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미당 선생의 유고시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0. 27. 15:32
미당 선생의 유고시
대구 지하철 참사 6일째. 2003년 2월 23일 일요일의 한반도에는 온종일 보슬비가 내렸다. 차겁고 축축한 빗줄기는 추모 인파들의 얼굴을 적시고, 한많은 가슴을 적셨다.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아픔없는 세상에서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안타까움과 회한의 분노로 범벅된 눈물은 간절한 염원이 돼 나의 마음 자락을 슬픔의 강물로 넘쳐 흘렀다.
새 봄이 오는 길목에서 목멘 아픔을 끌어안고, 미당 선생의 유고시 4편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본다. 나의 모교 동국대학교는 교내 중앙도서관에서 개최되는 미당의 유품전을 앞두고,「제야(除夜)」「곶감이야기」「나의 길」「도로아미타불」등 4편의 유작시를 공개했다.
미당의 제자인 윤재웅 동국대학교 교수는 "미당의 미발표 시는 약 100여 편에 이르며 고인의 사후 정리를 계속해왔다"며 "이번에 공개한 시는 미당이 1950∼1999년에 기록한 시작 노트 10권 중 8, 9권에 실려 있는 것으로 1993년 1월부터 1994년 10월 사이에 창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첫권에는 「내리는 눈발 속에서」「무등을 보며」등 선생의 대표시들이 반듯한 육필과 북북 지우고 첨가한 시구절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대학노트로 1천5백페이지 가량의 시작노트는 초고를 고친 흔적이 생생하게 나타나 천의무봉의 시선(詩仙) 미당시이지만 절차탁마의 고심을 추적할 수 있다.

음력으로 섣달의 그믐날 밤엔
얼어붙은 강물을 뛰어 건네서
호랑이 총각이 장가를 간단다.
젊은 사내자식이 왜 그리 찌푸러져
식은 재 되어 사위어 가느냐?
식은 재 되어 사위어 가느냐?

「제야」의 전문이다. 미당의 상상세계 안에서는, 삼라만상은 모두 어떤 영원한 고장을 향해 험난한 여행을 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와 시간에 갇혀 있는 시인의 영혼이 다시 순수 영혼의 세계에서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력(詩歷) 60년을 넘긴 노시인답게 ''호랑이 총각''같은 기개로 ''식은 재''되어 사위어 같은 시적화자를 안쓰럽게 질타하고 있다.

내가 본격적으로 동시에서 벗어나 우리 시를 대면하게 된 것은 중학교 신입생 때였다. 순영이 사촌누나가 선물로 김소월의 시집을 주었다. 『못잊어』로 제목을 단 소월시는 막 사춘기에 도입한 나에게 풋사랑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얼마 후에 그 갈래머리 누나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또 다시 안겨 주었다. 만해시의 ''님''을 원점으로 한 이별과 만남의 변증법적 드라마는 제겨두고, 그저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시로만 다가왔다. 그 충격의 여파로 나는 시쓰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어설픈 시쓰기가 사랑꽃을 피울 때 가장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 미당 선생의 「국화 옆에서」였다. 하나의 생명이 성숙되어 가는 험난하고 지루한 과정을 이 시는 보여준다. 또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외경감을 통해서 삶의 경건함을 강조하는 명편이다. 나는 이런 인고와 기다림을 거쳐 투명한 삶의 생명이 피어나는 시정신보다 국화꽃의 누님과 나의 순영이 누나와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미당 선생을 좋아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오감도」의 이상을 알고부터 미당 선생을 한국시에서 타파해야 할 서정시의 족장으로 알고 멀리했다. 그저 서구의 이미지즘이니 모더니즘, 다다이즘 등에 열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여파는 심각하게 나타났다. 고교 때 시쓰기의 맞수 송유하는 동국대학교 백일장에서 「주발」로 당당하게 장원을 하였고, 나는 입선으로 끝나고 말았다.

― "보들레르를 정독해야 해. 그는 사팔뜨기 창녀 사라, 흑백 혼혈 쟌느 뒤발, 여배우 마리 도브륀과 멋지게 놀기도 했지. 나는 산문시 『파리의 우울』과 『인공낙원』을 열심히 읽었네. 인간의 불행에 대한 눈물, 그 자체였어. 사바티에 부인과는 플라토닉 러브를 하지 않았나."

손바닥 펼쳐보니
도로 아미타불이군!
주역이니 팔괘니
그런 건 무얼하나?
도로 아미타불이야!
도로 아미타불이야!

「도로아미타불」의 전문이다. 영원이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것임을 드러낸다. 미당은 도처에서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본다. ''도로 아미타불이야''의 반복 속에서 미당이 말년에 느낀 삶의 무상함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영원히 살아있는 현역 시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본보기.

