 ‘개혁이냐, 개량이냐’. 고정희는 중산층 여성들의 온건노선에 넌더리를 냈다. 그러나 여성운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경영진과 편집진들은 고정희의 과격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념의 충돌과 상관없이 고정희는 여성신문을 한국 최초의 여성정론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온힘을 바쳤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안산에 아파트를 마련했던 그는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까지 신문사에 남아 있었다.
한번은 그의 아파트에서 또문 동인지 편집회의를 연 적이 있었다. 동인들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항상 수도사처럼 질박한 차림으로 다녔던 고정희의 또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놀랐다. 인테리어는 물론이려니와 차주전자 하나에서까지 정성과 안목이 밑받침된 세련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타고난 살림꾼이었다. 주부경력 20년차였던 나는 주눅이 든 채 공연히 심술이 났었다. 아니 이렇게 깔끔 떨며 사는 여자가 우리 집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싶었다.
그날 밤새도록 동인들은 고정희와 내가 서로 주고받은 욕설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또문 동인들은 아마 태어나서 쌍시옷 발음 한 번 못해봤기 십상이었기에 우리 둘이 잔뜩 취해서 이 세상의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모아서 쏟아 내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나 보았다. 지금까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어떻게 해서 욕이 시작되었는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누구의 소설 이야기를 하다 발동이 걸렸던 것 같다. 두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뱉어낸 욕설들은 그때까지 살아 오면서 읽었던 소설에서 봤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뇌 어딘가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그날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나 보았다. 한 사람이 뱉어내면 둘이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또 받아내고, 그러면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됐다가 또 이어지고……. 나중에 우리는 그때 녹음기를 꺼놓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두어 시간 동안 계속 욕을 주고 받았다면 웬만한 욕 사전 한 권쯤은 너끈히 꾸미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날 아침 우리 둘은 다시 새침 떠는 교양녀로 돌아왔고 질펀하게 쏟아냈던 그 욕들은 어디론가 감쪽같이 숨어 버렸다. 그 욕 사건을 계기로 고정희와 나 사이에 쳐 있던 장막이 걷혔다.
창간 이듬해 여성신문을 그만둔 고정희는 그해 가을 『저 무덤에 푸른 잔디』를 들고 나타났다. 일곱번째 시집이었다. 그토록 빠듯한 일과 속에서도 그는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를 쓰던 노동자였다. 나는 여성신문에 실릴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를 만났고 그와 처음으로 싸우지 않고 다섯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가 여전히 존경하는 시인이었고 나는 착실한 독자였다.
이젠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은 그만두고 시만 쓰고 살겠다던 다짐대로 그는 1990년 하반기에 세 권의 시집을 냈다. 『광주의 눈물비』와 『여성해방출사표』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 하나』. 나중 두 권은 그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탈식민주의. 시와 음악 워크숍”에 참여하러 한국을 떠난 사이에 나왔다.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전제하에서 쓴 최초의 시집으로 기록될 『여성해방출사표』에서 고정희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갈등해 온 사회변혁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접점을 찾으려는 의지를 뚜렷이 보여 주었다. 특히 이 시집의 3부는 고정희가 여성해방운동의 걸림돌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해 왔던 여성끼리 갈라서기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전을 한 편의 연극처럼 풀어내고 있다.
내가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읽은 건 고정희가 죽은 이듬해 또문 동인지 9호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에 추모글을 쓰기 위해 그의 모든 시집을 통독했을 때였다. 그의 연시들만 모아서 시집을 낸다고 했을 때 난 도무지 탐탁치 않았다.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중산층 주부의 이기심 탓이었으리라. 내가 존경하는 시인은 이슬만 먹고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심리가 작동했다. 그래서 시집이 나왔을 때 외면했다.
뒤늦게 그의 사랑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펑펑 울었다. 그 사랑이, 그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 생전에 그가 즐겨 부르던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머리 속에서 웅웅거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뿌리침 당한 고정희는 가끔 내게 그 상처를 내비쳤지만 나는 속수무책으로 고작 포도주나 권할 뿐이었다. 그런 날 새벽에 고정희는 연시를 썼나 보았다.
고정희의 마지막 시들은 그가 죽은 지 꼭 한 해가 지나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로 묶여 나왔다. 1부 ‘밥과 자본주의’는 마닐라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새삼 발견했던 자본주의라는 악령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는 입담으로 토해내고 있다. 3부는 남남북녀의 혼인잔치라는 형식을 빌려 민족공동체를 넘어서 인류공동체가 평화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는 통일굿 마당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고정희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껏 호기심을 드러냈던 그의 마지막 시 「독신자」가 들어 있다.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자신의 기도대로 고정희는 뱀사골의 계곡물에 섞였다. 이슬처럼 단숨에.
시인은 예언자이다.
영정 속의 고정희는 해가 갈수록 젊어가고 그가 남긴 여백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간다.

 

박해란 1946년생. 여성학자. 여성신문 편집위원. <또 하나의 문화> 동인.
       저서 『삶의 여성학』 『나이 듦에 대하여』 외.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옹진군에서 태어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추모산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전집』1989년 작고.

