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곰내 팽나무

월정月靜 강대실 2006. 9. 27. 10:33
 
 



               곰내 팽나무

                                문   병   란

아직도 젊고 팽팽한 몸뚱어리에
푸른 가지를 죽죽 뻗치고
남해의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서 있는
곰내 팽나무

임진년 난리 때
이순신 장군의 노모 변씨와
그의 부인 방씨가
5년간 기거했다는 내력을 지니고
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
눈부신 유월 햇살 아래
그 미끈한 아랫도리 당당하게 서 있다

팽나무는 그대로
아름다운 조선 역사
그날의 내력 안으로 간직하고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두 팔 벌려
이 세상 사내란 사내 천하의 모든 수컷들을
죄다 삼키고도 모자랄 듯
천하의 햇살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서 있다

천하 장정들 다 오라
그 넉넉한 무당각시의 품을 열고
아랫도리 성한 왜놈들 한 부대쯤 모조리 삼키고
이 세상 남편과 자식 줄줄이 거느리고
그 수천 수만 개의 남근이 주렁주렁 매달리듯
저 용트림하는 장려한 나무의 풍만한 끼를 보라

내 나이 67새.
아직은 젊고만 싶은 수컷으로
열 오른 이마 가까이 다가가 접신하니
신의 계시일가. 내 뭄뚱이 속에
일진광풍이 회오리치고
내 어깻죽지 위에 이파리가 돋아나고
꿈틀거리는 아랫도리 속에 가지가 죽죽 뻗어
남해바다 용궁의 훈향내 한 줄기 풍겨나면서
유월 한낮의 눈부신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오 싱그러워라, 춤추는 곰내 무당각시나무
눈부신 역사의 오르가즘이여.

곰내(熊川): 현재 여수시 웅천동 송현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노모와 부인이 5년간 기거한 곳인데 
  수백년 묵은 팽나무가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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