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스크랩] 편지에 관한 詩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2. 7. 16:34
* 목차


편지 / 최승자
편지 / 강은교
편지 / 최문자
편지 / 박라연
편지 / 나태주
편지1/ 황동규
편지 / 감태준
편지 / 강현국
편지 / 오세영
편지 / 김남조
밤 편지 / 김남조
편지 1 / 김민홍
편지 1~3 / 이성복
아플 땐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 강해산
슬픈날의 편지 / 이해인
하늘로 띄우는 편지 / 박해옥
당신은 내 소중한 편지 / 윤석구
어느 하늘에 보내는 편지 / 김종제
어머니의 편지 / 문정희
밤에 쓰는 편지 / 나호열
부치지 못한 편지 / 이정하
새벽 편지 /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어떤 편지 / 도종환
마지막 편지 / 김재진
연애편지 / 안도현
편지지와 편지봉투 / 오규원
편지로 할 말은 눈물이라서 / 김기만
하늘편지.1 / 류명선
하늘편지 / 원희석
그리움에게/ 곽재구
따뜻한 편지 -바람에게 / 곽재구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외국어로 온 편지 / 김옥남
사랑을 정리하며-편지함 / 목필균
나에게 쓰는 편지 / 이정록
편지 / 최승자
마지막 편지 / 김초혜
그리운 꽃편지.7.8 / 김용택
봄편지 / 김초혜
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 정호승
눈 오는 날의 편지 / 유 안진
엽서 1. 2 / 장석주
가을 편지 2 / 김종길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 나 희덕
뒤늦은 편지 / 유 하
私 信 (사 신) / 권혁웅
내소사에서 쓰는 편지 / 김혜선
그림엽서 / 김남조
엽서 한 장 / 강은교
방황하는 편지 / 이명자
가을 엽서 / 안도현
겨울 편지 / 안도현
12월 저녁의 편지 / 안도현
마지막 편지 / 안도현
가을서한 / 나태주
겨울 저수지에서 쓰는 편지 / 이정록
연애편지를 쓰는 밤 / 정해종
명함에 쓴 편지 / 김경미
흐린 날의 연서 / 함민복
그리운 편지 / 김정우
숲속 편지 / 문옥영
슬픈 편지 / 하덕규
편지 쓰는 일 / 이생진
초겨울 편지 / 김용택
엽서 / 박형준
겨울 엽서 / 홍수희
초록엽서 / 이양우
사막에서 띄우는 편지 / 남유정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원재훈
거울에다 쓴 편지 / 강창민
슬픈날의 편지 / 이해인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고두현
마지막 편지 / 김초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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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최승자



이제는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물의 뒤, 詩集과 커피잔 뒤에도
막막히 누워 있는 그것만 바라봅니다.

정처 없던 것이 자리잡고
머리골 속에서 쓸쓸함이 중력을 갖고
쓸쓸함이 눈을 갖게 되고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
그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발바닥까지
어떻게 내 목구멍까지 적시는지를

눈 꼭감아 뒤로 눈이 트일 때까지,
죽음을 향해 시야가 파고들 때까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내 속에서 커가는 이 치명적인 꿈을.
그러면서 나의 늑골도 하염없이 깊어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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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지 / 강은교


편지 하나 날아왔습니다.
[유니세프]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긴급지원 요청-레소토 어린이를 위한 담요수송작전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5만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매달 수백명
의 어린이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덮고 잘 변변한 담요 한장이 아쉽다는
것은 상상하시기 어렵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다. 매달 수백명이 죽고 있는 상황, 덮을 이불이 없음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고 있다? 그런데 덮을 이불이 없다?
이불들이 구름에 실려 도시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 살이 이불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도했습니다. 이불을 위해서 고통을 위해서 이불에 서리는 식은 땀을 위해서...
긴급지원 요청-이불이 없음, 뼈가 없음, 덮을 구름이 없음, 뿌릴 눈물의
씨앗이 없음, 황폐한, 황폐가 우리의 이름임,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것임,황폐에 뿌릴 소금이 없음, 소금인 사람 하나가 없음...

