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고무신

월정月靜 강대실 2006. 9. 27. 10:38
 
 

              
               고무신

                         문   병   란

어느 노동자의 발바닥 밑에서
40대 여인의 금간 발바닥 밑에서
이제는 닳아지고 구멍 뚫린 고무신,
이른 새벽 도시의 뒷골목 위에서나
저무는 변두리의 진흙밭 속에서나
그들은 쉬지 않고 아득히 걷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쉬임없이 걸어온 운명,
존데만 딛고 온 고단한 발길 따라
캄캄한 어둠도 밟고 가고
끝없이 펼쳐진 노동의 아침,
타오르는 불길도 밟고 간다.

아득한 시간의 언덕 너머 펼쳐진
고향의 잃어진 논둑길을 걸어서
가물거리는 호롱불을 찾아가는 고무신,
두메산골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도
뿌듯한 중량의 눈물을 안고
그들은 어디서나 돌아오고 있다.

영산포 어물장 법성포 소금장
이 장 저 장 굴러다니다
영산강 황토물 속에 처박혀
멀뚱멀뚱 두 눈 부릅뜨고
한많은 가슴 썩지 못하는 고무신.

주인의 정든 발에 신기었을
또 하나의 고무신을 생각하며
그 주인의 발가락 사이
솔솔 풍기는 고린내를 생각하며
송송 구멍 뚫린 가슴 안고
빈 달빛에 젖은 양로원 뜨락.

선거 때 야음을 타고
구장 반장 손을 거쳐
살금살금 박서방 김서방을 찾아간
10문짜리 검정 고무신
민주주의의 유권이 되었던 자랑도
알뜰한 관록도 사라진 채
오늘은 구멍 뚫린 밑창으로
영산강 황토물이나 마시고 있구나.

오늘은 엿장수의 엿판에 실려
보이지 않는 땅으로 팔려간다,
뒷골목 쓰레기통에 누워 낮잠을 자고
허름한 변두리의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군화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윤나는 구두가 밟고 간 아스팔트 위에서
모진 학대 속에 짓밟힌 고무신,
기나긴 형벌의 불볕 속을
오늘은 절뚝이며 절뚝이며 쫓겨간다.

머슴의 발바닥 밑에서
식모살이 순이의 발바닥 밑에서
뜨겁게 뜨겁게 닳아진 세월,
돌멩이도 걷어차며 깡통도 걷어차며
사무친 설움 날선 분노 안으로 삭이고
변두리로 변두리로 쫓겨온 고무신.

번득이는 竹槍에 구멍난 가슴 안고
장성 갈재 넘어가던 짚신,
그 발자국마다 핏물이 고이는데
오늘은 구멍 뚫린 고무신이 쫓겨난다.

썩어도 썩어도 썩지 못하는 한많은 가슴,
땅속 깊이 파묻혀도
뻘밭 속에 거꾸로 처박혀도
한사코 두 눈 부릅뜨고
영영 죽지 못하는 恨
여기 벌떼같이 살아가는 아우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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