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신비를 일깨우는 다양한 시적 접근 - 성찬경 시인
김순진 (시인.월간 스토리문학 발행인)
지난 5월 25일 인사동에서 있었던 박희진 시인과 이생진 시인이 진행하는 인사동 시낭송회에 참석하였는데 우연이랄까 평소 그 자리에는 평소 월간 스토리문학을 아끼고 늘 도움을 주려 애쓰시는 본지 편집위원 유희봉 시인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유희봉 시인은 지난 호에 박희진 시인을 모셨으니 이번 7월호엔 성찬경 시인을 메인스토리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성찬경 시인이나 박희진 시인은 오랜 친구사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귀한 우리 문단의 원로들이나 우연히 기회가 먼저 닿아 박희진 시인을 모심과 동시에 연이어 성찬경 시인을 월간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에 모신다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고 스토리문학에 있어 크나큰 선물로 다가왔다. 필자와 이야기가 성립되자 바로 성찬경 선생께 전화를 드려 약속날짜를 잡고 이수인 시인과 셋이서 함께 취재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성찬경 시인은 인사동의 ‘오작교’란 한 카페에 약속장소를 정하였다.
일주일 후면 성찬경 시인을 뵐 수 있건만 밤마다 대 시인을 만날 생각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성찬경 시인의 자료를 정리하고 그의 시에 대하여 대강 음미해 보려 애썼다. 짧고도 긴 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한국의 大文豪로 예술원회원이신 성찬경 시인과 만날 날이 밝았다. 서둘러 사무실에 출근하여 질문지를 준비하고 디지털카메라와 소형 녹음기를 챙겨 전철에 올랐다. 종로 3가에서 3호선 열차로 갈아탄 후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오니 약속 시간이 11시였는데 30분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2층에 위치한 카페 ‘오작교’로 올라갔지만 가게 문은 잠겨있었다. 혹시 가게 문을 늦게 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유희봉 시인께 전화를 드리니 이수인 시인과 함께 승용차로 오고 있는 중이라며 기다리라 한다. 그래서 성찬경 시인께 전화를 드리니 지금 나오시려던 참이라 하시기에 오늘 ‘오작교’가 아직 열리지 않았으니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이윽고 유희봉 본지 편집위원과 이수인 시인이 도착하고 우리는 차를 몰아 응암동으로 향했다. 선생의 댁은 충암고등학교와 서부제일교회 사이 언덕이 있는 삼거리에서 은평병원 방향으로 50여M 진행하다 세탁소를 끼고 백련산 방향으로 오르면 ‘늘사랑길 14호’가 자신의 집이라며 찬찬히 찾아오라 일러주신 대로 찾아가니 필자가 응암동에 사는 지라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우리는 움찔하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희봉 편집위원은 얼마 전 다녀갔기에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으나 이수인 시인은 아예 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나보다. 아마도 유희봉 편집위원이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할 요량으로 귀띔조차 않았나 보다. 계단을 올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에는 온통 오토바이 헬멧과 고장 난 자전거, 커피포트 부서진 것, 망가진 의자, 고장 난 시계, 각종 볼트와 너트, 전선들이 담쟁이 넝쿨과 감나무 가지 등에 엉켜 아수라장을 이루며 고물상을 방불케 했다. 선생이 천주교 사제복 차림으로 우리들의 기척 소리를 듣고 나오셨다. 짧게 깎으신 하얀 머리에 단정하신 모습이 우선 우리를 퍼포먼스의 한 무대로부터 나오시며 반기고 있었다.