편지 하나 날아왔습니다. 철수가 영이에게 보낸 편지같은, 노오란 편지 하나...
편지 하나 날아왔습니다. 편지에는 구름이 그려있었습니다.
내가 구름이라고 생각한 것이, 구름은 없고, 구름 속의 해도 없는.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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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지 / 최문자


가는 길이 어두워
내 편지는 네게 닿지 못한다.
어둠 위에 육필의 자모가 나가고
어둠이 뜯어버린 단어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있다.
어두워 못 가는 편지
그대, 모든 촉수 터질 듯 높여
반짝이는 그리움의 자모를 맞춰보라.
가슴털 뽑힌 우표 한 장 붙이고
네 이름의 외곽에서
쓰러져 잠든 내 언어들을 해독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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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박라연


갑자기
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할 때
예전에 무심히 드린 편지
편지 쓸 때의 내 고운 생각들이
손때 묻은 서랍에서 책갈피에서
샛노란 유채꽃으로 피어나
그대를 흔들어 깨울
튼튼한 아이 하나 낳아주고 떠나온 양
마음 든든하다고 그렇다고
쓸쓸한 퇴근길 육교 위에서
새하얀 눈송이를 펄럭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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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나태주


기다리면 오지 않고
기다림이 지쳤거나
가다리지 않을 때
불쑥 찾아온다
그래도 반가운 손님.


시집 :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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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 황동규
-슈리칸트 바르마에게


지난 겨울에는 얼음이 모두 녹아 땅을 적셨고

올 봄에는 바람만 몹시 불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미칠 듯 가을을 기다릴 것 같고 슬픈 편지 / 하덕규

가을에는 또 꽝꽝한 얼음장이나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산불이 몇 번 켜졌다

소리없이 스러지겠지요.

부디 당분간 편지 주지 마십시오.

인도(印度)의 의젓한 성전(性殿) 사진이나 몇 점

두 나라 세관의 눈을 피해 보내주십시오.


*인도 시인 슈리칸트 바르마는 아리안족답지 않게 키가 작고 통통한 사내다.
`국제 창작 계획`의 주선으로 미국 아이오와 시에서 7개월 간 같은 아파트 건물에
서 사는 동안 우리는 두어 차례 다툰 일이 있다. 너무도 코즈모폴리턴연했던 그의
생관(生觀)이 내 신경을 건드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툰 다음날 우리는 서로
의 방문을 두드려 값싼 포도주병을 몇 개씩 눕히곤 했다. 지난 편지에 그가 당뇨병
으로 고생한다고 하니 인도의 술들이 연륜울 쌓겠구나.
인도의 잘못을 용서 없이 질책하던 그가 그립다. 그 그리움이 어느 날 밤 이 시를
쓰게 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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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감태준


나무들이 된겨울을 맞은 마음은 봄이 와도 몇 년째 잎이 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글을 적습니다



흙을 바꾸어보시지요

희망적인 비료를 준다든가

다른 나무를 심는다든가

그래도 안 되면,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방법밖에


자리를 옮겨보시지요


부디 바라는 글이 아니시기를



시집 : 마음이 불어가는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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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강현국



이따금 대합실을 기웃거리는

흰나비와 아름다운 햇빛

그리고 솔바람뿐입니다

이곳 운문사는

자판기 종이컵에 반쯤 고이는

200원어치의 적막뿐입니다



파랗게 엎드린 질경이의 그 길은

시냇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시냇물 무심히 들여다봅니다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시냇물 맨발 들여다봅니다

이제 막 대구행 막차가 떠났습니다

혼자 남은 물소리 쓸쓸해 합니다


그대 어느 날

이곳에 두고 간 한줌의 눈물,

눈물 번지는 저녁 노을뿐입니다


시집 : 견인차는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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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 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 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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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을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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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편지 / 김남조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 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빛에 풀리는
나직히 습한 악곡(樂曲)들을
겨울 침상(枕上)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 저려 가슴 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두게 해다오.

눈 오는 날엔 눈발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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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 김민홍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마음이야 가릴 수 없겠지요.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모양이 없으니
어찌 옷으로 지울 수 있겠습니까.

아직은 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잊히기를 원하기 않기 때문일까요.
펄럭이며 다만 정직하게
다시 펄럭이는 일이 내 몫이므로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대들,부지런히 떠나지만
갈 곳은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탐욕이겠지요.
허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으니
올해도 은행잎만 그곳에 수북합니다.
은행나무 심은 마음은 보이지 않아도
전설처럼 매연 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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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편지 . 2


그렇게 쉽게 떠날 줄 알았지요
그렇게 떠나기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꽃핀 나무들만 괴로운 줄 알았지요
꽃 안 핀 나무들은 섧어하더이다

오늘 아침 버스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무슨 삼줄 훑어놓은 것 같아서

오랜 후 당신의 숱 많은 고수머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마 멀리 가지 마셔요
바람 부는 낯선 거리에서 짧은 편지를 씁니다



편지 . 3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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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땐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 강해산



감기 몸살에 신음하면서도
몹시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아플 땐 왜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지요?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가도
이렇게 몹시 몸이 아파오면
당신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집니다.