죽음을 예감했던 마지막 시 「빈집」


          하 재 봉 | 시인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1월,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였다. 기형도는 당선되지 못했고, 최종 심사평에 그의 시 일부가 언급되어 있었다. 당선시가 아니라 최종 심사 대상에서 거론되다가 낙선한 시의 일부가, 심사평에 자세하게 소개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최후까지 고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시운동> 동인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어법으로 무장된 새로운 시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80년 12월, 하재봉·안재찬·박덕규 세 사람이 함께 시집을 낼 때부터 우리는 3인 시집이 아니라 <동인지>라고 못을 박았고, 이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한기찬, 경희대에서 함께 시를 썼던 이문재, 《동아일보》로 등단한 남진우 등등이 동인활동에 합류했었다. 또 박덕규와 함께 대구에서 시를 썼던 박기영, 박기영의 소개로 만난 장정일, 그리고 오규원 선생의 소개로 만나게 된 황인숙 등등이 <시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1984년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폐간된 문지/창비의 양대산맥의 빈 공간을, 다양한 동인지, 무크지 등이 메꾸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 평론가에 의해 ‘소집단 운동’이라고 명명된 당시의 문학 운동은, 한정된 문예지 지면의 대안공간으로서 동인지나 무크지가 이용되었던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상상력과 시적 실험으로 형성된 동인 집단들이 칼날을 갈고 혁명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기형도의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다. 당선된 시보다, 심사평에 언급된 그의 시 일부가 훨씬 더 가슴을 쳤다. 나는 수소문 끝에 기형도가 연세문학회 멤버라는 것을 알았고, 확신을 갖기 위해 연세춘추 교지에 실린 그의 시도 미리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당시 나는 군인 신분이었지만, 서울 교외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외출을 나와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종로 2가에서 3.1빌딩 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2층에 있었던 ‘민화랑’이었다. 갤러리는 아니고 전통차를 팔던 찻집이었다. <시운동> 동인들은 대부분 술, 담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냄새 자욱한 일반 카페보다는 이런 곳을 훨씬 선호했다. ‘민화랑’에서는 금연이었다.
나는 약속시간에 박덕규, 남진우와 함께 나갔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자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기형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연세문학회 선배였던, 그리고 당시 이미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했던, 시인 오봉진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왔다. 나는 그에게 <시운동> 동인을 같이 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망설였고, 며칠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 뒤, 그는 추후 함께 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더불어 나에게 타이프로 A4 용지에 깨끗하게 타이핑된 시 한 편을 보내왔다. 훗날 발표된 「포도밭 묘지」라는 시였다. 특히 그 시는 당시 우리 <시운동>이 펼쳐가고 있었던 시세계와 흡사했다. 그는 명백히 <시운동>이 추구하던 시세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성 시인들과 동인 활동을 같이 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 1985년, 우리는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선작 「안개」는 기형도의 대표시는 아니다. 신춘문예 스타일을 고심해서 응모한 시였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는, 이미 그때 《중앙일보》 기자시험에 합격해서 수습기자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제대해서 한 잡지사의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나 역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5년 등단 이후 기형도와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초보 기자로서 힘든 수습 생활을 하고 있었고, 수습 딱지를 뗀 후에는 정치부 기자로서 총리실을 출입하며 정치 기사를 썼다. 워낙 바쁜 생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연락을 하며 지냈다.
나는 <시운동> 동인지를 만들 때마다 그에게 연락을 했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발간된 <시운동> 동인지는 어떤 때는 1년에 두 번 발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형도는 머뭇거렸다. 그의 시는 빠른 시간 안에 기존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자신의 시에 대해서 깊은 자기 확신이 있었던 그는 향후 시단의 방향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문화부로 부서를 옮기면서부터였다. 나도 직장을 옮겨 문예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출판 홍보를 책임지고 있던 나의 직속 상관 박제천 시인은 언론사에 홍보할 일이 있으면 나를 내보냈기 때문에, 나는 업무차 사대문 안의 신문사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했었다. 내가 방문하는 곳은 각 신문사의 문화부였고 당연히 기형도와는 얼굴 마주칠 일이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가 더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편집부로 옮기게 된 뒤부터였다. 사실 그의 편집기자 시절이 우리의 황금기였다. 왜냐하면 늘 기사를 써야 했던 정치부/문화부 시절과는 다르게 그에게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1988년부터 1989년 3월 7일 새벽, 그의 돌연한 죽음까지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어떤 날은 하루에 3번 넘게 인사동 골목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기형도가 문화부 방송 담당 기자였던 시절, 방송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중앙일보》 방송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신문 맨 뒷 페이지 오른쪽 상단, 그날 하루의 방송 스케줄이 빼곡하게 짜여진 한쪽 귀퉁이에 실린 방송면은, 순수문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던 80년만 해도 일종의 액세서리였으며 방송이라는 대중문화, 하위문화에 대해 형식상으로 마련된 지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작은 지면을 놀랄 만한 탄력의 공간으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을 긴장시켰고 제작 간부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가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겨간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소상하게 증언하고 있으므로 피하겠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그의 완벽주의, 주위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그의 꼼꼼함은, 시에서는 더욱 심한 것이었다. 시에 대한 그의 이러한 엄정성이 사뭇 그리워진다.
1988년부터 나는 <시운동> 팸플릿을 발간하고 있었다. 매월 20여 쪽 내외로 구성된 작은 팸플릿은 문단 관계 인사들에게만 우송되던 새로운 동인운동이었다. 1년에 한 번 출간하는 동인지의 연장선상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단의 징후를 포착하고 문제를 부각시키며 논리를 다듬기 위해 만들어진 ‘시운동 팸플릿’ 맨 뒤쪽에는, 젊은 시인들의 모임 후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소위 문단에 ‘시운동 청문회’라고 명명되었던 이 모임은 대략 2주에 한 번 꼴로 인사동에 있는 평화만들기 혹은 토담 등등에서 개최되었는데 최근 시집을 낸 시인이 초청 대상이었고, 젊은 시인 평론가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2, 30대로서 등단 10년이 안 되는 젊은 시인들이었다. 초청 대상이 된 어떤 시인은 그날 목욕재계하고 나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만큼 단순히 친목을 위해 어울린 것은 아니었고 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던, 조금은 살벌하기도 했던 모임이었다.