우리가 놀랄 일은 비단 바깥마당뿐이 아니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문 옆에는 갖가지 전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천주교 십자가 아래 오래된 콘크리트 삽이 사람의 형상으로 붙어 있었다. 거실이며 방이 온통 퍼포먼스의 무대요 갤러리이며 행위예술가의 전시장이었다. 성찬경 시인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우리는 계속 놀라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술원회원, 원로 시인의 서재는 수천 권의 시집들이 잘 정리된 책꽂이에 즐비하고 오래된 책 냄새가 나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에 일관된 생각은 성찬경 시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老 시인의 서재엔 변변한 시집 몇 권 꽂혀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시는, 그가 생각하는 인생은 모든 생각 가능한 것에서 탈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가 추구하는 예술이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그는 물질에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물질도 스스로 영묘한 얼개와 내용을 인간처럼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더 낳아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가 물권(物權)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그가 남들처럼 40여 평의 아담한 정원에 잔디를 심고 꽃밭을 가꾸지 않고 왜 물질고아원이란 이름을 달고 남들이 쓰다 버린 물건이나 망가진 물건들을 주워다가 빼곡히 세워 놓았을까? 그것은 물질에게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생명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그는 늘 실험을 위한 시를 쓴다. 그는 ‘오늘은 이미 어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상황은 자꾸만 어제의 틀에 넣어야 하며 존재의 신비, 생명의 신비, 정신의 신비, 불질의 신비를 찾으려 애써야 한다.’고 각설한다. 그의 책상에는 커피포트 부서진 것이 사람의 두뇌형상을 하고 올려져있다. 그는 시간만 나면 그런 것을 바라본다. 너무도 재미있고 볼수록 신기하며 볼 때마다 새로운 신비의 세계로 빠져든다고 말한다. 커피포트가 물을 끓일 때엔 기능으로서 존재하지만 고장 나서 버려졌을 때엔 미술품으로서 또는 절대가치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모터가 부서진 것을 보면서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으로서의 신비감이 있고, 생명이 없을 땐 생명이 없음으로서 다른 것과 연관될 수 있는 신비감이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집 내부에는 나사로 만들어진 그림 같은 액자와 삽이 걸려있고 망가진 주전자를 뒤집어 사람의 두개골 형상을 만들어놓고 늘 대화한다. 길가에 버려진 작은 인형을 주워온 철 구조물에 앉혀놓고 잉태한 모자상이라 명명한다.
“우리 마당의 유리파편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 있으면 중요하고 없으면 중요하지 안다는 말도 이상한 말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기 위해 쌀과 콩과 돼지와 닭, 파를 먹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살았고 무엇이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기계를 돌려 라면이나 과자를 만든다면 그 기계는 무생물인 돌 속에서 금속을 추출하여 기계를 만드는 일과 같은 이치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 세상 어느 것도 살아있다고 볼 수도 없고 죽어 있다고 볼 수도 없지 않은가?
물질 고아원
성찬경
우리집 마당에는 갖가지 물질들이 모여 편히 쉬고 있다 나와 그것들은 이제 한 가족이다. 길에 버려진 물질고아들이 측은해 보여 하나씩 둘씩 데려온 것들이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마구 데려오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감정과 그것들의 생김새와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 묘한 곡선. 경직한 직선. 의젓한 무게. 천진한 표정. 한 때 시계였던 것 기타였던 것 삼륜차였던 것 승용차 백미러였던 것. 깨진 헬멧. 파이프. 유리 조각. 쇠뭉치. 아무래도 내 기질 따라 광물성 물질이 많은 편이다. 지금은 그냥 그것들 자체. 내가 사랑하는 <오브제> 족이다. 아침 저녁으로 그것들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면 그것들 역시 다정한 시선으로 맞으며 진심으로 나를 따른다. 나의 애정은 시간을 타지 않는 이해를 넘어서는 절대 애정 담담하기 물 같고 신의는 쇠 나에 대한 저것들의 애정 역시 변덕 없는 침묵의 무기질 애정 행복한 행복한 물질 고아원. 나는 이 고아원의 원장이다. 이 물질고아원에서만은 물권이 유린을 당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모든 쓰레기 고아들을 다 구제해주고 싶지만 내 능력으로 그것은 몽상이다. 사랑은 공간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하지만 그것은 몽상이다 우리집 마당은 벌써 너무 초만원이다. 나는 나와 인연이 닿은 물질고아들을 돌보는 수밖엔 없다.
성찬경 시인은 문득 작은 볼트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가 필자에게 건네며 질문을 하였다.
“이 볼트를 보세요. 무엇이 느껴지나요?”
필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아무런 존재도 아니란 생각을 하였던 것이 지구를 움직이는 힘으로 느껴졌다.
