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문학을 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월정月靜 강대실 2006. 10. 1. 20:44
문학을 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이승하
 

  청소년 여러분, 안녕?

  여러분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저 이승하란 사람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시 이론과 창작 실기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직업일 뿐, 제 스스로는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984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가 뭉크와 함께]라는 시로 등단했으므로 22년째 시인으로 살아오고 있답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지침이 될 만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네 번 가출을 했고 세 번 자살기도를 하는 등 엉망진창의 삶을 살아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었지요. 여러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줄 수 없는 처지임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문학도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펼쳐놓기 전에 잠시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해보고 싶네요. 

  집안 환경이 조금 어두웠던 탓에 고등학교를 딱 두 달만 다니고 가출을 시도, 서울 구경을 난생 처음 했습니다. 이른바 '무작정 상경'이라는 것이었는데,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살아가다가 돈이 떨어져 대학생인 형한테 도움을 청한 것이 잘못이었지요. 아버지가 형에게 이미, '승하가 나타나면 곧장 집으로 연락해라'고 말을 해두어 저는 고향 김천으로 끌려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저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 뒤에도 세 번 더 행해진 가출로 끝나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는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선택한 곳이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란 데였습니다.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계기가 대학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둔재고 범재여서 문예지 신인상이며 신춘문예 등에 시와 소설을 계속해서 투고, 사십 몇 번을 떨어진 끝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간신히 당선하여 등단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장기, 청소년기, 습작기 그 어느 시절을 회상해 보아도 저 자신의 체험 안에서는 교훈 삼아 들려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난감합니다. 여러분이 기왕 문학에 뜻을 두고 있다면, 아니면 문학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첫째, 문학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입니다. 

  문학인 가운데에는 글을 써서 받은 원고료니 인세니 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많고 많은 문학인 중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글만 써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글만 써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저도 시인이란 것이 직업이 될 수 없어 학교에 몸담고 있습니다만 솔직하게 말해 글만 써서 먹고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행위는 돈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만 글이란 것이 대개의 경우 큰 재화(財貨)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제 경우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쓰면 10만원 정도의 원고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물론 돈이 되는 책을 쓰는 경우도 있지요. 이른바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책은 그 방면으로 재주가 따로 있는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문학은 순수한 창작 행위입니다. 공자의 말씀 그대로, 시란 사무사(思無邪)를 지향하기에 신의 창조 행위에 버금가는 위대한 작업입니다. 따라서 문학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용기와 결심과 집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좇아 앞으로 치달려갈 때, 천천히 걸어갈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앞만 보고 걸어갈 때, 뒤를 돌아볼 줄 아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쿨쿨 자고 있을 때, 깨어 있는 집념이 필요합니다. 

  문학인이 명리를 좇거나 부를 추구하면 사기꾼이 됩니다. 문학은 자본주의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정신의 세계 혹은 영원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저는 몇 해 전에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라는 제목의 시 해설서를 간행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 중 백 년 뒤에도 읽혀질 글을 쓴 사람이 있다면 그는 100년 이상을 산 것입니다.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진대 정신의 세계, 혹은 영원의 세계를 추구하고 싶지 않습니까?

  
  둘째, 문학은 천재성의 산물이 아니라 노력파의 생산물입니다.
  
  이 세상에는 문학적 천재나 요절한 문학인들이 있습니다. 세계 문학사를 살펴보면 30년도 채 못 살고 죽은 사람이 제법 되고, 40년을 못 살고 죽은 사람은 수두룩합니다. 당나라 때의 시인 중 이백과 두보, 왕유와 더불어 '당시사걸(唐詩四傑)'로 일컬어지는 이하(李賀, 791∼817),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존 키츠(1795∼1821),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장편소설 {대장 몬느}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알랭 푸르니에(1886∼1914), 일본 단카[短歌] 문학의 거장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 독일 전후 문학사의 출발점이 되는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1947)는 모두 스물일곱의 나이로 죽은 문인입니다. 