이 시운동 청문회의 단골 고객이 기형도였다. 그는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면서도 할 말을 정확하게 하는 그에 대해 누구나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1차 청문회는, 무차별한 폭격으로 초청 대상이 된 시인의 시를 난타하는 것이었다. 상찬도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였고, 시의 결점을 주로 잡아내서 토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기가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1차 모임이 끝나면 그때부터 음주 가무로 들어갔다. 이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 기형도였다. 우리는 그를 ‘문단의 카수’라고 불렀다. 교회 성가대 출신답게 고운 음색과 정확한 음정으로 그가 노래를 부르면,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의 노래를 경청했다. 기형도의 연세문학회 동기였던 시인 성석제가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시운동 청문회에서는 기형도와 성석제의 이중창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나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노래 부르던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웨딩케익」 같은 노래들을 기억한다. 아니, 그런 노래만 들으면 기형도 생각이 난다.
1989년 3월 6일 아침, 나는 중앙일보사로 갔다. 그리고 편집부 그의 책상을 찾았다. 그날 저녁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나의 첫시집 『안개와 불』의 장례식 퍼포먼스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나는 퍼포먼스 팸플릿을 들고 그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의 책상에 팸플릿을 놓고 나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퍼포먼스 준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몇 달 전인 1988년 12월, 나는 첫시집 『안개와 불』을 민음사에서 출판했다. 등단 9년만에 낸 시집이었다. 발표한 시를 엮어서 시집을 만들었다면 벌써 2, 3권은 나와야 했다. 그러나 시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적 질서를 갖는 우주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고 시집을 구성하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켰다. 대립되는 물질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세계불화의 한복판에서 자아의 흔들림을 경험하는 개인의 성장과정을 그린 시집 『안개와 불』 구성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지, 시집을 출간한 뒤에 한동안 나는 그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여전히 『안개와 불』의 시 세계는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집 『안개와 불』의 장례식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장례식이라는 제의과정을 통해서 그 시들을 떠나 보냄으로써 새로운 시적 출발을 가능케 하려는 의도였다.
대학로 샘터 파랑새 극장이 쉬는 3월 첫 월요일 저녁을 시집 『안개와 불』 장례식 퍼포먼스 공연날짜로 잡아놓고, 나는 기형도에게 시집 서평을 부탁했다. 조정래, 김초혜 선생이 함께 간행하던 월간 《한국문학》 서평난에 게재될 원고였다. 그때가 1989년 2월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형도는 흔쾌하게 내 부탁을 받아들여 주었고 좋은 원고를 보내왔다. 내가 알기에는, 그 원고가 기형도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그의 마지막 산문이다.
3월 6일 저녁, 많은 시인, 기자들이 샘터 파랑새 극장을 찾아주었다. 상갓집 분위기와 똑같이 꾸미기 위해 나는 장의사에 가서 ‘근조’라고 검은 글자로 씌어진 커다란 노란등을 빌려 극장 입구에 걸어놓았고, 또 마름모꼴 하얀 종이의 검은 테두리 안에 역시 ‘근조’라고 씌어진 종이를 지하극장 입구 양쪽 벽에 수없이 붙여 놓았다. 무대에는 제단이 있었고 내 시집은 고인의 영정이 놓이는 자리에 양쪽으로 검은 띠를 두르고 놓여졌으며 향을 묶음 다발 통째로 피워 극장 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당시 《한겨레》 문학담당 기자였던 조선희는 매캐한 연기를 참지 못해 쿨럭거리며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미친 듯이 시낭송을 했고, 나중에는 시집을 들고 종을 딸랑거리며 극장 밖으로 나가 시집을 불태우고 오체투지로 그 불꽃을 덮었다.
공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과 뒤풀이가 있었다. 술을 마셨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상계동 집으로 들어갔으며 다른 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인, 내 시집 뒤의 해설을 써준, 김훈 선배였다.
“나 김훈이다. 형도가 죽었다. 지금 서대문 병원 영안실에 있다.”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김훈 선배가 감정에 사무쳐서 소리 지르는 것도, 요동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결국 그와 별로 친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하지만 나는 그가 이성을 잃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 순간에도 아주 사무적인 말투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머리 속이 진공상태가 되었다. 김훈 선배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시운동> 동인들 중심으로 긴급히 연락을 하고 회사에 들러 직속상관 박제천 시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서대문병원 영안실로 갔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이제 막 영안실 빈소를 준비중이었다. 그의 연세문학회 동기들이 넋 나간 표정으로 몇 사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발인이 있기까지 사흘 동안 나는 그곳에서 보냈다. 회사에 나가지도 않았고 중간에 집에 잠깐 다녀온 기억도 없다. 우리는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서로 주먹질을 하며 싸움을 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상갓집을 꾸며 놓고 향불을 피우고 생쇼를 한 것이 혹시 그의 죽음을 미리 부른 불길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수없이 자책을 했다.
시인 권대웅은 나를 붙잡고 “형, 이제 형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파고다 극장에서 새벽에 발견되기 전까지 기형도의 행적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 기형도와 나의 친분관계로 보아서 분명히 어제 저녁 있었던 시집 장례식 퍼포먼스에 기형도가 갔을 것이고,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것이며, 그리고 사고가 났으므로 아직까지 원인불명인 기형도의 사인에 대해 내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나는 권대웅에게 주먹을 날렸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상갓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난투극을 벌였다. 야외 천막 안에 모여든 수많은 시인, 작가, 평론가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서로 시비를 걸고 알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는데, 내가 주먹을 날린 것을 시작으로 영안실 전체가 난투극에 휘말렸다. 이 날의 소동은 다음날 한국일보 휴지통에 소개되기도 한다. 나도 이성을 잃고 폭력을 사용한 점, 아직도 권대웅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안성 천주교 묘지에 우리는 기형도를 묻었다. 붉은 무덤 앞에서 나는 그의 마지막 시 「빈집」을 읽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언하는 것 같은 시를 읽는 동안 우리 모두 흐느꼈다. 1989년 3월,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3월호 《문학사상》에서 청탁을 받고 나는 시를 보냈는데, 「비디오/화산」이라는 그 짧은 시도 죽음의 이미지로 도배된 시였다.
기형도는 불과 4년 조금 넘게 시단 활동을 했고, 한 권의 유작시집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급물살을 타며 변화해 가고 있는 시대적 징후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감지하고 있었으며 90년대 시단으로 향하는 문을 미리 활짝 열어주었다. 너무 짧은 죽음으로 마감된 그의 시세계는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 시사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고 문지방을 막 넘던 찰나에 그는 쓰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재봉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1년 《문예중앙》 신인상 소설부문(중편소설)
        당선. 시집 『안개와 불』 『비디오/천국』 『발전소』. 소설 『콜렉트콜』
      『블루스 하우스』 『쿨재즈』 『황금동굴』 『영화』


