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자화상-서정주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0. 27. 14:49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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