  일제하 한국 문단의 찬란한 별인 김소월(1902∼1934), 김유정(1908∼1937), 이상(1910∼1937), 윤동주(1917∼1945) 등은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자신의 천재성을 뚜렷하게 보이고 죽은 문인도 이처럼 많지만, 여러분이나 저나 문학에 관한 한 범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지런히 읽고 써야 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읽는 것만큼 쓸 수 있습니다. 읽지 않고 쓰려고 하는 것은 사상누각을 짓는 일이며, 나무에 가서 고기를 구하려는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무엇이든 쓰고 싶은 것을 쓰십시오. 일기나 편지도 좋습니다. 써볼 버릇을 해야지 글이 나오지, 언젠가 역작을 쓰리라 하고 마음만 먹고 있다간 영영 못 쓰게 됩니다."

  "옛 사람이 글을 잘 쓰려면 다독, 다작, 다상량(多商量, 생각을 많이 하는 것)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3. 젊을 때 책을 안 읽으면 영영 못 읽습니다. 

  10대 때에는 무조건 많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려면 만화책을 보는 시간, 게임을 하는 시간, 인터넷 검색을 하는 시간, 친구와 채팅을 하는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느냐구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명작 혹은 고전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평생의 양식이 되는 책이 명작이며 고전입니다. 세계명작전집 한 질을 독파하지 않고 글을 쓰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데……. 

  시험 성적 올리기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을 겨를이 없다구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행을 가서도 틈을 내서 책을 읽어야 하고, 시험 후에 집중적으로 읽어야 하고, 밤을 꼬박 새우며 읽어야 합니다. 책읽기를 생활화하지 않으면 글을 쓸 욕망이 잘 생겨나질 않습니다. 청소년기에 읽을 필독서를 선정해 달라구요? 중학생, 고등학생 구분하지 않고 읽을 만한 책을 외국 소설에 국한시켜 꼽아봅니다. 물론, 제가 청소년기에 심취하여 읽었던 책들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습니다.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지와 사랑]이란 제목으로도 번역)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좁은 문]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인간의 대지]
  펄 S. 벅, [대지]
  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레마르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노신, [아Q 정전] [광인일기]
  푸시킨, [대위의 딸]  
  바스콘셀로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알랭 푸르니에, [대장 몬느]
  볼프강 보르헤르트, [이별 없는 세대](소설), [문 밖에서](희곡), [가로등과 별과 시](시집)
  알베르 카뮈, {적지와 왕국}(단편집)
  어네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샬롯트 브론테, [제인 에어]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마르텡 뒤 가르, [회색 노트](대하소설 {티보가의 사람들}의 제1부)

  이런 책들을 읽기 바랍니다. 요즘 백일장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엉망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장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청소년들이 책을 너무나 안 읽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젊을 때 책을 읽어야 영혼의 자양분이 됩니다. 


  4. 책을 읽은 뒤에는 꼭 독후감을 씁시다. 

  독후감 쓰기는 초등학교 때도,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교에 가서도 줄기차게 써야 하는 과제입니다. 대학교에 가서 문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교양국어'를 대신한 과목들을 수강해야 하기 때문에 한두 번은 독후감이란 것을 써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후감만 요령껏 잘 써도 상장을 받을 수 있고, 국어 점수를 높일 수 있으며, 학점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대상 글짓기 학원과 방문 교사의 국어 수업이 독후감 쓰기 위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학 입시의 논술 고사라는 것은 지문을 이해하는 능력,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 정해진 분량으로 서론과 본론을 거쳐 결론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데, 독후감을 평소에 많이 써본 학생이 대단히 유리합니다. 독후감을 잘 써 선생님의 칭찬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후감 쓰기의 요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시험기간에 시험 대신 곧잘 독후감을 써 오라고 과제로 내줍니다. 

  저는 대학 재학시에 교직과목을 이수해 들었는데 거의 다 암기 과목이었습니다. 시험 전날 딸딸 암기하고는 졸린 눈으로 시험을 치르고 돌아서면 그 길로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한 저로서는 학생들에게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히는 독후감 쓰기로 시험을 대신하곤 하는데, 채점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학생 수가 많을 경우 끔찍한 양의 독후감을 모조리 읽어야 하는 고역이 따릅니다. 그리고 책의 해설이나 평문을 그대로 베낀 혐의가 있는지를 일일이 체크해야 하며, 컴퓨터를 이용하여 기존 자료나 몇몇 학우의 독후감을 교묘하게 편집한 것이 간혹 나오므로 이것도 체크해야 합니다. 