아마도 마음 따뜻한 당신의
다정한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애써 애처로이 가련하게 보이고 싶고
공연히 어리광도 피우고 싶어요.


알아요, 감기는 편안하게 쉬면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어야지요.
아, 하지만 세상 그 어느 약보다도
그리운 당신의 답장이 훨씬 나은 치료제란 걸
당신은 알기나 하신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요.
이런 날 사랑스런 마음의 답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시길 부탁해요!
아직 부치치 못한 편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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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날의 편지 / 이해인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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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띄우는 편지 / 박해옥



내 편지는
밤 새워 썼어도 늘 백지였다

백지 편지를 고이 접어
하늘 특별시
번지는 없음 이라고 써서

석등처럼 서 있는 우체통에 넣고 나면
밤별들이 파랗게 웃곤 했었다

소나기가 후드득 스쳐도
젖지 않았을 내 편지는
달포 해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찬이슬 맞아도 별인 너는
나의 나아종 지닌 이기에
답장이 없어도 고깝지 않아

달빛이 통밤을 지켜주는 밤이면
나는 잠들지 못하고
조곤조곤
또 너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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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소중한 편지 / 윤석구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편지입니다.

날마다
내 삶의 편지지에
즐거움과 기쁨의 밀어로
빛고운 향기로 편지를 쓸 수 있으니

당신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보고픔과 그리움으로
긴 편지를 쓰게합니다.

밤마다
흔들리는 불빛의 그리움처럼
슬픔과 아픔의 조각들로
눈물젖은 석양의 노을빛 사연으로
기다림의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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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늘에 보내는 편지 / 김종제


사랑하는 사람이여, 사람이여
별 스러지는 새벽이나 어스름 저녁이나
그대 창가로 불어오는 찬 바람에
혹, 기침하지 않고 잘 지내는지요?
그대가 나를 두고 떠나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삼 년이 지나갔군요
나, 오늘도 그대 잊지 못하여 이렇게
그대 있는 하늘을 향하여 눈빛으로
편지를 쓰고 있답니다
그대 홀로 누워있는 그곳에서
무슨 생각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그때도 지금처럼 몸서리치게 단풍 드는
시월의 가을이었나 봅니다
간절한 소망 하나 말하지도 못하고
그대 먼 길 떠나 보내면서 뒤돌아서
저 깊은 가슴속 해저까지 흘리는 눈물
주체할 수가 없었는데 가을도 무심하지
푸른 햇살을 다 일으켜 세워
살갗마저 아프게 찌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만날 날 기약도 없이 가신 그대
나와 함께 있을 때 그 고운 미소 지으며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섬이나 절로 가고 싶어 했지요
지금에사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대가
정처없이 바다를 헤매는 섬이거나
산속 고즈녁하게 노을 지는 절이 아닌가요
그대 떠나보내고 나, 그대 닮은 섬이나
절을 찾아 길 떠난 적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 발길 닿는 곳마다 그대의 흔적
순식간에 사라지고 반겨주는 배롱나무
붉은 꽃만 싫도록 보았음을 아시는지요
사무치는 마음 어찌할 수 없어 글 드리오니
받으시는대로 그대 내가 있는 하늘에
자세히 기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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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편지 / 문정희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남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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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쓰는 편지 /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 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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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 이정하



그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상 내게도 큰
기쁨이었습니다.설령 그것이 헤어짐을 뜻한다 했어도 그랬습니다
그대를 보내고 나서도 내 마음에 걸린 것은 그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대의 밝은 웃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대를 보내는 일이라니.
진정한 우리 사랑을 위해서는 그대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도
있음을.
이젠 한 발자국 물러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대를 그냥 두어 볼
작정인 것이지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우리의 일이 까맣게
잊혀진다 해도 언젠가는 내 사랑 그대가 알아 주리라
믿어 보겠습니다. 그때까지.... 그대여 안녕... 건강해야 다시 만날 수 있으리.
나 또한 몸져눕지 않고 그대가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겠습니다. 훗날 그대가 돌아왔을 때, 낯선 기분이 들지
않도록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가만히 놓아 두겠습니다. 내 할수
있는 그것뿐. 그때까지 그대여 내내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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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편지 /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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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다.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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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편지 / 도종환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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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 김재진



최선을 다해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게 놓여진 시간 앞에 나는 다만
정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다시 당신을 사랑할 기회가 생긴다 해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한 번뿐
더 이상의 사랑은 내게
무의미한 반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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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 안도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 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 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 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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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지와 편지봉투 / 오규원