나는 우리 나라 문청들이 선망하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전국적으로 문명을 날리던 송유하는 집안형편으로 불교과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선후배 학생문사들은 송유하를 둘러싸고 애지중지 하였다.
1960년대 후반 미당 선생댁은 전차가 다니는 마포 종점 공덕동 산중턱에 있었다. 우리 동국 학생문사들은 주말이면 공덕동 근처를 어스렁 거렸다. 습작품가지고 미당 선생에게 눈도장 찍기 위함이고 더불어 술 한잔 거칠 수 있는 기회도 더러 생기기 때문이다. 그 공덕동에서도 송유하는 귀빈이고 나는 꿔다논 보리자루였다.
그때는 미당 선생의 전통적, 신라적, 불교적, 토속적 세계가 나에게는 정겹게 다가오지 않았다. 예술적 영감과 정신적 방종을 일삼던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이 내가 넘어야 할 험난한 산맥들이었다. 일상의 역을 떠나 하늘로 가는 쉬르의 열차를 타는 시인의 한 무리로 자처하곤 했다. 박제천·홍신선·정의홍 등이 신석초·문덕수·김현승 시인들의 추천을 받아 미당 교실을 떠났다.
나도 반미당파가 되어 1967년 ≪현대문학≫지에 신석초 선생 추천으로 데뷔했다. 미당 선생은 나에게 ''산하(山下)''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시인은 호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지. 산하! 바로 산 밑에 평화와 행복이 있는거야. 시인은 평화와 행복을 주는 사람!"
무모하게 대학교 4학년 때 첫시집을 간행했다. 서문은 신석초 선생. 제자는 미당 선생이 써주셨다. 그러면서 제목도 정해 주셨다. "물고기 떼도 자기들이 가는 지름길이 있지. 우리 시인들은 지혜로운 삶의 지름길을 안내하는 사람들이야. 『어군(魚群)의 지름길』 홍시인 시 속에 나오는 구절일세!"

― " 내 시집에서 최고는 「동천」이네. 한번씩 다시 보게나. 『삼국사기』를 원문으로 읽어야 해. 난 언제나 학생 신분이야. 기본을 잘 익히고 다음은 자신을 늘 절제토록 하고……. 나는 지금도 1628개의 세계 산 이름과 수도 이름을 복송하고 있어. 이런 식으로 하면 기억력 침체 방지훈련으로 최고지."


내 길은
한정없이 뻗혀있는
안 끝나는 길이로라.
산을 넘어 가면
또 산,
그 산 넘어도 또 산의
첩첩 산중 길이로라.
사막을 건네가면
또 사막,
그 사막 넘어가도 또 사막뿐인
아득한 아득한 사막길이로라.
그러나 이 길엔
바이칼 호수같은
세계에선 제일 깊고
세계에선 제일 맑은
호수물도 있나니,
이런데서 쉬어쉬어
대어갈 길리로라.

「나의 길」전문이다. ''한정없이 뻗혀있는'' 끝없는 예술적 행로와 ''산 넘어도 또 산''의 구도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시의 몸뚱아리에 붙어있는 살덩어리들은 모두 다 떨어져 나가고 이 세계에서 제일 깊은 시의 피와 이 세계에서 제일 맑은 시의 뼈가 당당하게 「나의 길」속에 있음을 나는 감지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고향 대전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러면서 두 번째 시집을 간행했다. 서문은 미당 선생이 써주셨다.
"대전의 시인 홍희표에게서는 무엇보담도 많이 우리들의 고향의 냄새가 풍기고, 그의 이번 제2시집의 제목처럼 숙취의 냄새가 나는게 좋다. 그의 처녀시집 『어군의 지름길』에서도 그건 그랬었지만, 이번 『숙취』에 와서 그것들은 그 심도를 훨씬 더 해보이고 있어, 이 나라에 그보단 먼저 태어나 시를 써온 사람의 하나로 저으기 자랑스럽다." 미당 선생은 나를 고향의 시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 나는 정말 고향을 생각하는 ''한밭풍물시''를 쓰게 되었다.
1970년대 미당 선생이 꿈꾸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 대전 문인들을 데불고 상경하였던 일, 그때 이문구 소설가는 김동리 추대 선봉장이었다. 많은 문인들이 미당 선생 사후 다시 비판의 도마에 놓고 칼질을 할 때, 이문구는 앞장서서 "우리 문단의 큰 어른을 그렇게 하면 안되지……." 하면서 손사래를 흔들었다. 이문구는 한 세대 전 농촌 인물들이 지녔던 정서와 세계관을 정겹고 건강하게 복원시키는 데 탁월했다. 또한 독보적인 인물 묘사와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였다. 순수·참여 아우른 문학동네의 마당쇠이자 터주대감도 갔다.