 

진이정

1959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남.
경희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1993년 작고.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차 창 룡 | 시인


진이정 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아직도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내겐 추억 없다/찰나 찰나 연소할 뿐”(「추억 거지」)이라는 형의 시구처럼 추억이란 원래 없었던 것일까? 서서히 사라져가는 기억의 파편들을, 그 없는 추억들을 주워담아 본다. 그 기억의 파편들에도 아트만이 존재할까?
아트만이라! 진이정 형의 첫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1994)에 실린 시 중에서 「아트만의 나날들」은 특히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발랄하면서도 깊은 시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근본 원리이다. 그것은 절대이며 전체이기 때문에 어떠한 말이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브라만을 말로 혹은 형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유지의 신 비쉬누와 파괴의 신 쉬바를 만든 것이니, 브라흐마와 비쉬누와 쉬바는 기독교의 예수와 같은 존재이다. 브라만은 달리 말해 신성神性이라 할 수 있다. 신성은 모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속에 들어 있다. 이렇게 각 개체 속에 현존하는 신성(브라만)을 아트만(참자아)이라 한다. 따라서 브라만과 아트만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진이정은 이러한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를 참으로 재미있고 서글프게,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 체험 속에서 시화하고 있다.

코끝에선 약 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 「아트만의 나날들」에서

약 냄새란 미군 병사의 마약 냄새인 듯하다. 외삼촌의 술주정과 미군 병사의 약 냄새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도의 함피에서 숙소 주인이 내게 은밀히 물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원하십니까?” ‘특별한 것’이란 분명 마약이었다. 나는 거절했지만, 몇몇 외국인은 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화자의 외삼촌이 곧 숙소 주인과 비슷한 사람일까? 물가가 비교적 싼 외국에 가서 마약을 하는 이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미군 병사의 심정과 어떻게 다를까? 이 시의 첫 구절이 “약 냄새, / 돈은 슬퍼라”인 것으로 보아, 진이정에게 ‘약 냄새’와 ‘돈’은 동의어이다. 마약의 대가로 받은 돈도 슬프고, 제정신을 잃고 돈을 뿌리면서 뿜어내는 약 냄새도 슬프다. 그런 풍경은 자본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나라들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외삼촌은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고 죽었다. 여기서 박카스는 아무래도 독약이나 수면제인 것 같다. 그렇다면 ‘약 냄새’의 약은 독약이나 수면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내가 그리워하는 건/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라는 구절 속의 박카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약이라기보다 외삼촌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이겠지만, 그런 구별이 특별히 의미있는 것은 아니겠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외삼촌의 ‘생생한 아트만’을 그리워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외삼촌의 ‘아트만’은 죽음을 통해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아트만은 ‘생명’과 동의어가 된다. 그 생명은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이다. 그 구체성이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니, 그렇다면 브라만은 죽음이란 말인가? 모든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생명 있는 것의 궁극적인 원리이다. 그렇다면 브라만이 ‘죽음’인 것이 맞다. 진이정의 시 속에서 브라만과 아트만이 삶과 죽음으로 교묘하게 나누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아니, 서글픈 일이다. 왜냐하면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라는 것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부조리한 현실이 있어 그러한 진리도 무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인은 ‘슬픔’의 의미를 깨닫는다.

봉지쌀의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기분을 슬프다고 하는 것일까
이 범아일여의 천지에서 아니 슬픈 것이 무엇이던가
오십환짜리 백동전처럼 남루한 슬픔이지만,
슬픔의 화폐개혁은 아직도 기약 없어라
슬픔의 지폐에서 길어올린 육십년대 꼬마의 쾌락들,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 「아트만의 나날들」에서

진이정의 역설은 여기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진리가 무력해진 상황이 슬픈 것이 아니라, 세상이 범아일여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현상이 슬프다는 것이 진이정의 역설이다.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범아일여’의 사상에 따르면, 우주의 근본 원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 서글픈 우주의 근본 원리가 다름 아닌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상을 수놓는 온갖 아트만이 슬픔의 화폐(자본주의 시대의 아트만은 결국 화폐이리라)인 이상,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라는 말씀이 어떻게 위안이 되겠는가. 이러한 인식의 토대 아래 화자는 “죽으면, 그렇다…/그냥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사법계事法界로 이해하는 것과 같다. 전자야말로 범아일여라는 법칙을 뒤집고 뒤집어서 도달한 결론으로, 진이정의 “죽으면, 그렇다…/그냥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진이정의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구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 「아트만의 나날들」 끝부분

참자아가 없어진 마당에, 참자아의 집인 인생이 꿈이라는 것은 확실히 헛된 비유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의지할 경전(우파니샤드)은 이제 현실뿐이다. ‘빵구 나오시’ 가게의 몽키스패너 같은 구체적인 물건만이 경전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아닌 깨달음이 왜 가슴 아픈 것일까? 왜냐하면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종교적·철학적인 신념도 물리적인 폭력과 물질적인 결핍 아래서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는 화자는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구체적인 박카스’를 사먹기 위해 “이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브라만을 믿고, 범아일여를 믿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진이정의 사유가 훌륭할 수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진이정이 범아일여를 믿었기 때문이다. 범아일여를 믿고 공부한 결과, 범아일여라는 사상이 세상을 결코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한낱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범아일여를 믿지 않았거나, 끝까지 범아일여를 절대 진리로 생각했다면, 이런 시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이정이 범아일여를 부정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일차원적인 반응이다. 진이정의 부정은 결코 절대적인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자는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와,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위안받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는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라고 말한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트만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아트만이란 참자아이므로, 참자아가 무너졌다면 나는 이제 없는 것이란 생각 때문일까? 그런데 화자는 자신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각성’을 강조한다.
내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각성은 나가르주나의 중관中觀사상에 따른 것이리라. 결국 범아일여를 부정하는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바탕으로 진이정의 사유가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나가르주나의 사상을 몸으로 느끼기는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진이정은 그 각성이 뒷골을 쑤셔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은 쉽지만 깨달음의 체화는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사유는 실천하기 힘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넘어서는 구체성을 띤다.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결정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는 것에도 없다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觀有無品」)라고 말했다. 따라서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 모두를 없애는 것이 중요한데, 시인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생각에 더 집착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동안 ‘있었다’나 ‘있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는 그 생각을 토대로 바로 시적인 기지를 발휘한다.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성찰보다는 시적인 사유를 펼치는 진이정은 중관사상 속에서 중관사상의 진리로부터 가볍게 빠져나온다. 삶과 죽음이란 따로 없다는, 따로 없으므로 삶에도 죽음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나가르주나의 설법은 지극히 옳지만, 그것이 옳다 해도 실존하는 인간의 괴로움 또한 엄존하는 것이다. 엄존하는 괴로움을 여읠 수 있는 방법을 나가르주나는 가르치고 있지만, 그 방법 또한 사실 브라만이고 아트만이고, 범아일여일 뿐이다. 칼과 배고픔이 먼저 우리의 ‘없는 감각’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감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우리의 존재가 원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면, 죽어도 아픔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는 것이니, 아픔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면, 따라서 죽음도 죽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슬픔의 드링크’를 통해서만 위안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의 결론 아닌 결론이다. 결론 아닌 결론이라 한 것은 이 시가 진정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 결론 아닌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이정의 이런 시적 사유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대중적 전위주의’를 주장하면서 대중문화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시인에게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면서 진이정은 ‘대중’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시론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시인들이 대중들의 구미를 따라가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의 관심은 대중들의 가벼운 흥미가 아닌, 역사와 우주의 진리를 현실 속에서 설파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결코 무겁지 않게 가볍게 설파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문화론은 한 마디로 ‘대중적 전위주의’였다.
1989년 유하·박인택·함민복 형과 함께 동인을 결성한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서 새로 써온 시를 읽고 합평회를 열었다. 새로 나온 시집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진이정 형의 원고는 참 경이로웠다. 주로 원고지 뒷면을 사용했던 것 같다. 빽빽하게 적어내려간 긴 시가 원고지 한 장에 다 들어갔다. 가령 「진창」 같은 시가 원고지 뒷면에 쏙 들어갔다고 생각해보라. 한자 한자 또박또박 적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그 깔끔한 필치 속에는 촌철살인의 풍자가 들어 있고, 한없는 슬픔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슬픔을 알아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형의 시 속에 「아트만의 나날들」 같은 복잡한 사유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사유는 현실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은 착각을 안긴다.
형의 아픔도 그랬다. 군대에서 제대해 돌아온 후 형은 동인 모임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전화하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형, 몸이 많이 아프신 것 같은데……” “아니, 괜찮아. 감기에 걸려서 어제 약국에서 약 사다 먹었어.”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늘 가볍게 얘기하는 버릇 때문에 우리는 까마득하게 속았고, 형은 짧고도 긴 투병생활을 일찍 마치게 된 것이었다.
형은 언제나 그랬다. “시집 준비 잘하고 있니?” “네 시가 많이 좋아졌더라.” 동인들의 시세계를 열심히 점검했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챙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동인들이 대부분 시집을 출간했는데도 형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집을 내지 못했다.
형과 이별한 지 10년, 이제 추억은 저만치 사라져가고 있다. 추억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족해, 나는 이번에도 형과의 추억을 얘기하지 못했다. 나의 바람은 형과 마주 앉아 「아트만의 나날들」이라는 시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을 나는 여기에 적었다. 형이 어떤 대답을 해올는지?
이제 형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할 때다. 객관적으로 형의 시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믿는다.
허수경 선배는 독일에서도 진이정 형의 시를 읽고 있었다. “빛이 좋은 날을 골라 쓸모 없다 싶은 책들을 골라내어 버린다. 짐이다, 싶은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오래된 여행기도 있고 철학책도 있고 유행일 때 사놓은 심리학책도 있다. 책을 다 버리더라도, 혼자 생각한다. 버릴 수 없는 책이 있을까? 그 가운데 하나, 가난한 벗의 시집 하나, 이런 시가 들어 있는 시집 하나.”(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문학동네, 107쪽)

