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시선집 <모순의 흙>, 1985)
주제 : 모나지 않은 조화로운 삶의 추구
(우리의 삶 속에서 절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힘에 의해 부서졌을 때 나타나는 위험성 대 해 노 래. 우리는 그릇의 이미지를 통해 모나지 않은 삶과 합리적인 생활의 추구라는 평범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작품해설
이 시는 절제와 균형의 미덕이라는 동양적 중용의 의미를 담고 있는 형이상학적 작품이며, 근대적 이성주의라 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삶과 합리적인 사고 체계를 수용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팽팽하고 긴장된 힘으로 절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그릇’이 ‘빗나간 힘’에 의해 ‘깨진 그릇’이 되었을 때, 그것은 아무것이나 베어 넘길 수 있는 무서운 ‘사금파리’의 ‘칼날’이 되어 그 내부에 감추고 있던 긴장된 힘의 본질 ― 날카로운 면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릇’은 조화롭고 질서 잡힌 ‘원’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매우 불안하고 긴장된 형태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나 사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단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그 본래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이 시는 바로 그 같은 편향된 사고 방식이 가져올 수 있는 획일화된 이념, 사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깨진 그릇’에 비유하여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릇’이 절제와 균형이 잡힌 합리적인 세계라면, ‘깨진 그릇’은 절제와 균형이 무너진 비합리적인 세계가 되며, 그러한 왜곡된 이념이나 사상에 대한 ‘맹목의 사랑’을 강요하는 매체가 바로 ‘칼’인 것이다.
처음엔 조화롭고 균형 잡힌 ‘원’의 세계인 ‘그릇’이었지만, 그것이 깨어질 때, ‘원’이 주는 원만한 세계는 마치 ‘칼날’과 같은 예리한 무기가 지배하는 기형적(畸形的) 세계로 변질되고 만다. 이러한 잘못된 세계는 사람들에게 단선화된 이념만을 강요함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구속하고 억압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에서 ‘그릇’과 같은 모나지 않은 합리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시인의 중용적 생활 자세와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 의지를 찾아낼 수 있다.
오세영의 시 세계
오세영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존재의 상처와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세상에 버려진 고독한 존재라는 것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일찍이 김춘수에 의해 제기된 것이지만, 김춘수가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릴케류의 서양 철학을 통해 탐구했다면, 오세영은 그 고뇌를 ‘무명(無名)’이라는 동양적 진리를 통해 탐구한다. 여기서 ‘무명’이란 본질적인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인 번뇌와 아집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이 무명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통해 존재가 본래적으로 지향해야 할 영원성과 무한성을 찾아가는 노정에 놓여 있는 한편, 존재의 깨달음을 얻은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양식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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