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2008년 신춘문예 당선작

월정月靜 강대실 2008. 1. 10. 09:47
2008년 신춘문예 당선작
글쓴이 : 회색아이 조회수 : 1608.01.06 16:32 http://cafe.daum.net/winterjack/MocE/396주소 복사
2008년 신춘문예 시․시조․동시 당선작 모음집

1. 문화일보 시: 하모니카 부는 오빠/문 정(진안출신)………………………………2
2. 전북일보 시: 오리 떼의 겨울/이지현 ………………………………………………3
3. 전북중앙신문 시: 명함(가작)/김지고. 경건한 설거지(가작)/노기민 …………4
4. 광주일보 시: 구두 수선공/최일걸(진안출신)………………………………………6
5. 국제신문 시: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이 언 ……………………………8
6. 국제신문 시조: 서울 황조롱이/김춘기………………………………………………9
7. 대전일보 시: 책장 애벌레/이종섭……………………………………………………10
8. 매일신문 시: 파문/이장근 ……………………………………………………………11
9. 매일신문 시조: 눈 속의 새/황성근 …………………………………………………12
10. 전북도민일보 시: 바람의 일/공인숙 ………………………………………………13
11. 부산일보 시: 예의/조연미(전북출신)………………………………………………14
12. 한국일보 시: 차창 밖, 풍경 빈 곳/정은기 ………………………………………15
13. 한국일보 동시: 재개발 아파트/김영미 ……………………………………………16
14. 조선일보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유희경…………………………16
15. 조선일보 시조: 염전에서/김남규……………………………………………………18
16. 조선일보 동시: 봄 길/김영민 ………………………………………………………19
17. 경향신문 시: 페루/이제니……………………………………………………………20
18. 동아일보 시: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이은규 …………………21
19. 동아일보 시조: 천수만 가창오리/김종열 …………………………………………22
20. 영남일보 시: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조혜경……………………23
21. 한라일보 시: 오월의 잠(가작)/김은실 ……………………………………………24
22. 서울신문 시: 가벼운 산/이선애 ……………………………………………………25
23. 세계일보 시: 너와집/박미산…………………………………………………………26
24. 강원일보 시: 소라의 집/김정임 ……………………………………………………27
25. 강원일보 동시: 자전거와 장갑/신지영 ……………………………………………28
26. 무등일보 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박문혁………………………………………29
27. 경인일보 시: 꽃신. 비/김소연………………………………………………………30
28. 동양일보 시: 낡은 의자/양호진 ……………………………………………………31
29. 경남신문 시: 대추나무/김일호………………………………………………………32
30. 경남신문 시조: 마중물/이남순………………………………………………………33
31. 전남일보 시: 대동여지도/조다윗……………………………………………………34
32. 경남일보 시: 여자의 풍선/오자영 …………………………………………………34
33. 경남일보 시조: 염전에 들다/조연옥 ………………………………………………35
34. 농민신문 시: 가족/조성식……………………………………………………………36
35. 농민신문 시조: 오래된 벽/강혜규 …………………………………………………37
36. 불교신문 시: 그 흰 빛/박지선………………………………………………………37

       진북문화의 집 ‘열린시창작회 시창작교실’ 교재
    2008년 신춘문예 당선시 모음집

(1) 문화일보 당선 시-하모니카 부는 오빠/문정(본명:문정희. 진안출신)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나는 지명에 대해,
오빠의 등에 삐뚤빼뚤 눈초리와 입술들을
붙여놓은 담장 안쪽 사람들은 모르죠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바람처럼
나를 훅 뚫고 지나간다는 것도 모르죠
검은 줄무늬 교복치마가 펄렁, 하고 젖혀지는 것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죠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이
밤이면 우리 집 평상 위에 뜨죠
오빠가 공장에서 철야작업 하는 동안
별들도 나처럼 자지 않고 그냥 철야를 하죠