당신의 편지를 오후에 받았습니다
그래도 햇빛은 뜰에 담기고 많이 남아
밖으로 넘쳤습니다
내 손에서는 사각사각 소리가 났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사각봉투였습니다
사각봉투 끝은 오후의 배경을 가리켰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A4용지였습니다
A4용지는 단정하고 깍듯했습니다
A4용지는 나의 그늘은 잘 담기었지만
바람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두 겹으로 하얗게 접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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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할 말은 눈물이라서 / 김기만


편지로 할 말은 눈물이라서
詩만 적어 보냅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스스로의 어둠을 감추는 것
그대와의 시계바늘을 바꾸는 것
그건 다시 말해서
모든 걸 망각하는 것
백지로 쓴 편지같은 것

그대에게 할 말은 바람같아서
詩만 적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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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편지.1 / 류명선
-詩人의 아내에게


팔자가 더러워 詩人을 만났지
간밤에 재수없는 꿈을 꾸고
돌 던지는 마음으로 살아
詩人이 술을 걸칠 때 작부가 되고
간이 상한다 하며 술, 담배 말리지 말 것
詩人은 냉수를 자주 찾지만
위장이 뒤틀려도 탈나지 않으니 안심해
詩人은 공중에 나는 새처럼 내가 기르고
항상 깨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
詩人은 세상의 불의를 보지 못해 시를 쓰고
가난해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칼날이지
매일같이 술에 적시고 육신은 죽어가지만
詩人의 뇌리엔 튼튼한 꿈을 꾸고 있어
詩人은 홧병같은 시를 그리고
한 뼘의 땅속에 싸늘하게 묻히지
무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지 말고
詩人의 아내도
약한자에게 힘이 되고, 사랑이 되고
아픔이 되어야 해
누구의 아내도 부러워 말고
그이에게 항상
시를 쓰도록 기도해.

시집 : 환희를 피우며/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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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편지 / 원희석


거기 살고 싶다
해송한그루 애인처럼 껴안고
다시마즙처럼
푸름푸름 피어나는
그 밤을 기억하며
하늘편지를 쓰고싶다
흙탕길을 버려가는
발자국이 아름다운 너에게
음악을 실은 바람이
고운 뒷모습을 몰고오는
그곳에서 바위에 피워낸
하얀 조개꽃물로
눈빛 살빛 그리다 거기서
부서지는 섬이 되고 싶다.
너를 기다리며.
기다려도 오지 않을 이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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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게/ 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트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만났고
길고 근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 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은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의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시집 :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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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편지 -바람에게 / 곽재구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은
모국어의 추억들이 얼마나 흉칙한지요

눈이 오고
꽃이 피고
당신의 편지는 끊일 날 없는데

버리지 못하는 지상의 꿈들로
세상 밖을 떠도는 한 사내의
퀭한 눈빛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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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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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 온 편지 / 김옥남


방언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해도
말은 분명히 말이니

너는 네 말만하고
나는 내 말을 할 뿐이나

우리가 서로에게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사랑한다던가, 예쁘다던가
행복하다는 말
고맙다는 방언은
알아 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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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정리하며-편지함 / 목필균


이제쯤
엇갈리기만 하는 너를 정리해야겠다고
편지함을 연다

받은 편지함을 휘저어 보며
과장된 말들을 골라내고

보낸 편지함을 뒤져보며
이별의 예감들을 솎아낸다

이미 한 번 지워진 사연들이
줄줄이 잡혀와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지운 편지함

"선택된 메시지를 영구적으로 삭제시키겠습니까?"
예(Y), 아니오(N)

잠시 머뭇거리다
예(Y)를 누른다
다시 한번 가위질 당하는
나만의 이야기들

이제 영원히 놓쳐버린 것을
빈 눈으로 서성거려 보지만
가슴엔 미련이 선명하게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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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편지 / 이정록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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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최승자


이제는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물의 뒤, 詩集과 커피잔 뒤에도
막막히 누워 있는 그것만 바라봅니다.

정처 없던 것이 자리잡고
머리골 속에서 쓸쓸함이 중력을 갖고
쓸쓸함이 눈을 갖게 되고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
그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발바닥까지
어떻게 내 목구멍까지 적시는지를

눈 꼭감아 뒤로 눈이 트일 때까지,
죽음을 향해 시야가 파고들 때까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내 속에서 커가는 이 치명적인 꿈을.
그러면서 나의 늑골도 하염없이 깊어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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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 김초혜


완성될 줄 모르는 편지는
너에게 도달되지 않고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체국으로 접수될 줄 모른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쓰지도 말자면서 돌아서는 법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연습하지만
정작으로 돌아서야 할 시간에는
변두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서 버리는 건망증
필생에 한 번 혼자서만 좋아하고
잊어야 하는 삶의 징벌 쓰기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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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꽃편지 .7 / 김용택


