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푸르러서 썩지 않는 슬픔떼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0. 24. 15:46
푸르러서 썩지 않는 슬픔떼 / 고재종
번호 : 62794   글쓴이 : 플로우
조회 : 49   스크랩 : 1   날짜 : 2006.10.04 11:18





남들은 푸른 절개라 뭐라 하지만

저 대나무 보는 나는 늘 서럽다

한 번의 태생, 그 모진 뿌리에 엉키어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그것으로

댓마디마디 부르튼 것을 보아라

한 번의 운명, 그 모진 노여움에 살아

푸르른 눈 한 번 감지 못하고

댓잎새 서걱서걱 제 살이나 베고

바람은 한시도 멈출 줄 몰라서

저 대나무도 나도 가만 있질 못한다

때론 우듬지 떨림 같은 그리움으로

수많은 되새떼을 야심천에 띄우고

날빛과 별빛 사이의 설렘을

금쌀밭 은쌀밭으로 바꿔보기도 했지만

모든 게 부질없느니! 그렇다 해서

그 소가지 텅텅 비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꽃 한번 피우는 그날이

생의 최후의 날인 이 천형 때문에

대밭에선 늘 살가지떼나 사는 것이냐

차라리 죽창으로 빛나리라 했다

선혈이 낭자한 어느 아침놀 녘

번뜩이는 도끼로 제 발등 찍어

제 운명을 겨누는 죽창이기보단

차라리 황혼의 대피리 열어

이 땅의 슬픔떼 일렁이게 하리라 했다

푸르러서 썩지 않는 그 슬픔떼 안고

제 생의 몫을 견디는 자들의 노래

아직은 세상에 넘치리라 믿는 탓이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