  책을 읽기는커녕 구하지도 않고 인터넷을 이용해 독후감을 아주 그럴듯하게 써내는 학생이 적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시험 대신 독후감 과제를 내주면 처음에는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책'이란 것을 읽는 일의 어려움 때문에 곤혹스러워합니다. 그만큼 책 읽는 훈련이 안 되어 있고, 독후감 쓰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탓입니다. 독후감 쓰기의 요령이 있는지 저 자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봅니다. 

  1) 독후감은 대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서두는 작자 소개이고, 작품의 줄거리가 본문을 점하고 있으며, 정작 본격적인 감상은 끝 부분에 소략(疏略)하게 나와 있습니다. 가장 나쁜 독후감입니다.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에 펼쳐놓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 책의 구입 경위, 몇 판째의 책인가, 어떤 출판사를 통해 어떤 사람이 펴낸(혹은 번역한) 책인가, 책의 장정은 괜찮은가, 그 책의 색다른 바는 무엇인가 등등을 비롯해 그 책에 관한 정보 가운데 아는 것이 있으면 서두에 몇 마디 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2) 작자 소개 및 줄거리 소개는 간단히 줄여 몇 마디만 합니다.

  3) 이상이 서론이고 본론에 들어가 이런 내용을 주로 씁니다. 
   ① 그 책을 통해 특별히 느낀 점이 있거나 감동을 받은 바가 있는가. 
   ② 내가 그 책을 읽는 동안 겪은 일이 있는가.
   ③ 그 책을 통해 내 생각에 어떤 변화가 왔는가.
   ④ 작품의 장점은 무엇이며 단점은 무엇인가. 
   ⑤ 작가의 다른 책과의 비교. 동시대 다른 작가와의 비교.

  4) 문단의 평가, 문학사적 의의, 당대적 의미와 후대에 끼친 영향력 등 그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져 있는지 조사해 첨부합니다. 

  대충 이런 흐름으로 독후감이 전개되면 좋습니다. 특히 독후감을 써 내려가는 중간 중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함으로써 그 독후감의 독자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으려 애써야 합니다. 독후감이란 일종의 책 안내문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책이라면 독자가 재미를 느끼게끔 써야 하고, 의미가 있는 책이라면 그 의미를 느끼게끔 써야 합니다. 남이 쓴 독후감을 읽은 독자가 그 책에 흥미를 느끼고 사보게끔 하지 않는다면 그 독후감은 실패한 글입니다.


  5. 내가 쓴 독후감 한 편―{대장 몬느}를 읽고 

  만 열아홉 살의 어느 저녁이었다. 나는 소설 {대장 몬느}의 마지막 문장----그리고 나는 외투 속에 딸을 싸 가지고 딸과 함께 어둠 속으로 새로운 모험의 길을 떠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을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밀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시청 맞은편에 집이 있어 산책 코스는 인근에 없었지만 나는 황혼녘의 인파 속에 휩쓸렸다. 소도시의 거리는 하교시간이라 시끌벅적했다. 나는 거의 정신이 없는 상태로 인파 속을 헤매고 다녔다. 한 권의 책이 나를 몽환의 상태로 몰고 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이후에도 이런 경험은 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가!