“아, 노 시인께 잠시 몇 마디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작은 나사와 나사의 거리에서 우주의 돌아가는 힘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하였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볼트로 결합되면서 시작되고 나사를 잠금으로서 끝납니다. 그래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지구의 자전 같고 거대한 공장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성찬경 시인은 내 손을 잡으며 끄덕였다. “김순진 시인은 감성이 예민하고 치밀한 시인입니다. 이는 아주 드문 일로서 모든 것은 존재의 신비로 봐야 합니다.”라고 예술에 임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나사 하나만을 바라보며 시집 한 권을 채운 나사에 관한 연작시집도 있다고 말한다.
성찬경 시인을 만나며 우리들에겐 시인이며 도인으로 보였다. 그는 박희진 시인과 똑같은 말씀을 하였다. 수도승, 수도자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도를 닦은 기분으로 학문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가장 도력(道力)이 높은 도인(道人)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성찬경 시인 스스로가 내린 판단이 아니다. 성찬경 시인의 스승인 구상(具常) 선생이 공초 오상순 선생을 가장 도력이 높은 시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공초 오상순 선생은 이미 인간으로서 밥 먹고 집짓고 사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 무엇을 하러 왔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철학을 몸에 담고 사시던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구상 시인이 공초문학상을 제정하고 눈을 감았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나라에서 도력이 높은 시인의 계보를 살펴보자면 공초 선생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구상 선생이 아닌가 싶다. 구상 선생은 죽음에 관한 시를 쓰기 위해 젊은 날 이름 모를 산소 앞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하면 정말 도력이 높은 시인이 아닌가? 그 구상 선생을 이을 도인이 박희진 선생이라고 성찬경 시인은 말하지만 필자가 보거니와 박희진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하여 결혼도 안한 진짜 도인이고 보면 성찬경 시인은 ‘세상 모든 만물에는 사랑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존재의 신비가 있다’는 말씀을 들어볼 때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도력이 계신 분으로 보인다.
성찬경 시인은 1930년 충남 예산에서 아버지 성낙호(成樂浩. 작고)와 어머니 서연석(徐然錫. 작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작은 지주였는데 일제시대로부터 몰락하는 과정을 그는 잘 기억하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기상이 넓으시고 호방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예산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가 4학년 때 서울 미동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상경한 것은 1941년으로 일제가 막바지로 악랄하게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시키려 할 시기이다. 공주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 보성중학교(6년제) 2학년에 편입 졸업하였고 1950년 5월 서울대 물리대 영문과를 입학하였으나 전쟁으로 9.28수복 후 중학교 교사를 지내다 1954년 1학년에 편입, 1957년 졸업하였다. 가족으로는 수필가인 부인 이명환(李明煥. 1939년생) 여사 사이에 5남매를 두고 있는데, 장남 기완(耆完.1967년생) 씨는 대중음악평론가로 현재 교육방송에서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성기완의 세계음악기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세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둘째 아들인 기선(耆宣. 1968년생) 씨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와 커티스 음대를 나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 6월 30일 예술의전당에서 교향악축제의 일환으로 부천시향과 KBS교향악단을 지휘한 바 있다. 셋째는 기영(耆英. 1970년생) 씨는 외동딸로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영화 ‘싱글즈’ 시나리오 외 대수의 영화대본을 써서 히트한 바 있다. 넷째 기헌(기헌. 1972년생)는 위스콘 대 매스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을 나와 사제서품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가톨릭 신부로 있으며 다섯째 기우(耆宇. 1975년생)은 고려대학교 수학과를 나와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씨의 본관은 창녕(昌寧) 단본으로 시조는 고려 때의 호장(戶長) 성인보(成仁輔)이다. 