<심사평> 고통을 긍정으로 극복하는 힘 돋보여

최종심까지 논의된 작품은 김강산의 '천렵', 김연아의 '밤의 지평선 아래', 김중곤의 '불알을 끼우며', 문정의 '하모니카 부는 오빠' 등 4편이었다. 이 중 '천렵'은 천렵의 의미가 은유화 되지 못하고 극히 식상하다는 점에서, '밤의 지평선 아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힘이 약하다는 점에서, '불알을 갈아 끼우며'는 해학적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산문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각각 제외되어 자연히'하모니카 부는 오빠'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당선작'하모니카 부는 오빠'는 현실적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고도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데에 큰 장점이 있는 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아픔으로 느끼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나 힘 같은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미덕이 있는 시다. 그래서 이 시는 전반적으로 화사하다. 그렇지만 그 화사함이 추하거나 가볍지 않고 따뜻하고 정답다. 진솔하고 꾸밈 또한 없다. 마치 한 소녀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꿈과 희망의 속삭임을 듣는 것 같다. 현실 인식의 시들이 대체로 부정적이고 어두운 데 반해 이 시는 긍정적이고 밝다. 캄보디아에서 온 한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삶 속에 있는 '킬링필드'의 고통조차도 모성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 앞으로 큰 시인으로 성장해나가길 기대해본다.                                                  심사위원 : 오세영․정호승

(2) 전북일보 당선 시 - 오리떼의 겨울 / 이지현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 떼가 함께 날아 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 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심사평> 시문학의 양산, 빈곤한 시대의 역설

시대는 참으로 수상하다. 사람됨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물질의 위력과 현실 의제에 밀려나는 형국이니 어찌 수상타 하지 않으리오. 사람됨의 최소한의 덕목들이 정신의 가치로 승화되지 못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정신․문화적 가치가 황폐한 시대일수록 이를 안타까워하고 이를 정신력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욕구는 더 뜨거워지는 것인가? 올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품 수가 모두 1351편에 이르렀다. 양적인 수확에서 기록적이며, 각 작품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정신의 치열성에서도 기대에 값하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0여 분의 응모자들이 투고한 30여 편이었다. 이희정의 '기억의 성지'는 시적 완결성에서는 일정한 구성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흡하다는 데서, 원창훈의 'FTA'는 현실을 조응해 내고 이를 시적 어법으로 형상화하는 시력은 확인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시적 긴장도가 처진다는 데서, 이혜숙의 '빌딩'은 소재가 주는 비인간성의 측면을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으나 시정신의 참신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데서 심사자들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지현의 '오리떼의 겨울'은 일단 정통적인 시 수업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는 데서 안정감을 주었다.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해 구축해 내는 이미지들이 여타 응모작들에 비해서 참신하였으며, 소재를 응시하는 서정으로 시의 의미 맥락을 담아내는 솜씨를 인정하면서 최종 당선작으로 삼았다.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나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등의 아름다운 의미나 참신한 표현은 시 수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시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사족 하나. 응모자들이 서너 편의 응모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올린 시보다 그 다음 장의 시들에 호감이 가는 시가 많았다. 야구선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홈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시도 그럴 것이다.

(3) ①전북중앙신문 가작 시 - 명함 / 김지고

당신이 떨구고 간 가을이 불쑥 명함을 내밀었다
건물과 그림자 사이를 내통하는 햇살 아래
찢어질 듯, 겨드랑이 날개로만 살아가는
회색의 떨켜1)에서 떨어진 가랑잎, 나비
서리맞은 꽃술에 시든 빨대를 꽂는다