     인생 혹은 거품의
     눈물,
     그 생애에 걸친 소금기

     눈물은 왜 바다처럼 찝찔해야만 할까

     폭풍우, 폭풍우도 없이!
                               ―― 「눈물의 일생」 전문

 

차창룡 1966년 전남 곡성 출생. 1989년 《문학과사회》에 시 발표.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
       질』(문학과지성사, 1994).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민음사, 1997), 『나무 물고기』
       (문학과지성사, 2002) 등.

 


요절한 시인들이 보여준 죽음의 방식과 그 의미


                             정 효 구 | 문학평론가


1. 글을 열며

김소월, 이상, 윤동주, 박용철, 이장희, 임홍재, 신동엽, 김수영, 고정희, 기형도, 박정만, 이연주, 진이정……. 우리 시단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라면 방금 열거한 시인들의 성명을 보고 필자인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방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굳이 말을 꺼내자면, 위에서 열거한 시인들은 하나같이 길지 않은 생애를 보내고 잽싼 걸음으로 이승을 하직한 시인들이다. 이런 시인들을 가리켜 우리는 ‘요절시인’이라고 칭하거니와, 그런 시인들의 시와 삶 앞에서 우리는 각별한 감정과 끝나지 않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요절한 시인이든, 장수한 시인이든, 평균 수명 정도를 표나지 않게 살다 간 시인이든, 이런 모든 시인들을 포함한 인간들 하나하나의 죽음은 그 모양도 백인백색일 뿐만 아니라 그 의미 또한 백인백색이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죽음에 대한 연구가 인간사를 깊이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죽음의 연구를 지속하다 보면, 사는 일 만큼 어려운 일이 죽는 일이며,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긴박한 문제는 삶의 그림자 혹은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저 죽음이란 존재와 어떻게 투쟁하고, 대면하고, 대화하고, 타협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 세상을 일찍 떠남으로써 숱한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히도록 만든 5명의 시인 ― 고정희, 기형도, 김남주, 박정만, 진이정 ― 과 관련하여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는 오랫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관념적인 죽음이 아닌, 실존적인 육체의 죽음 앞에서 나는 말을 장황하게 풀어놓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으며, 일찍 찾아온 그들의 죽음이란 그림자 앞에서 그것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맞대결할 용기가 쉽게 솟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잘 달래며, 그리고 인간과 역사와 시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내 마음 속에서 회복시키며, 그들의 그림자를 고요히 끌어안고 발효시키다 보면 승화의 숨은 신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 글을 힘있게 밀어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2. 역사와의 대결에서 실족한 비극 ― 고정희

고정희는 역사를 믿는 시인이다. 고정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고정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며 현실 속에 뛰어든 시인이다. 고정희는 그가 믿는 기독교까지도 이러한 역사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없다고 믿는 ‘역사주의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엔 항상 미래를 향한 희망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엔 역사를 살리고 인간을 살려내려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시엔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역사 속의 인간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교훈적 선동성도 가득하다. 더 나아가 그의 시엔 왜곡된 역사, 파행적인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정의감이 가득하다.
이런 고정희의 내면세계와 행동 그리고 그의 시를 통하여 분출되는 강한 의지력을 읽고 있노라면, 역사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현장 속의 진행형 동사임을 절감하게 된다.
고정희, 그는 평생을 젊게 산 시인이다. 그가 쓴 시의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그리고 그가 살아온 생애의 어느 시간을 보더라도 그는 청년처럼 싱싱하고 건강하였다. 그는 진행형 동사의 형태를 띤 역사의 중심부 혹은 최전선에 자신의 위치를 정하였고, 그 위치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정의의 역사를 만들어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가 이처럼 진행형의 형태를 띤 역사의 중심부 혹은 최전선에 자신을 의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세우면서 내공을 키우듯 스스로의 안팎을 무장하려고 노력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매년 계속된 ‘지리산 등반’이었다. 그러나 그가 매년 하나의 의식儀式처럼 행한 지리산 등반은 그로 하여금 갑자기 불어난 홍수 속에서 실족을 하게 만듦으로써 그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가 믿는 기독교 야훼 하나님에게 항의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식처럼 치러진 그의 지리산 등반과 그에 포함된 적극적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리산 등반도중 생명을 잃은 그의 비극은 수많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그의 지리산 등반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리산은 어떤 산인가. “아! 지리산!” 하고 외칠 때, 우리는 그 외침으로부터 남다른 느낌과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까닭은 지리산이 인간과 관련된 무수한 삶과 역사의 내용들을 껴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고정희가 지리산을 오른 것은 물리적인 산으로서의 지리산을 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오른 것이고, 그럼으로써 역사의 기운을 몸속 깊은 곳까지 흡수하고자 한 것이며, 그 힘으로 역사의 미래를 희망의 세계로 바꾸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를 실족사시킨 지리산 계곡의 홍수처럼, 역사는 선한 의도까지도 무력화시키고 배제시킬 만큼 폭력적일 때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그 역사와 맞서서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역사의 횡포까지도 감내할 만한 용기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든 것이 역사라고 불리움에도 불구하고, 역사란 어찌 그렇게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엄청난 문제 앞에서 역사와 대면한 고정희는 안타깝게도 실족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여기서 그의 실족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그는 분명 외형적으로 볼 때, 실족을 통하여 역사 바깥으로 주검이 되어 밀려난 존재가 되고 말았지만, 그는 그 실족에 의하여 역사의 물결에 온몸을 던지면서 역사의 온전한 회복과 발전을 꿈꾼 것이라고……. 그렇게 볼 때, 고정희의 실족사는 한편으로 비극의 형태를 띠지만, 다른 한편으론 영웅의 승리와 같은 성공담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 시단은 한동안 허전하였다. 여성시단은 물론 민중시단, 더 나아가 기독교시단까지 허전함을 메우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그의 역할은 컸었던 것이고, 그런 만큼 그의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수많은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3.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질식한 생 ― 기형도