가을이다
선들바람 부는
길가에
들패랭이꽃 한송이를 따서
너에게 주랴
풀벌레 우는 풀밭 속에 피는
들국 한송이를 꺾어다가
너에게 주랴
이 세상의 모든 그리움들이
길이 되어
이 세상으로 하얗게 뻗는
가을 저녁
꽃을 들고
너에게로 가는 길들은 모두 막힌다
돌아갈 길도 캄캄하게 어두워
풀벌레만 울어대는
이 가을 저녁
이 세상의 모든 그리움들은
별이 되어 반짝인다
내가 지금 너에게 줄
꽃 한송이를 들고 있음을 생각하며
너도
이 남쪽 하늘을 보렴
선들 바람 부는 가을 밤길에서.

시집 : 1990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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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꽃편지.8 / 김용택


가을입니다
봄도 그렇지만
가을도 당신 없이
저렇게 꽃이 피니 유난합니다
봄꽃도 그렇지만
가을에 피는 꽃을 보며
꽃이라고 속으로는 쓰지만
꽃이라고 참말로는 못하고
꽃빛에 눈시울만 적십니다


우린 언제나
꽃을 꽃이라 부르며
꽃 앞에 앉아 볼는지요
우린 언제나
꽃을 꽃이라 부르면
꽃이 꽃으로 보일는지요


가을입니다
봄에도 그렇지만
가을에도 강변에 당신 없고
꽃밭이어서
눈시울만 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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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편지 / 김초혜



너를 본다
얼굴이 부서져
흔들리고 있는
너를 만난다
그물을 던져서
건져올린 그대
그대는 적막이구나
네가 떠났어도
나는 나를 떠날 수 없다
너를 어둡게 할 수 없어
나는 너로 산다.

시집 : 꽃길에서/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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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 정호승



용서하지 못하는 자를 위하여
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용서할 수 없는 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
사람들이 울면서 잠드는 밤

한 사람의 마음을 용서하기 위하여
마지막 잎새 하나 땅 위에 떨어지고

또 한 사람의 마음을 용서하기 위하여
또 한 사람의 들녘이 저물어간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어깨 위에 기대어
날마다 위로받지 못하는 자의 눈물이여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기 위하여
봄눈이 오는 날 편지를 부친다

시집 : 서울의 예수/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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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편지 / 유 안진



목청껏
소리치고 싶었다
한 영혼에 사무쳐
오래오래 메아리치도록
진달래 꽃빛깔로
송두리째 물들이며
사로잡고 싶었던
한 마음이여

보았느냐
보이는 저 목소리를
기막힌 고백의
내 언어를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며 울림하며
차가운 눈발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외침을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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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1. 2 / 장석주


엽서 1


저문 산을 다녀왔습니다.
님의 관심은 내 기쁨이었습니다.
어두운 길로 돌아오며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지만
내 말들은 모조리 저문 산에 던져
어둠의 깊이를 내 사랑의 약조로 삼았으므로
나는 님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 못 견딜 그리움들이 화약처럼 딱딱 터지면서
불꽃의 혀들은 마구 피어나
바람에 몸부비는 꽃들처럼
사랑의 몸짓들을 해보였습니다만
나는 그저 산 아래 토산품 가게 안 팔리는 못난 물건처럼
부끄러워 입을 다물 따름입니다.
이 밤 파초잎을 흔드는 바람결에
남몰래 숨길 수 없는 내 사랑의 숨결을 실어
혹시나 님이 지나가는 바람결에라도
그 기미를 알아차릴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엽서 2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님을 향한 길로 들어선 것은
굳이 운명이라고 할 것까진 없겠습니다.
길가에 널린 적의를 품은 돌멩이들,
어두운 숲 속엔 맹금류의 사나운 눈빛도 번들거리지요.
하지만 그 길로 나를 이끈 것은
내 의지와 힘보다 더 큰 어떤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때없이 스쳐가는 바람의 유혹에 빠졌다고,
날 저물고 어둔 하늘 초록별의 손짓에 따랐다고,
그 길을 에워싼 숲의 깊은 죄가 아니지요,
님을 향해 가는 길은 내 기쁨이지만
시련과 수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는 그 길을 기꺼워합니다.
많이 굶은 내 위장, 부족한 잠으로 늘 고단한
저 붉은 노을 속 주림과 쫓김의 거칠고 긴 내 행려,
허물어진 몸뚱아리 마침내 병 도져 쓰러지면
서편 하늘 선회하는 까마귀들 더욱 까악 깍 거리겠지요.
땡볕 걷히고 소슬한 어둠 내리는 이 저녁 한길가에
부은 발등 지나가는 바람에 식히며 묻습니다.
이 길을 얼마나 더 가야 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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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2 / 김종길