고치의 하루 일없어 우화등선 봐둔 걸까 온통 전면이 당신의 노오란 풍경으로 떠 있다 꾹꾹 눌러 박은 근엄한 문자의 씨알들, 막 튜닝2)을 끝낸 줄에서 튕겨 나온 듯 말짱한 얼굴로 앉아 있다 세상은 넓다란 꽃밭이다 팔랑팔랑 시궁창 내를 건너 궁창에 올라 춤을 춘다 꽃이 흔들리고 꽃밭이 흔들린다 쓰디쓴 꿀맛의 밥상에는 일용할 비구름 시럽과 눅눅한 햇살 조금이다 높은음자리 찾아 골목골목을 누비다 그만, 어둑살에 주저앉는다 당신의 차가운 손끝에서 한번쯤 다시 새겨 넣어도 좋았을 고도의 추락 문득, 하늘마저 가볍다 바람을 태워 활처럼 휘어져 가는 날갯죽지 뒷면은 가랑잎이다 무반주의 어머니 신음소리가 찍혀 있는 잎맥이다 생의 가장자리에는 어릿어릿 졸음만 남아

당신의 가랑이 사잇길 같은 봄날
그만 놓쳐 버린 나비의 슬픈 눈을 보았는가
아직도 층층이 가랑잎을 매단 나무 아래
더 이상 존재를 알릴 필요 없이
수직으로 착지한 날개에 고요의 무늬가 찍혀 있다

* 1) 떨켜 : 잎이 떨어지지 전 잎자루에는 떨켜가 만들어지는데, 떨켜가 만들어진 곳을 경계로 잎이 떨어지며, 떨       어진 곳에는 병균등이 들어오지 못하고, 물이나 양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코르크층이 만들어진다.       모든 식물이 떨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 2) tuning : 악기의 音高를 바르게 조율하는 일.

②전북중앙신문 가작 시 - 경건한 설거지 / 노기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안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방 안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나의 찌꺼기를
바라 볼 수 있었다.

굳게 두 손을 맞잡고, 결을 따라
일(日)을 문지르고, 시(時)를 문지르고
분(分)을 문지른다
거품이 나고 후회가 들고
씻겨나가고 결심을 해도
그래도, 닦이지 않는 얼룩.

아, 나에게도 세척기가 있다면!
일정한 습도와 온도에서
나는 젖어졌다가도 금세 물기 없이
말라지고, 오랜 시간 물에 담겨져
불려지지는 않을 테니.

아니다  
제 스스로도 닦을 수 없다면
그것이 온전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심사평>
운문분야에 응모한 작품은 200여 편이다. 작년의 편수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든 숫자이다. 투고자들의 호응도가 낮은 반면에 응모작의 예술적 성숙도는 작년에 비해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식의 구분 없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네 사람의 투고 작품을 본선 심사대상으로 삼았다. 고선례의 '낙타 등' 외 2편, 김지고의 '명함' 외 2편, 노기민의 '경건한 설거지' 외 4편, 임해야(필명)의 '앵무새의 꿈' 외 4편이 그것이다. 각자 투고한 3-5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숙고를 거듭한 결과 결선대상을 두 명의 응모작으로 압축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별 투고 작품의 전체 수준, 둘째 이미지의 활용과 상상력의 전개 등 예술적 형상화 능력, 셋째 신인으로서의 도전정신과 참신성 등이다. 노기민과 김지고의 작품들이 임해야와 고선례의 그것들보다 상대적인 우위성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명함' 외 2편은 소재를 다루는 솜씨나 그것에 대한 시적 발상에서 독특한 감각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건한 설거지' 외 4편은 메시지의 전달에서 호소력 있게 다가온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기민은 '설거지'라는 소재를 통하여 '수신(修身)'이라는 인간사(人間事)의 중요한 문제에 접근해 간다. 그것은 세척기에 그릇을 씻는 것처럼 󰡒�닦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마음'과 관련된 일이다. 사소한 생활 속의 소재에서 의미심장한 삶의 어떤 측면을 관찰하여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그러나 󰡒�생(生)을 낳기에 아직 많이 어린󰡓�('탄생') 노기민의 작시법은 기성 문인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신인으로서의 자기스타일과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김지고의 작품은 사변적(思辨的)이거나 관념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시적 의미를 포착하기가 어렵다.󰡒�검버섯꽃 환하게 펼쳐든 불안(佛顔)󰡓�([불안의 거처])이나 초강력 접착제인 '쥐포수'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그렇다. '쥐포수'나 '불안의 거처'에 의미가 부재(不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심주제가 모호하거나 분산되는 것은 메시지의 전달이나 독자의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장애 요인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김지고는 노기민과 대조되는 개성과 창작스타일을 보여준다. 노기민은 '비밀'이나 '땀'의 경우처럼 패기가 부족하고 기성문단의 조류에 편승하는 경향이 있다. 김지고는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도전정신이 충일하다. 그의 작품 또한 참신한 느낌을 준다.󰡒�생의 가장자리󰡓�에 어릿거리는 ‘노오란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 󰡐�명함󰡑�이 그러한 예이다. 시 예술의 과녁을 겨냥하여 언어를 날렸던 무수한 인고의 세월이 󰡐�명함󰡑�처럼 건네진 󰡐�가을낙엽의 이미지󰡑�에 각인되어 있다. '명함'과 '경건한 설거지' 중 어느 한 작품을 탈락시키기가 난감하다. 각각 작품이 지닌 미덕과 단점이 뚜렷이 대비된다.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두 작품을 결정했다. 노기민과 김지고 당선자들에게 정진의 자세를 당부하면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 전정구, 전북대 교수