인보의 손자 공필(公弼)과 한필(漢弼) 형제에서 각각 노상파(路上派)와 노하파(路下派)로 갈리는데, 노상파가 번창하여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성씨의 인물 중 영의정 희안(希顔) 이외에는 거의가 '삼곡(三谷)집'으로 부르는 노상파의 석린(石璘)·석용(石瑢)·석연(石?) 3형제의 자손들이다. 삼문(三問:死六臣)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조 초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3대가 모두 죽음을 당하여 그의 일문은 절손되고 말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담수는 삼문과는 재종(再從)간이며, 청백리 하종(夏宗)은 삼문의 종(從) 5대손이다. 창녕(昌寧)에는 언제부터 거주했는지 밝혀진 바 없으며, 2세 시중공 성송국(成松國)까지 창녕에 묘(廟)가 있고, 3세부터는 경기도일대에 자리 잡는다. 조상의 묘가 창녕에 있고 시조(始祖)를 중윤공으로 삼으니 본관(本貫)이 창녕이 된 것이다. 3세부터 7세까지 경기도에 묻히었지만 8세 인재공 성희(成熺) 선생께서는 회곡공파(檜谷公波) 성삼문(成三問)선생의 5촌 당숙(堂叔)으로서 사육신(四六臣)과 연루되어 10여 차례 엄한 국문을 당하시고 경남 김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나 충남 달전(達田)에 뭍히었다. 그 뒤로 함경도나 경기도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9세 정재공, 10세 강호산인, 11세 어부공 등이 모두 달전에 묻히셨기에 수도인 서울과 달전이 성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성찬경 시인은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1956년 문학예술지에 조지훈 선생에게 1회추천작 ‘미열’과 2회추천작 ‘궁’, 3회추천작 ‘프리즘’으로 추천 완료하였다. 구상 선생과 조지훈 선생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며 외국시인으로는 T.S 엘리어트, W.B 예이츠, 딜런 토마스, 뽈 발레리 같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문단에서 그가 특별히 힘들었던 시기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하는 작업을 현 시단에서 따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너무 앞서가기 때문에,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너무 어려운 시를 쓰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에 그런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는 글에 대한 자신의 필치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로 일관해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또 “요즘 시인들은 공평하게 아우르는 것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공평하게 아우르는 일이란 생명이 있는 것에만 치중할 것도 아니고 생명이 없는 것도 바라보면 그 자체로서의 생명이 있고 권리가 있다는 물권(物權)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게 된다.
물권시(物權詩)
성찬경
<물권>이란 말이 사전에 있는지 몰라. 호기심이 나서 한번 찾아보니 야아, 있긴 있는데, 이건 너무 했다.
물권: 재산권의 하나 특정한 물건을 직접으로 지배하는 배타적 권리. 즉 사람의 행위를 개입시키지 않고 물건에 관한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권리.
이렇게 정의를 내려놓고 나서 그 예로 소유권, 지상권, 영소작권(永小作權) 지역권, 유치권, 선취득권, 광업권, 어업권, 따위를 열거하고 있으니 이 ‘물권’은 내가 생각하는 <물권>과는 정반대의 개념일 뿐이다. 결국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옹호하는 권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 의식의 경직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산업공해가 안 올 리가 없다.
전에 어떤 책에서 영원한 기성(棋聖)인 오청원(吳淸源) 9단이 바둑돌의 권리를 <석권(石權)>이라 했던 일이 생각난다. 물권이건 석권이건 목권(木權)이건 지권(地權)이건 산권(山權)이건 수권(水權)이건 금속권이건 화권(火權)이건 대기권이건 또는 무슨 권이건 간에 탐욕을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져야 세상의 평화가 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우리의 육신의 자양이 되는 것은 공기, 물, 소금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곤 모두가 생명체이다. 물고기나 짐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쌀, 보리, 밀, 팥, 콩, 무, 배추, 깨, 온갖 과일, 뭣하나 생명체 아닌 것이 없다. 어떤 목숨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 딴 생명의 희생으로 생명이 이어진다. 눈물로 보답은 못 할망정. 지구는 우리의 유일한 집. 온 우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 원래는 수정같이 맑고 시원한 물 흐르는 젖과 꿀 흐르는 곰삭은 새우젓 국물도 흐르는 송이버섯 향기 이는 지구. 지금은 피부도 내장도 썩어들어가 빈사상태에 임한 지구,
새 정의를 내려야 한다.
물권 : 물질도 스스로 영묘한 얼개와 내용을 인간처럼 주장할 수 있는 권리 더 낳아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부칙 : 1. <물권>을 존중하는 자는 번영과 평화를 누린다. 2. <물권>을 유린하는 자는 필히 망한다.
성찬경 시인이 물질에도 사랑받으며 대접받을 권리가 있고 모든 것에는 존재의 신비가 있다는 이론을 적립하기까지 세월이 많이 걸린 것처럼 그는 60년대 초반부터 밀핵시론(密核詩論)을 주창해 왔다.