― " 시 쓸 때 표현을 통해 재주 부리면 못써. 기교는 허망한 게야. 시의 행위는 종교적인 제의(祭儀) 같아야지. 무엇이 삶의 진실인가, 그걸 찾아나가는 거야, 시는.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빛이신데
그래도 절은 하면 곶감 한 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아서 그래" 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주셨네.
"도깨비 서방 얻어 호강하는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빛이 다아 되어버렸지"

「곶감 이야기」전문이다. 근대화 이전 우리의 삶의 모습을 전통 설화를 차용해 그린 시편이다. ''도깨비 서방''과 ''고추장빛'' 눈의 시어들은 미당 특유의 토속적 질마재 미의식이 드러난다. 가치있는 시정신은 어디 있어도 시간의 풍화에 살아남는 법. 한국의 전통 속에 깃들어 있는 단순소박한 아름다움의 발견이야말로 미당의 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고무장화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미당 선생이 읊었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 봉산산방 주변은 도로포장이 깨끗이 됐지만, 요즘 다세대주택 건설 열기로 레미콘 차량이 골목길을 분주하게 하고 있다. 봉산산방과 골목길을 사이에 둔 앞집과 뒷집도 빌라였다. 만일 어찌 잘못되기라도 하면 봉산산방도 그 열기에 휩쓸려 버릴 것 같다.
봉산산방은 미당 선생의 말년치료비 등으로 은행 저당에 잡혀있는데, 한때 서울시와 관악구가 시인의 집을 사들여 기념관을 만들 계획도 했지만 찬반 양론에 부딪혀 담보상태라고 한다.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북 고창군에 기념관을 설계한 김원 건축가는 "외국의 경우 유명시인이 말년에 몇 달만 머물던 집이라도 잘 보존해 기념관을 만드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 30년을 넘게 보낸 집을 이렇게 폐허가 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이게 반만년 문화민족의 현주소냐며 한탄했다.
아, 그 봉산산방에서 한성기·박용래 시인과 더불어 달래술을 놓고 김동리 선생에게 패배한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자리를 위로해 드렸지. 그런데 텅빈 봉산산방을 누렁이 한 마리가 홀로 지키고 있다. 나무들조차도 집주인의 부재를 인정하지만 누렁이만은 애써 시인 부부의 떠남을 부정했다. 인적 끊긴 시인의 집 담안엔 누렁이 한 마리만이 돌아오지 않는 시인을 기다리며 마당 한편에 쌓아놓은 문학잡지들을 건드리며 서러운 화풀이를 하고 있다.

― "그 쪽에서 명년쯤 준다고 하는데, 그거 안 받으면 어떤가? 파스테르나크나 싸르트르처럼 멋지게 사퇴하질 않고, 엘리어트 그 이상한 녀석, 뭐 그런걸 받고, 그야 상주면 좋겠지!"
(죽음아, 너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한 친구로 생각하며 지내는지 오래다. 그러다가 네 집에 잠시 들러서 내 적멸로 가는 것이 생자인 나의 할 일이 아니겠느냐. 선생의 「영생의 자각」에서)

호는 미당(未堂)
1915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에서 출생  
1922 마을 서당에서 한자 수업  
1925 부안군 줄포공립보통학교 입학  
1929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1930 중앙고보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관련되어 구속되었으나, 연소자라는 이유로 기소유예되어 석방됨  
1931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 자퇴  
1936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壁)>이 당선.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창간  
1941 동대문여학교 교사로 부임  
1946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위원장 직을 맡음  
1948 정부수립과 동시에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에 취임  
1949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위원장  
1950 종군문인단 결성  
1954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위원장 역임  
1977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화사집(花蛇集)>    남만서고  1941
평론집 <시창작법>(공저)    선문사  1949
<작고 시인선>(編)    정음사  1950
<현대조선 명시선>(編)    운문사  1950
시집 <흑산호(黑珊瑚)>    우생출판사  1953
시선집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평론집 <시창작교실>    인간사  1956
평론집 <시문학 개론>    정음사  1959
평론집 <한국의 현대시>    일지사  1959
시집 <신라초(新羅抄)>    정음사  1961
시집 <동천(冬天)>    현대문학사  1969
시선집 <서정주 시선>    민음사  1974
시선집 <서정주 시선>    정음사  1974
시집 <국화 옆에서>    삼중당  1975
시집 <절마재 신화>    일지사  1975
평론집 <나의 문학적 자서전>    민음사  1975
<한국의 명시선>(編)    현암사  1977
시선집 <서정주의 명시>    한림출판사  1979
평론집 <현대작가론>    형설출판사  1979
시집 <귀촉도(歸蜀途)>    선문사  198  
평론집 <현대시인론>    형설출판사  1981
시선집 <서정주>   한국현대시문학대계16  지식산업사  1981
시집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소설문학사  1982
평론집 <시문학 원론>    정음사  1983
시전집 <미당 서정주 시전집>    민음사  1983
시집 <안 잊히는 일들>    현대문학사  1983
시집 <국화 옆에서>    동서문화사  1984
시집 <노래>    정음문화사  1984
시집 <국화 옆에서>    자유문학사  1987
시집 <이런 나라를 아시나요>    고려원  1987
시집 <서정주 시집>    범우사  1987
시집 <국화 옆에서>    혜원출판사  1987
시집 <국화 옆에서>    자유문학사  1988
시집 <팔할이 바람>    혜원출판사  1988
시집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아>    신원문화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