대문깐 줄장미는
늦은 여름부터 잎을 떨구어
지금은 녹슨 철조망처럼 앙상하지만

철 아닌 붉은 꽃 두세 송이
거기 선연히 피어 있듯,

머리칼 성글고
살결은 메말라
삶도 어김없는 늦가을이건만

철 아닌 꽃과도 같은
진한 빛갈의 순간은 있어
몸과 마음 그윽히 달아오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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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 나 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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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편지 / 유 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갯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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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 信 (사 신) / 권혁웅



바람 심한 날이구요
속수무책 잎이 져서
한 시절 저물었음을 알리네요, 헐렁하게
혼자 저녁을 사먹은 날은
그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요
낙엽을 덮어쓰고
머리에서 새싹 돋을 때까지
긴 겨울잠을 잤으면
그래서 속잎과 겉잎 바투 쏟아내며
볕과 그늘을 거느린 일가를 다시 이루었으면
시시껍절한 소리나 주워섬기며
한 시절을 시시껍절로 키워내는 동안
저 나무의 보굿이 되었으면 했어요
당신과 만나 우리가 잡은 손이 울짱을 이루고
닿은 가슴이 바람벽을 할 때까지
나는 세 든 마음이지요
생각하는 사람 자세로 이파리를 털어내는
저 나무처럼 가뭇가뭇 갈 곳 없어요
분식집에서 떡라면을 먹고 나와
떡살처럼 결 고운 당신 무늬를 생각하며 돌아설 때
중앙선에 밑줄 그은 고양이눈 따라
쓸려가는 가랑잎들 보았어요

바람 심한 거리에서 마지막 엽서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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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에서 쓰는 편지 / 김혜선


친구여
오늘은 너에게 내소사 전나무숲의
그윽한 향기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너에게 내소사 솟을꽃살문에 관한 얘기를 해주고 싶다
한 송이 한 송이마다 금강경 천수경을 새겨 넣으며
풍경소리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냈을
누군가의 소명을 살그머니 엿보고 싶다
매화 국화 모란 꽃잎에
자신의 속마음까지 새겨 넣었을
그 옛날 어느 누구의 곱다란 손길이
극락정토로 가는 문을 저리도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맞이하는 것인지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른 너와 내가 건너고 싶은
저 꽃들을 바라보며
저 꽃에서 무수히 흘러나오는 불법을 들으며
나는 오늘 너에게 한 송이 꽃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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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엽서 / 김남조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를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최소한 일년은 몸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旅愁)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이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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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한 장 / 강은교


오래 못 본 친구에게서 항공엽서 한 장이 왔다. 낯 모르는 항구의 잿빛-푸른 하늘이 찍혀 있었다.
[틈틈이 부탁하신 종(鍾)을 보러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녀석은 너무 커서(집채만큼)-메고 가기 힘들고, 어떤 녀석은 너무 작아서 소리도 안 날 것 같고......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때였다. 옆에 있던 바람 한 올이 불쑥 일어서며 제 가슴을 쳤다. 뎅--,

종소리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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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편지 / 이명자


밤마다 나는 편지를 쓴다.
새벽이 오면 나의 편지는
조금씩 지워지면서 떠나고
나는 지워지는 편지의 뒷덜미에
나의 숨결을 하나씩 뽑아 던진다.
이윽고 호흡곤란 증세에 시달려
나의 편지는 천천히 중단된다.
중단될수록 거세지는 침묵의 속력을
너는 모르리라. 너의 눈썹을 강타하는
그 폭풍의 종이에 썼다 지운 침묵의
속력을 모르리라, 너는
지우고 다시쓴 편지의 약해진 속력에
안심하는 너는 모르리라.

편지가 하나씩 지워지는 밤
거리가 지워지고, 집들이 지워지고,
한 동네가 지워지고, 강과 산이...
마침내 모든 손가락들이 켜는
불빛이 지워지나니,
어두운 지도 위에서 방황하는 편지의
폭풍아, 속절없이 캄캄하게
나부끼는 손가락들아,
되돌아 오라, 밤이 깊었으니
다시 시작해야지, 숨쉬는 연습
우리의 입김이 서로에게 닿는 연습
우리가 각각 떠나서
거기 또는 여기에서
잘 지워지고 있음을 확인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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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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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편지 / 안도현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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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저녁의 편지 /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에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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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 안도현