밀핵이란 말에 시를 넣은 밀핵시는 그가 만든 조어지만 현대는 점점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宇宙律」이란 운문의 격조와 산문의 표현적 정밀성을 동시에 살리려는 것으로 운문과 산문의 중간쯤의 율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율은 운율상의 반투명인 셈이다. 「나사」에 관한 연작시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그의 많은 시들이 이러한 우주율에 바탕을 두고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要素詩」란 말 역시 성찬경 시인이 만든 말로서 시가 어느 정도 짧아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뇌는 시를 보다 상상의 나라로 데려갈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말하면 시에서 군더더기를 다 빼고 최소한의 언어적 요소나 심상의 에센스만으로 시를 이룩하려 했다. 그것은 곧 언어의 절약으로 이어지고 그는 3자 1행시를 쓰다 2자 1행시를 쓰게 되고 나중에는 1자1행시로 함축하여 시를 가장 최소 음절로서 표현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래서 최후로 뽑힌 시어들은 필연적으로 최대한의 밀도를 지니게 되는되 이 점에서, 밀핵시와 유사하다. 그런 그의 언어절약에는 絶對詩, 一字絶對詩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말하자면 한 줄이나 한 자에 자신의 모든 심상을 함출하고 밀핵하여 표현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해/달/별/땅/빛/감…” 이렇게 시작해서 “…끝/힘”으로 끝나는 해라는 시는 一字 一行詩로 총 119자 119행으로 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한 자 한 행으로 끝나는 시를 발표한 적도 여러번 있다. 이를테면 흰 백지 위에
술
성찬경
술
註:「一字」일명 「絶對詩」다. 「술」한 자로 시의 제목도 내용도 끝난다. 다만 넓은 백지의 여백이 「술」과 수작한다. 「술」은「술!」하고 짧게 소리내야 한다. 「바다가 포도주 몇 방울에 취해서 파도가 높아진다」는 폴 발레리의 명시가 있다. 나는 이 시에서 정성들여 잘 빚은 한국의 약주를 생각한다. 술에 취한 백지에서는 어떤 감홍의 파도가 일까.
성찬경 시인이 이렇듯 물권(물권)이란 말을 만들어 모든 물질에도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고 물질고아원이라 하여 고장 나고 못쓰게 된 것을 주워다가 자신의 시비를 세우고 정원수를 심고 꽃을 가꾸어야만 마땅할 그 아까운 뜰 안에 친 자식처럼 세워놓고 돌보는 것은 어쩌면 성찬경 시인의 가슴에는 따듯한 사랑이 많아서일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늘 사제복을 즐겨입는 시인에게서 우리는 천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성찬경 시인은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달라는 이수인 시인의 말에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라다니지 말라”고 당부한다. “비록 보잘것없는 나사 한 개라도 사물에 깊이 들어가 인식해야 한다. 감각적인 것, 표면적인 것, 눈부신 것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화가 폴 세잔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세잔느는 “겉으로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고 ‘속에 들어있는 정신’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죽어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점점 더 그의 가치가 상승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토리문학에 좋은 말씀을 해 달라는 유희봉 편집위원의 말에 “문학이라는 것은 아름다움과 진실의 추구이다.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문학을 할 필요가 없고 아름다움을 배척한다면 그 문학은 배척된다. 문학지의 방법은 각자가 처한 처지에서 성실하게 하면 방법이 나온다며 각자 개성을 가지고 다르게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성찬경 선생과 여러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길에 뜨락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성찬경 시인은 결코 외롭지 않다. 어느 나사를 박아놓은 조형물을 보니 큰 절에 들어갈 때 사천왕상이 절의 잡귀를 물리치고 수호해 주듯이 성찬경 시인의 맑은 사랑과 동심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서진 자전거 위에 씌워져 있는 오토바이 헬멧이 대화를 건다. 진시황이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를 구해다 먹고 갖은 방법을 쓰다 결국 죽어갈 때에 수많은 신하와 말들을 생매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토기로 만든 신하와 말 등을 수없이 만들어 같이 매장한 것을 보며 인간이 얼마만큼 목숨에 치사한 것을 느낀다. 그러나 성찬경 시인은 죽어있는 물질을 살린다. 말 못하는 물질과 대화를 한다. 말 못하는 물질을 사랑하며 정을 나눈다. 거리에 노숙자들은 그래도 동정이라도 받지만 그 버려진 물질에게 누가 사랑을 주겠는가? 성찬경 시인은 자신의 뜰 안이 좁은 것을 하소연한다. 뜰 가운데엔 죽은 풀로 휘감겨진 슈베르트의 초상이 있다. 그는 그 슈베르트와 날마다 대화한다. 슈베르트가 성찬경 시인의 집에 온 것이 아니라 성찬경 시인이 슈베르트의 집에 놀러간다.