(4) 광주일보 당선 시- 구두 수선공 / 최일걸(열린시창작회원. 진안출신)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를 놓는 길과 걸음이 구두를 망가뜨린다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걸음과 길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기 전에 그는 먼저 숨을 고른다
쉼 없이 구두 뒷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길,
막바지로 구두를 몰아세우는 걸음걸음,
그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길도 걸음도 아니었다

구둣방 선반 위에서
번득이며 광휘를 뿜어내는 구두가
시치미를 떼고 돌아앉는다
그는 어긋난 길들을 구두에서 삭제하고는
도톰한 밑창으로 새로운 길을 포장한 다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한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굽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못이 박힌 손으로 나달나달 떨어진 날들을 깁는
그는 차츰 지워지고 실밥이 그를 대신하여
툭툭 삐져나온다

보행을 손보는 일은 손님의 몫이지만
그는 시선을 곧게 펴서 손님의 종종걸음을 떠받친다
그의 뼈마디가 시큰거리다가 어긋난다

<심사평> 꼼꼼한 관찰․묘사 시적 가능성 충분

올해는 응모작이 줄어서인지 본심에 올라온 16명의 작품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수준이 다소 떨어진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 중에서 정영희, 김효준, 최일걸 등의 작품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영희의 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되고 날렵한 반면, 의미구조가 취약하거나 모호한 게 흠이었다. 구체적 언어와 추상적 언어를 교직하는 것이 일종의 낯설게하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지만, 정영희의 시에서는 그 연결이 순탄치 않거나 진술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패닉의 바다', '소나무역'처럼 유니크하고 일정한 스케일을 지닌 시를 결국 내려놓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적인 새로움이란 표현의 참신함뿐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확장되는 의미의 깊이에서 온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그에 비해 김효준의 시는 다소 거칠지만 시상을 밀고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박쥐의 서곡', '구름공장', '닭' 등 가족의 고단한 삶을 동화적 비유나 우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김효준의 시들은 간명하고 발랄한 대신 시적인 복합성이나 여백을 잃어버리기가 쉽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소재의 폭을 넓히고 상상력을 좀더 다채롭게 변주할 수 있다면 좋은 시인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당선작으로 뽑은 최일걸의 시들은 강렬하지는 않아도 꼼꼼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 대상을 인상적으로 각인해낸다. 묘사 중심의 시들이 지닌 답답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답답함을 극대화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인 '구두 수선공'에서도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읽어내는 그의 시선은 작은 움직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이라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그 외에도 정육점, 후미진 골목 등 변두리적 삶의 풍경들을 주로 보여주는 그의 시들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칼날을 지니고 있다. 당선을 계기로 그 칼날이 더 예리하고 정확하게 삶의 어두운 환부를 베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심사 : 나희덕․이문재