내 사는 마을 쪽에
쥐똥 같은 불빛 멀리 가물거리거든
사랑이여
이 밤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마음인 줄 알아라
우리가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헤어져 남남으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길이 되어 가더라도
어둠은 또 이불이 되어
우리를 덮고
슬픔도 가려주리라

그대 진정 나를 사랑하거든
사랑했었다는 그 말은 하지 말라
그대가 뜨락에 혼자 서 있더라도
등 뒤로 지는 잎들을
내게 보여주지는 말고
잠들지 못하는 밤
그대의 외딴집 창문이 덜컹댄다 해도
행여 내가 바람되어 두드리는 소리로
여기지 말라

모든 것을 내주고도
알 수 없는 그윽한 기쁨에
돌아앉아 몸을 떠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이제 이 세상을 나누어 껴안고
우리는 괴로워하리라
내 마지막 편지가 쓸쓸하게
그대 손에 닿거든
사랑이여
부디 울지 말라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지 말고
그대가 길이 되어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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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서한 / 나태주


1
끝내 빈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 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 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 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 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돌아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 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 빛
한 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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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저수지에서 쓰는 편지 / 이정록


그대 머리맡이나 옆구리로
굽이치며 흘러드는 물줄기

싱싱한가. 寒風에 배를 밀고 가는 새떼들
물갈퀴처럼 손발 시려운가

마른 갈대숲에
차마 얼어붙지 않으려
살얼음 깨무는 달빛 차가운 밤

가슴 밑바닥 자갈 이끼,
흔들며 치솟는 샘줄기에 입 대고 있는가

새의 발목에 악수를 건네는
솔 그림자처럼, 그대에게 가리라
살얼음에 靑針을 벼리는
솔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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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를 쓰는 밤 / 정해종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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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에 쓴 편지 / 김경미



눈 아주 많이 내리던 날이었지요
여의도 한 빌딩 지하에서 문득 마주쳤지요
십몇 년 만인가 아득한데 아직도 혼자라며 웃었지요
걱정 스치는 이쪽 눈빛에 괜찮아요, 괜찮아요
참 번듯한 명함을 내밀었지요
귀찮고 성가신 사소함들에마다 찾으라 했지요
여름 햇빛 속 걷다 가방이 귀찮을 때, 손톱 밑에 가시 박혔을때,
비싼 음식이 맛없을 때, 돈 꾸고 갚기 싫을 때, 그리고 또,
소녀인 양 웃는데 문득 흰 나비떼들 창을 넘어들고
따라들어온 바람은 서늘했지요
신사의 악수는 청량했지요

돌아와 베란다 저 밑, 공사 끝나가는 성당을 봤지요
봄 되면 가서 많이 뉘우치리라 했던 곳이지요
붉은 벽돌 위에 쌓인 흰 눈이 꼭
남자의 울어 붉던 눈 같지만
폐인 된다더니 안 된 그대
그 명함 눈 속으로 날려보냈지요
마당에 선 성모마리아, 두 손 벌려 그 흰 종이
다 받아드는 것 똑똑히 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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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연서 / 함민복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 번 그녀를 만나고 한 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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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편지 / 김정우


그리워 그리워서
가슴이 너무 아파오는 날에는
편지를 씁니다
하얀 편지지에는
물빛 얼굴을 한 그대가
파도처럼 출렁일 뿐
마음은 글이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 알던 설레임은
이제는 즐거운 아픔으로
추억하게 합니다.
그리워한다는 건 미처
다 사랑하지 못한 안타까움일 뿐
언제나 다 채워지지 않은
갈증처럼 답답해 오는
가슴 아픔입니다

얼룩진 편지가 전해진
그대 손 안에서
마른 기침같은 불편함으로
읽혀진 나의 마음은
언제나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은
받지 못한 답장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입니다
마음이 마음으로 통하지 못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을
난 알지 못하지만
오늘 흔들리는 별빛 아래서
또 그렇게 편지를 씁니다.
그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할 말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그리워 그리워서
가슴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답장 없을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그대를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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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편지 / 문옥영


헤맬수록 쓸쓸한 길 끝에는
별들의 집이 있고
겨드랑이에선 푸른 깃털이 돋는데
누가 이곳에 몸만의 사랑을 심어놓았던가요.
날지 못한 깃, 서릿발 하얀 응달에
편지로 쌓인 오늘
가슴에 단단한 옹이가 만져지는 건
당신, 어두운 기억속에서
나란히 발 묻고
따뜻한 체온 서로 덮어주던 때가 그리운게지요
그렇게 오래도록 그리워하다보면
뿌리채 썩는 아픔이 올까 몰라,
차라리 통째 베어지는게 나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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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편지 / 하덕규