  ……다시, 다시 한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나는 젊으니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그 누구도 내 혼을 결박할 수는 없어. 몬느, 나도 한때 너처럼 미지의 세계에서 헤매었단다. 내년이면 성년이 되니 더 이상 가출을 시도하진 않겠지만 너는 또 떠나라고 하는구나. 꿈과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로 자꾸만 떠나라고 하는구나. 오, 모든 고뇌하는 청춘이야말로 얼마나 순결한가. 방황하는 청춘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그 나이에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또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 네 차례나 가출을 시도해 성장기의 몇 해를 학교도 다니지 않은 채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감동은커녕 다소 지루함을 느껴 도중에 책을 덮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탈출에의 욕구로 나를 사로잡은 주인공이기에, 번역이 워낙 잘 되어 있었기에(김치수 역)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읽었고, 결과는 남달랐던 내 청춘의 바이블이 되었다. '몬느'라는 주인공을 만들어내 방황하는 전세계의 젊은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일조각판 {불문학사}(김붕구 외 3인 공저)는 객관적인 문학사인데도 "알랭 푸르니에는 단 한 권의 소설을 남겼다. 그것이 불멸의 명작 {大將 몬느}이다"라고 운을 뗀 뒤, "그(작가)는 저 자신의 청소년기의 추억과 덧없는 사랑의 추억을 담아 사실적인 필치와 내적 체험에서 오는 서정이 조화를 이루며, 모험에의 유혹과 사랑의 불꽃, 그리고 소년기의 이상과 꿈이 현실에 부딪치는 환멸 등, 영원한 청춘의 기록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를 끌고 있다"고 열렬한 찬사를 바치고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27세의 나이로 전사한 청년이 남긴 단 한 권의 소설을 애당초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규정한 사람은 불란서의 유명한 문학사가 티보데와 랑송이었다고 하니 나의 감동이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왜 이 작품은 이런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나는 그토록 감동했던 것일까. 줄거리는 별것이 없는데.

  소설의 화자 프랑스와 쇠렐은 교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지방 학교의 학생이다. 이 학교에 오귀스땡 몬느라는 17세 정도의 모험심이 강하고 정신적으로 조숙한 학생(그래서 대장 몬느라는 별명으로 불리운다)이 전학을 온 뒤부터 쇠렐의 인생 여정은 일순간에 변모된다. 몬느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끝없는 모험을 동경함으로써. 몬느는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지명된 다른 학생에 앞서 쇠렐의 조부모님을 마중하려고 마차를 몰고 역에 나갔다가 길을 잃는다. 몬느가 빌려 타고 온 마차의 말은 처음 보는 마부가 방향 감각을 잃자 자기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달려 몬느는 뜻하지 않게 낯선 성곽에 당도하게 된다. 몬느는 고색창연한 영지(우리 나라로 치면 청학동 정도가 될 듯)에 묵으면서 신비로운 가장 무도회(그 영지에서 행한 결혼식의 피로연)에 동참하며, 거기서 한 여인을 첫눈에 보고 사랑하게 된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 신비로운 무도회가 열렸던 그 영지를 다시 가보려 애를 쓰지만 마을 이름을 알아두지 않았던 터라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성인이 되어 그 마을을 찾아 첫눈에 반했던 갈레라는 여인과 결혼도 하게 된다. 그런데 갈레의 불행한 오빠를 찾아오려는 또 한 차례 여행의 끄트머리에서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다. 쇠렐은 또다시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구원의 길을 찾아 떠날 젊은 날의 벗 몬느를 예감하는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몬느의 끝없는 현실 이탈욕,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열망,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 등이었다. 생각해보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이라는 사슬에 묶여 끌려다니다가 생애를 마감하지 않는가. 어렸을 때는 부모 혹은 학업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는 식솔 혹은 직업 때문에. 젊은 한때 불굴의 의지로 바람의 친구가 되는 사람은, 그 생애의 끝이 바람이 되는 것일지라도 얼마나 황홀한가.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상태로 성장기의 5년을 보냈지만 이런 아웃사이더들 덕분에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다. 비록 소설이지만 나와 조금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인물을 만나면 옛 전우라도 만난 듯 반가운 법인데, 몬느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코울필드와 더불어 내 방황의 길에 동행해준 고마운 두 친구이다. 몬느의 절규를 나는 임종을 앞둔 그 시간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쇠렐! 쌩뜨 아가뜨에서의 내 이상한 모험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너는 알지? 그것은 내가 희망을 갖는 이유였고 내가 사는 이유였어. 그 희망을 잃어버리고서 내가 무엇이 될 수 있겠나? 모든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 한번 파라다이스에 가본 사람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책을 읽지 않으면 영혼에 때가 낍니다. 21세기 한국 문학을 짊어지고 갈 청소년 여러분! 죽이고 부수는 게임의 늪에서 빠져나와 책을 읽기를 바랍니다. 

  ―<문학아>(2005년 하반기)

 

 

 

  ⊙ 발표일자 : 2005년09월   ⊙ 작품장르 : 문학강좌
  ⊙ 글 번 호 : 198372   ⊙ 조 회 수 :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