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땅의 연가

월정月靜 강대실 2006. 9. 27. 10:45
 
 


               땅의 연가

                           문   병   란

나는 땅이다
길게 누워 있는 땅이다
누가 내 가슴을 갈어엎는가
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

아픔을 참으며
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
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
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
가만히 스러지는 사람
농부의 때묻은 발바닥이
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

멋대로 사랑해버린 나의 육체
황토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
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
연한 잠 속에서
나의 씨앗은 새순이 돋힌다.

철철 오줌을 갈기는 소리
곳곳에 새끼줄을 치는 소리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새벽마다 연한 내 가슴에
욕망의 말뚝을 박는다.

상냥하게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
내 아픔을 밟으며
누가 기침을 하는가,
5천 년의 기나긴 오줌을 받아먹고
걸걸한 백성의 눈물을 받아먹고
슬픈 씨앗을 키워온 가슴
누가 내 가슴에다 철조망을 치는가

나를 사랑해다오, 길게 누워
황토빛 대낮 속으로 잠기는
앙상한 젖가슴 풀어헤치고
아름다운 주인의 손길 기다리는
내 상처받은 묵은 가슴 위에
빛나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다오!

짚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고무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군화가 짓밟고 간 다음에도
탱크가 으렁으렁 이빨을 갈고 간 다음에도
나는 다시 땅이다 아픈 맨살이다.

철철 갈기는 오줌소리 밑에서도
온갖 쓰레기 가래침 밑에서도
나는 다시 깨끗한 땅이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아픔이다. 

오늘 누가 이 땅에 빛깔을 칠하는가
오늘 누가 이 땅에 멋대로 線을 긋는가
아무리 밟아도 소리하지 않는
갈라지고 때묻은 발바닥 밑에서
한 줄기 아픔을 키우는 땅
어진 백성의 똥을 받아먹고
뚝뚝 떨어지는 진한 피를 받아먹고
더욱 기름진 역사의 발바닥 밑에서
땅은 뜨겁게 뜨겁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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