기형도의 시집처럼 어두운 시집이 또 있을까. 세상의 어둠이란 어둠은 다 이 시집에 모여들었듯이 그의 시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캄캄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집을 열어보는 일은 어둠과 대면하는 일이었으며, 그의 시 한 편 한 편을 읽는 일은 어둠을 만나고 판독하는 일과 같았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어둠의 세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을까. 아니 무슨 일로 인하여 세상의 어둠이 그의 영혼 속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강렬하게 몰려들어갔을까. 시대적·사회적 분석도 필요하겠지만, 특별히 생애사적 탐구와 심리학적 탐구를 필요로 하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어둠에 목이 콱콱 막히는 체험을 반복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것은 그의 시집 속에 자욱한 안개처럼 스며 있는 그 어둠의 유혹과 마력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겐 어둠의 세계에 잠기고 싶어하는, 아니 어둠의 세계를 관음증 환자처럼 훔쳐보고 싶은, 아니 어둠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기형도 시에 그토록 강하게 이끌리는 비밀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쯤해서 인간이 가진 죽음의 본능을 떠올린다.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 속에 있으면서 상호 모순관계를 유지하거나 상호 공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무엇인가가 한 편에 유리한 계기를 이루게 되면, 이들 두 본능 중 하나의 본능이 월등하게 우세해지며 다른 하나를 억압한다. 기형도의 경우 죽음의 본능이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삶의 본능을 억압한 형국이거니와, 그 거대해진 죽음의 본능에 저당잡힌 한 인간이 마침내 자기자신을 죽음 그 자체로 만들어버린 경우가 기형도의 예이다.
삶의 본능도 강력하고 교활하다. 그러나 죽음의 본능도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하고 교활하다. 너무나도 순진하고 결백한 한 인간의 영혼은 죽음의 본능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아니 너무나도 깊이 사색하고 너무나도 진지한 한 인간은 그 스스로 죽음의 본능을 불러들일 수 있다. 나는 기형도를 보면서 이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본다. 그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결백한 한 청년이었으며, 역시 ‘너무나도’ 깊이 사색하고 진지한 한 젊은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죽음의 본능이 유혹하면 삶의 본능을 불러오고, 삶의 본능이 조증躁症의 환자처럼 나부대면 죽음의 본능을 슬쩍 불러들이면서 이 양자 사이의 줄타기를 유연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지혜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인가.
그런 점에서 기형도는 지나치게 고지식했다. 그는 자학하듯 죽음의 본능이 부르는 소리 쪽을 끝까지 따라갔다. 끝이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그 끝을 요령도 부리지 않고 따라가다니……. 적당한 자리에서 멈추었어야 할 그의 행보가 ‘끝까지’ 이어짐으로써 그는 시로써 죽음의 노래를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육체적 죽음까지 감행하고 만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는 동안 죽음의 본능이 만들어내는 안팎의 수많은 죽음에 온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일이다. 죽음의 본능은 끊임없이 세포증식을 일으키며 한 사람을 어둠 속으로 익사시킬 만큼 괴력을 갖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죽음의 본능이 삶의 본능을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 시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그러니 너무 이른 나이에 조로한 얼굴로 죽음의 본능 쪽에 몸을 맡길 일이 아니다. 죽음의 본능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승화시키는 일은 필요할지 모르나, 죽음의 본능 안쪽으로 무작정 발길을 들여놓고 출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일은 안타까울 뿐이다.
기형도는 보통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가서는 곤란한 죽음의 본능 쪽으로 지나치게 멀리 갔다. 그것을 우리가 바라보는 일은 두렵고 불안하면서도 우리의 욕망이 지닌 어떤 부분을 자극시켜주고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사는 일은 막고 싶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죽음의 본능에 이끌렸을 때, 우리는 보통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보통 사람으로서 세속의 마당에 남아 적당한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삶은 진부하지만, 진부한 것이 세속사라면, 그것을 용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형도와 같은 삶에 무한한 경외감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보통 사람인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올 때까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묵묵히 영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이상주의자가 받은 형벌(?) ― 김남주

김남주의 시와 그의 생애를 보면서 나는 이상주의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김남주는 누가 뭐래도 근본적으로 이상주의자였고, 그 이상주의자의 꿈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는 고귀하다. 이상주의자는 순결하다. 이상주의자는 정의롭다. 그러나 이상주의자만큼 위험하고, 이상주의자만큼 외롭고, 이상주의자만큼 결핍감에 사로잡히는 자가 또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세속의 찌든 시장터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전선 같은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자가 나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고귀한 일이다. 어떻게 드높은 이상주의자의 꿈을 설정하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몸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이상주의적 속성은 사람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상주의자의 꿈을 위하여 순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김남주가 가진 이런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면서 나는 그가 변혁시켜 완성시키고자 한 역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역사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역사는 발전하는가. 인간은 역사를 발전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진정 역사는 인간 편에 서 있는가. 역사는 어쩌면 인간에게 복수를 가할 만큼 난폭하고 무정한 존재는 아닌가. 어떻게 하면 역사를 믿고 역사 속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을 지닐 수 있을까. 유토피아는 과연 실현가능한가. 그 유토피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이외에도 무수한 물음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자. 그리고 김남주가 이상주의자의 열정을 바치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간 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로 하자.
김남주는 사회주의자였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넘어서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순결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으로 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면서 이 땅에 그가 유토피아라고 믿는 사회주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남주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박노해가 말하듯이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나름의 의미와 참뜻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회주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점이 아니라, 그 사회주의의 나라가 옳다고 믿으며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신뢰한 김남주야말로 이상주의자의 전형이었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이런 김남주는 사회주의라는 종교 앞에서 순교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순교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것을 믿고 옹호하든지 간에 거의가 이상주의자임이 틀림없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지 결코 순교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교란 한편 비장하다. 그러나 순교란 다른 한편 어리석다(?). 관념 이전에 육체가, 유토피아 이전에 현실이, 미래 이전에 지금 이곳의 삶이 진실일 터인데 그 관념을 위하여, 유토피아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인 김남주, 그는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가 받은 형벌 앞에서 우리는 그의 이상세계에 동의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아픔을 느낀다. 세속사회와 적당히 타협하며 그 속에서 유연하게 처신하면서 세속의 단맛에 인생을 맡겼다면 그런 고통과 때이른 죽음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의 냉정함과 교활함을 모른 채, 우직하게 이상주의자의 꿈을 삶의 한가운데에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 심란해진다. 그가 이 세속의 땅에서 당해야 할 고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다.