성찬경 시인의 말씀을 듣고 나니 ‘살아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오늘 살아있기 위해 수많은 벼의 껍질을 까서 그것도 끓는 물에 삶아서 입에 넣지 않은가? 벼의 생명은 하찮고 사람의 껍질은 까면 안 된다는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살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고 배추를 수없이 난도질하여 거기에 고춧가루, 소금을 뿌려서 먹는 우리가 과연 살아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또 기계를 만드는 쇠는 어디에서 왔는가? 돌을 부수고 거기서 광물을 추출하여 기계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돌은 죽어있고 기계는 살아 움직인다고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에는 생명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은 죽어 흙이 되고 나무는 그 흙 위에서 자라고 또다시 나무에서 나오는 산소를 사람들은 마시지 않는가? 땅 속 수천 킬로미터를 파고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돌일지라도 결국 지구를 지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느 것에나 역할이 있고 신비로움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구는 한 덩어리의 큰 기계로 봐야 할 것이다. 모래의 미세한 입자도 모여서 큰 성을 쌓고 아무리 대단한 우주라도 하나부터 시작하는 것을 안다면 길가에 버려진 오토바이 헬멧, 커피포트 부서진 것, 전깃줄 한 토막, 작은 나사 한 개 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신비를 우리는 보아야만 한다. 성찬경 시인이 작은 나사 한 개를 내밀며 ‘무엇이 느껴지느냐’고 물은 뜻을 이젠 알 것 같다. 성찬경 시인이 왜 그 작은 나사 하나를 나사산이 하얗도록 손으로 주무르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돌을 주물러도 마찬가지 금을 주물러도 마찬가지의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신비롭다”는 진리가 성찬경 선생이 우리에게 주는 메지시다. 성찬경 시인은 수많은 직책에 있어보았다. 그러나 성찬경 시인은 한국시인협회 회장이나 예술원회원이라는 감히 바라만보아도 존경심이 우나나는 직책보다는 ‘물질고아원 원장’직을 더 선호한다. 그것은 고아원에 있는 물질고아원에 자신이 돌보고 있는 원아들이 한없이 사랑스럽고 그 존재가 볼수록 신비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월간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해주시며 월간 스토리문학 독자들에게 크나큰 진리를 전달해 주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의 신비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신 성찬경 시인께 오래오래 사시라고 엎드려 절을 올린다.
성찬경(성찬경) 시인 연보
1930년 3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출생 1956년 『文學藝術』誌를 통해서 조지훈 선생의 추천에 의해 시 「미열」,「궁(宮)」,「프리슴」으로 데뷔 1961년 이경남, 박희진, 박성룡, 이성교, 이창대, 강위석 등과 함께 동인시지 『60년대 사화집』에 참가. 同誌는 1967년에 12집으로 終刊. 1963년경부터 이른바 「밀핵시론」에 착상 1964년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를 거쳐 동 대학원 영문과 졸업,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음. 1971년~1972년 미국 아이오아 대학교의「국제창작계획(International Writing Progrem)」에 참가 1979년~ 현재 具常(作故), 박희진 등과 함께 「공간시낭독회」시작, 현재까지 이어옴. 공간시낭독회는 2005년 6월 29일 300회에 이르고 있음. 1980~1981년 「문교부 교수 국비 파견 계획」에 의해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 연구. 1966년 12월부터 현재까지 4회에 걸쳐 성찬경의 「말예술」공연. 「말예술」이란 시낭독을 예술의 차원까지 끌어올리려는 일종의 문학적 퍼포먼스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가톨릭문인회 회장 등 역임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상 경력
한국시인협회 상 월탄문학상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 등 수상
시집 『화형둔주곡』(정음사. 1966), 『반투명』(서문당, 1984), 『무극』(성균관대 출판부, 1995) 『나의 별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니?』등 다수
*월간 스토리문학 200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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