(5) 국제신문 당선 시 -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 이언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 년이 정해 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를 갈아 끼우는 사이
농염1)의 판타지2)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 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3)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4)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 1) 농염 : 화사하리만큼 매우 아름다움.
* 2) phantase(독). 환상곡. 판타지 fantasy(영)
* 3) 마농꽃 : 달래의 제주 방언, 샤프란
* 4) decadencn(프), 반사회적, 퇴폐적인 것. 19세기말 퇴폐예술 운동

<심사평> 탁월한 언어 솜씨와 거침없는 상상력의 힘

400여 명의 시 1800편을 읽으면서, 여전히 한국시의 지층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인도 많지만 아직도 시인 지망생도 많음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시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전통 서정시의 큰 흐름을 넘어서는 실험적 시도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시의 수준은 상당히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패기만만하면서도 신인으로서의 놀라운 역량을 엿보게 하는 발군의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김진의 '달, 멈추다', 김미혜의 '몽유', 김정의 '숨쉬는 고서점', 이언지의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등은 최종 논의 대상 작품으로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달, 멈추다'는 설화적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발상 자체는 살만 했지만, 그 현재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화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 한계가 보였다. 시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이란 점을 새삼 환기시켜 주었다. '몽유'는 예민한 감각을 통한 이미지화나 새벽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시선은 좋으나, 시어 선택에서 아직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를 창출하는 힘이 모자랐다. 시인은 일상어를 자기 언어로 새롭게 전환시켜 가는 힘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숨쉬는 고서점'은 활달한 시적 상상력의 전개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그 상상력을 밑받침해줄 수 있는 이미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는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언어유희에 가까울 정도로 능수 능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낼 듯하면서 감추며, 감출 듯하면서 드러내는 암시적이며 은유적인 시적 전개와 거침없이 펼쳐 가는 상상력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적 수준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전원은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문정희․남송우․정일근

♡ 국제신문 당선 시조 - 서울 황조롱이 / 김춘기

비정규직 가슴속에 안개비가 내리는 밤
여의도 길 전주 한켠 둥지 튼 황조롱이
옥탑 방 살림살이가 긴 병처럼 힘에 겹다

산 능선 너럭바위에
건들바람 불러모아
풋풋한 날개 저어
억새 탈춤에 신명나면
제일 큰 나무에 올라
흐벅진 몸 곧추세우던 너

오늘은 밤섬에서
찢긴 비닐 비집고는
마포대교 어깨에 앉아
북악산 여름 숲으로
건듯 날아오르는구나

순환선 철길 위를 에도는 내 발자국
휴대폰에 떠오르는 눈빛 모두 잠재우고
물소리 푸른 강가에서 시계 풀고 살고 싶다

<심사평> 4연 작품의 구성과 긍정적 삶의 자세 돋보여

최종심에 다섯 편이 올랐다. 강원도 이영신의 '동강사설', 부산 변경서의 '가을과 겨울 사이', 경주 김희동의 '풍경 울다', 광주 이상선의 '아침, 수산시장', 경기 김춘기의 '서울 황조롱이'다. 모두 연시조 작품으로 4연 구성 2편과 3연 구성 3편이었다. 언어 감각, 표현력, 이미지 처리 능력, 가락의 유연성에 있어 열심히 쓴 작품이었으나 연과 연 짜임의 필연성이 부족한 것 같았다. 당선작 '서울 황조롱이'는 4연 작품의 구성이 돋보였고 시인의 감정을 황조롱이에 이입하여 현실 문제를 아프게 조명하였으며 현대 시조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고 자연 속으로 돌아가 일상사의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긍정적 삶의 자세가 돋보였다.                                 심사: 전치탁, 정해송