4. 정치적 폭력에 짓밟힌 개인 ― 박정만

정치적 폭력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폭력혁명으로 세력을 거머쥔 주체가 이 땅에 자신들을 태양으로 삼아 움직이는, 이른바 독재정치의 새판을 짜려고 폭력을 계속하여 휘두를 때, 개인은 그 아래서 개미 한 마리보다 나을 것이 없을 때가 많다.
새판을 짜려는 독재자들은 잔인하다. 그들이 새판을 짜는 데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두 금 밖으로 몰아내며 공포정치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박정만의 생애를 보며 나는 새판을 짜려는 독재자들의 폭력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진 한 개인을 본다. 주지하다시피 박정만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고문과 횡포로 인하여 어느날 직장과 건강과 가정을 다 잃어버린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다. 그는 좋은 서정시인이었고, 그는 한 출판사의 책임감 있는 직원이었으며, 그는 한 가정의 따스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언로를 감시한 전두환 정권의 폭력 앞에서 한 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는 폭력정치가 내두른 몽둥이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정만은 소위 ‘한수산 사건’에 아무 잘못도 없이 그야말로 ‘우연하게’ 연루되어 고문을 당한 이후에 폭력적인 정권을 저주하며, 폭력적인 역사를 두려워하며, 폭력적인 인간에 분노와 좌절을 느끼며, 정치와 역사와 인간의 ‘저쪽’ 편에 그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가 마련한 그 자리에서 그는 그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냈거니와, 그것은 서정시 쓰기와, 술마시기와, 우주를 사모하기였다.
박정만은 서정시의 대가이다. 나는 그가 그토록 폭력적 정치의 희생물이 되었으면서도 어떻게 결이 고운 서정시만을 써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서정시 쓰기는 폭력정치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방식이며, 폭력정치에 대한 적개심을 가라앉히는 방식이며, 폭력정치에서 오는 좌절감을 껴안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서정시 쓰기는 그를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줬을 것이다. 이런 서정시 쓰기로 인하여 그는 잠시나마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과 다른 곳에서 지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서정시 쓰기는 그를 지탱하게 만들어준 중요한 요인이었다.
박정만의 서정시 쓰기와 더불어 언급돼야 할 것은 그가 마신 엄청난 술에 대해서이다.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죽였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술을 밥처럼 먹고 마시며 고문 이후의 생을 살아냈다. 이렇게 술병을 옆구리에 끼고 생의 보폭을 옮긴 박정만은 명실공히 ‘술의 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더 이상 폭력정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 사람이기를 거부하고, ‘술의 나라’ 속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이다.
독재자의 폭력정치는 이렇게 건강한 한 개인을 ‘술의 나라’로 밀어넣어버렸다. 그 속에서 박정만은 이성 너머의 혹은 이성 이전의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은 그로 하여금 시의 귀신에 들린 사람처럼 시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술의 나라에서 서정시 쓰기, 그러나 이것도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 영토에까지 가끔은 독재자의 폭력정치 소리가 들려오고, 그 영토에 머물면서도 가끔은 독재자의 폭력정치가 가한 아픔으로 치를 떨 때가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독재자의 폭력정치가 아예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더 멀리 거처를 옮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로 무화시키는 일이다. 아니 풀어놓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이며 그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것이야말로 ‘죽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박정만은 세상을 버렸다. 그는 이 세상을 버리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종시(終詩)」의 전문

‘광활한 우주’ 속으로 거처를 옮긴 박정만, 그는 이제서야 지독한 독재자의 폭력 정치가 난무하는 땅으로부터 비로소 온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죽음을 보면서, 아직도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해하는 우리들은 여전히 아프고 안타깝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6. 허무로부터 벗어나는 길 ― 진이정

허무에 발목 잡혀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웬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나 허무에 발목 잡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허둥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허무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다가온 그 허무의 늪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그 허무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어느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위장일 뿐, 허무는 우리의 몸과 삶 근저에 자리잡고 언제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허무와의 긴 싸움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고, 수시로 앞서 말한 바처럼 ‘허무의 늪’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 것인가, 골몰하게 된다.
일단 허무의 늪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구원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많은 종교들이 구원을 말해도 유한한 인간조건 앞에서 구원을 온전히 체험하며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진이정의 시와 생애를 보면서 허무의 문제를 꺼낸 것은 그의 시와 생애의 근저에 이 허무와의 지난한 대결상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결 속에서 진이정은 허무를 이긴 것일까, 아니면 허무에 예속돼버린 것일까. 어찌보면 진이정은 허무를 이긴 자같이 보이고, 또 다르게 보면 허무에 패배한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잘 읽어가다 보면 진이정은 죽음으로써 허무를 자발적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죽음으로써 허무를 자발적으로 극복하다니……. 그러나 이 역설을 깊이 이해할 때 진이정의 죽음은 허무에 짓눌린 수동적인 죽음이 아니라 허무를 휘어잡은 자의 능동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진이정은 죽음으로써 우주와 적극적인 합일을 이루기 이전에는 허무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으로써 우주의 거대하고 무한한 흐름에 몸을 싣기 이전에는 삶의 첫 부분에도, 마지막 부분에도 허무가 담겨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처럼 죽음으로써만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그러나 진이정은 인생을 잔인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분명 어느 면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적 사유를 동원한다면 인생이 잔인하다는 생각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이정은 일찍 인생의 허무를 넘어서 우주의 거대하고 무한한 흐름 속으로 몸을 실었다. 그런 점에서 진이정은 허무의 늪 앞에서 너무 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현명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기를 ‘내 인생은 소위 보람 있다는 일로 낭비되었다’(「거꾸로 선 자의 꿈을 위하여 3」)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을 통한 우주와의 합일에 의하여 낭비로 얼룩진 삶을 일찍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나는 현명한(?) 것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허무, 그것과의 만남,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 속에 진이정의 죽음이 놓여 있다. 이런 그의 죽음은 허무에 발목 잡힌 우리들의 삶을 자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러나 나는 글을 끝내며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허무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하여도, 우주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하기엔 우리의 생명욕이 너무나도 강력하다고…….

 

정효구 1958년 출생. 1985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현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 『상상력의 모험』 『몽상의 시학』 『한국 현대시와 문명
       의 전환』 『시 읽는 기쁨 1, 2』 등 다수가 있음.