흐리고 비내리는 우울한 날처럼
그렇게 슬픈 편지를 내게 띄운다고
미안해 하지 마

사는 게 그저 어렵고 아픈 너에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주지 못하는
네 지친 날개 쉬게 할 수 없는
내 부끄러운 노래

그렇게 잠깐
너의 어린 시절 위에 머무는
나의 노래는
그렇게 잠시
네 마음 속에 살던
나의 노래는
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어디론가 불어서 또 너를 떠나갈텐데

흐리고 비내리는 우울한 날처럼
그렇게 슬픈 편지를 내게 띄운다고
미안해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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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쓰는 일 /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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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편지 / 김용택


앞산에
고운 잎
다 졌답니다
빈 산을 그리며
저 강에
흰눈
내리겠지요

눈 내리기 전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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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 박형준


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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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엽서 / 홍수희


당신의 침묵이
풀릴 때까지

여기 이대로
있겠습니다

얼어붙은 겨울강이
흐르기까지

여기 이대로
있겠습니다

당신 몰래 흐르는
뜨거운 눈물

저 언 강을
마저 녹이면

그 때는
한 말씀 주시겠지요

네 눈물도 기어이
보여 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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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엽서 / 이양우


벌써 오셨답니까,
기다림이 짙은 동구밖에
앙상한 손끝으로 눈꼽을 떼려던
계절의 촉촉한 새.
철길 맞은 켠 집 지나는 기적소리
그 정든 간이역두 초록빛 등성이로

냇갈 개오지 끝자락 잡고
펄럭이는 봄날 팔짱도 여미고
순(荀) 자란 참 두릅 향내음
앳띤 봄날에

언덕 바지 연지 찍은 꽃 환타지
산색(山色) 번지는 꿈물살에
지웠던 이름들 되살아나는
앳띤 봄날이 다가왔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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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띄우는 편지 / 남유정


폐허 위로
한 줄기의 목마른 길이
지평을 부른다 사막,
하얗게 비워진 길로
단봉낙타 한 마리 걸어간다

발바닥을 달구는 모래알보다도
외길의 부름은 더욱 뜨거워
불사의 힘으로 지평에
자일을 거는 나의 낙타여

기억의 단애 저 편, 이미
세포마다 아로새겼을 슬픔의 내력
그대여, 더는 묻지 마라
광활한 지평으로 붉게 타는 노을처럼
마음의 불길을 따라 내달리던 때도 있었으나
낙타의 등이 평평해질 때까지 느리게
걷고 또 걸어 나아갈 뿐

달빛마저 바람에 쓸리는 폐허 가득할 때도
물겨치던 이랑마다
노래의 씨앗을 뿌린다
어둠 가득히 성운이 흐르는 밤이면
저 하늘을 지붕 삼아
돌아오는 물길의 소리인 양 가슴으로 파고드는
그 가락에 젖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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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 원재훈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새가 날개를 가지듯
꽃이 향기를 품고 살아가듯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별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생의 비밀을 적었다.
아이의 미소를, 여인의 체취를, 여행에 깨우침을,
우체통은 간이역이였다.
삶의 열차가 열정으로 출발한다.
나의 편지를 싣고 가는 작은 역이였다.

그래 그런 날들이 분명 있었다.

낙엽에 놀라 하늘을 본 어느 날이였다.
찬바람 몰려왔다 갑자기 거친 바람에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그것은 상처였다.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종착역이 되었다.
모두들 바삐 서둘러 떠나고 있다.
나의 우체통에는 낙엽만 쌓여 가고
하늘은 상처투성이의 어둠이였다.
밤엔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데
분명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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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다 쓴 편지 / 강창민



해는 서편으로 돌려보내고
비는 개울로 돌려보내고
그대가 보낸 노래는
다시 그대에게 돌려보낸다.
꽃은 꽃에게로 돌려보내고
바람은 불어온 창 밖으로 돌려보내고
그대는 그대에게로 돌려보낸다.
그러나 어이 하리,
이 그리움, 이 슬픔은
돌려보낼 곳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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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날의 편지 / 이해인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유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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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고두현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 가는
삼십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 말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에서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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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 김초혜



완성될 줄 모르는 편지는
너에게 도달되지 않고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체국으로 접수될 줄 모른다
부치지 못할 편지는
쓰지도 말자면서 돌아서는 법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연습하지만
정작으로 돌아서야 할 시간에는
변두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서 버리는 건망증
필생에 한 번 혼자서만 좋아하고
잊어야 하는 삶의 징벌 쓰기도 하여라
출처 : 시인 금잔디의 자연과 인위
글쓴이 : 시인 금잔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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