 

시가 있는 (21)

대청에 누워 / 박정만 | ♧시가 있는
2006.08.02 00:40

 

 

대청에 누워

                                     詩 박정만


나 이 세상에 있을 때

한 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뼈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 대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길을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 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오늘 만난 시와 시조 한 편 (203)

오후의 기억 <시> -- 박정만 | 오늘 만난 시와 시조 한 편
2006.09.24 23:25

 


눈물의 오후


----------박정만

 


눈물이 흔해서 괴로왔다
날 기울면 창밖에 어둠이 지고
어둠이 지고 나면 때없이
눈물이 소금처럼 밀려왔다, 소금처럼.

거룩하고 거룩한 세월,
한 목숨을 견디지 못하고 매양 눈물이 오고
어느 때 쯤이었을까,
죄와 불면이 무섭게 자라나는 어두운 밤에
나는 슬픔의 그물로 피륙을 짰다.

아주 잘 짰다.
옷에는 물방울 무늬의 사랑이 저질러지고
때묻은 내의에는 마구 서캐가 슬어
내 더러운 피의 근원을 앞질러갔다.

이제 사랑도 알아보게 縮이 났다.
마음은 건성 마른 풀잎에 눕고
내 생의 우기를 재촉하는 바람만 불어
草露같은 한 목숨을 쓰러뜨렸다.

 


 

 

 

눈 아픈 사랑


-----------박정만

 


까마귀떼 흩어지면 너무 눈 아파
그냥 푸른 하늘 새털구름만 쳐다보면서
비 올 것 같다는 한 가지 심사 때문에
오두막집 꽃사태만 걱정하였네.

저 저릅대 같은 깨끗한 추억,
별은 고요히 山寺에 자고
생오이만 생울타리 타오르며 서성대더니
그 해의 마파람은 왜 그렇게 피어
맷방석 그늘의 모깃불도 죽여 놓던지.

돌확에선 언제나 인절미 냄새,
삼대처럼 키가 큰 남정네들 절구통에다
나락도 비벼 넣고 손을 저으며
키 까부는 몸짓으로 찹쌀도 저며 넣었네.

통 크고 손 크기는 우리 어머니,
볏섬 한 짐 지고 와도 고봉 밥으로
일 오시는 손님들 접대도 했고
그 팔촌 일가친척 한 소쿠리 밥으로 대접도 했네.

군불 때는 색시도 몇은 있었고
등짐지고 돌아오는 상머슴도 몇은 있었지.
그들 한 끼 새참 때에 술을 찾으면
뒤곁에 몰래 담다논 바가지 술로
허기진 잔등도 어렴풋이 달래주었지.

그 임의 손길은 언제나 푸르른 햇볕,
꼬방동에 사람들도 찾아와서 물때 고운 행주치마를 보며,
뒷설겆이 구정물도 거들어 주고
뜨물에 녹아나는 애간장도 같이 노놨네.

생각하면 참으로 기막힌 시절,
똥장군 지고 가는 마음 착한 아저씨의 한쪽 어깨는
왜 그리 기우뚱기우뚱 바람에 젖고
어쩌다 비 내리는 저녁이 오면
호박잎에 앉아 울던 청개구리 울음 소리는
나보다 한 발 앞서 생을 살던지.

풀길 없는 참죽나무 허방 소리여.

 

 

 

 

 

그리운 사람


----------박정만

 


그리움이여, 그립고 서럽다.
사람 사는 일에 큰 산 하나를 대어
그리움 없어지면 산을 볼 일이다.

그러나 이 땅의 일 없어지면
하나의 큰 길과 숲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으 먹구름도 부단히 살펴보시라.

꿈 없는 꿈 가운데 나를 버리지 말고
저문 저자거리에 눈물로 나를 놓아라.
생 하나 없을 때 생을 찾을 일이니
생 없어도 그것으로 한 생을 삼아라.

참으로 말하노니
기억하라, 고통과 슬픔의 때를.
일 없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너무 커서
눈물 너무 많았었음을.

아직도 더 많은 날을 가야지
홀로 있어도 언제나 죽어 살았다.
그래도 풀잎이 그리워 말을 못했지.
말은 못했어도 그리움의 기억은 있었다.

나의 하루는 늘 슬픔으로 강을 이루었다.
명목상으로 강을 이루고 슬픔을 이루는 강
그 강도 필요했고 우울도 필요했다.
하지만 강은 느릅나무 숲이며 바다이다.

우울과 정적이 함께 있는 바다,
그 바다를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과 중이염을 치유해 주는 시간,
그것이 내게 필요했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디다, 눈물의 가락으로,

그것을 나는 다시 본다.

 

 

 

 

오후의 기억

-----------박정만

 

 

 

 

오후 한때 저물녘
비 내리고 서러워서 사람 그리워
그렇지, 그렇게도 가슴 아플 때,

아서라, 이 놈의 인간사,
가슴만 저물어서 혼곤해질 때
어제에 해 기울어 산은 잠들어
산골몰 그림자처럼 지워져가고

희망은 가이없다, 바람은 자고
흔해빠진 말로 사랑은 가 버렸다.
무릉 너머 무릉 너머 배암의 길로
그 길의 끝에 자주빛 노을이 왔다.

언제 우리가 이 길로 되돌아갈까.
사랑은 덧난 이로 오금을 물고
그림 같은 별 사이로
미리내의 오죽순은 한 침으로 일어섰다.

이 세상 가야 할 길이 있다면
정마로 참죽 같은 한 길을 보여다오.
세상살이 서러워 정말로 눈물이 날 때
그렇지, 슬픔은 다정한 병이 되어서.

저 별을 어찌 내가 가지랴.

 

 

 

 

 

쓸쓸한 봄날


-----------박정만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路傍에 피는 꽂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던졌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적셨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靑玉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風聞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뜨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의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은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

 

 

 

 

저 無花의 꽃상여


----------------박정만

 


내 가는 길섶에는
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
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
靑松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

바람도 불지 말고
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같이
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
산도 그냥 울지 말아라.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이 하루,
물소리 가득하여 나는 못내 못 참아라.
내 등 뒤에서 내 등을 잡지 말아라.

정작 한 소리 마음을 내노니
저편 한 사람 외로운 이도 볼 일이요,
알 기울면 이편쪽 마음도 줄 일이다.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박정만---


1946년 정읍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당선.
문공부 문예작품 모집에 시 <등불설화>,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 당선.
시집:<잠자는 돌>,<맹꽁이는 언제 우는가>,<무지개가 되기까지는>등이 있고
동화집 <크고도 작은 새>,<별에 오른 애리>
산문집 <너는 바람으로 나는 갈잎으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