(6) 대전일보 당선 시 - 책장애벌레 / 이종섭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나무의 이음새마다 박혀있는 나사못
숨쉬기 위해 열어놓은 십자정수리를 비틀면
내장까지 한꺼번에 또르르 딸려 올라오고
허물처럼 남아있는 벌레의 집에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붙어있는 것들을
대여섯 마리씩 잡을 때마다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책장의 근육들
바닥에 납작 주저앉을 무렵엔
한 줌 넘게 모인 애벌레가 제법 묵직했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물고
깊은 잠을 자야했던 동면기가 끝나면
훨훨 나비가 되어 숲 속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책장이 늙어버린 탓에
애벌레만 집을 잃고 말았다
꼼지락거리는 것들 땅바닥에 던져버리려다
회오리돌기가 마디마디 살아있어
공구 함에 보관해둔다
상처도 없고 눈물도 없으니 언젠가는
다시 나무 속에 들어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밤만 되면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소리
나무의 빈 젖을 물고 싶어 오물거리는 소리
고아원의 밤이 깊어간다

<심사평> 독특한 상상, 개성 돋보여
  
결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은 작년보다 높았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나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려고 노력한 점등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일정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신춘문예 투고작들이 종종 그렇듯이 요설로 인해 불필요하게 글이 길어진 작품이 많다는 점, 그리고 개성적인 작품이 드물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중에서 다섯 사람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흑백필름'은 착상의 신선함에서, '털과 향로'는 섬세한 언어구사에서, '졸참나무 숲'은 주제를 추구하는 힘에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약간씩의 결점도 가지고 있어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과 '책장애벌레'를 놓고 꽤 오랜 시간 숙의하였다.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추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다. '그녀의 집'의 지은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양한 시어를 자유롭게 엮어 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아이를 길러내는 여인을 토마토 나무와 연결하여 건강성을 추구한 짜임새 있는 전개가 좋았다. '책장애벌레'는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낡은 책장을 부수는 과정을 담은 이 시는, 해체된 책장 자체보다 책장을 지탱하였던 나사들에 주목하였다. 나무를 물려 책장을 구성했다가 할 일을 잃은 나사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표현한 이 시는, 이 시대에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을 우회적으로 전달한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시적 표현의 세련미보다는 개성 쪽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책장애벌레'는 생생하고 힘이 있어 감동을 창출하는 데 좀 더 강했다. '그녀의 집'도 당선작이 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좌절하지 말고 좋은 시를 쓰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양애경

(7) 매일신문 당선 시 - 파문 / 이장근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한강에 투신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은
여자를 결과로만 받아들였다

파문을 일으키며 열리고 닫히는 문
물은 떨어진 곳에 과녁을 만든다
어디에 떨어져도 적중이고 무엇이 떨어져도 적중이다
투신한 죽음도 다시 떠오른 삶도
물은 과녁을 만들어 적중을 알렸다

적중을 알리며 너는 왔다
온몸에 파문처럼 돋던 소름
빗나간 너의 말도 떨어지는 족족 적중했다
사랑처럼 민감한 것이 또 있으랴
이유 없이 떠나도 결과는 적중이었다

이유 없이 너는 가고
나는 안개 같은 거짓말로 너를
미워했다, 그리워했다, 지웠다, 썼다
사랑처럼 가벼운 것이 또 있으랴
구름이 되어 제멋대로 문장을 만들다
지치면 낱 글자가 되어 떨어졌다

지금도 비가 온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밤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투신할 것인가, 투신하는 족족
파문을 일으키며 적중할 것인가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서른 분의 작품을 다시 검토해 본 결과 남은 작품은󰡐�황소‘󰡐�아가리 마을‘󰡐�가야동 계곡’󰡐�아스팔트 칸트‘󰡐�입이 없는 비평’󰡐�나무별똥‘󰡐�불안의 거처’󰡐�일획‘󰡐�마네킹’󰡐�소금밭의 기억‘󰡐�바늘’󰡐�파문‘󰡐�토마토󰡑�’등피를 닦으며’ 등이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신춘문예의 특성상 새로운 것에 천착한 나머지 일부러 문장을 비틀고 기발한 착상에 몰두해 난삽한 기교의 과잉에 의한 억지가 많았다. 비튼 문장이나 발상이 독특한 감각으로 살아나 신선한 감동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감수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표현하기까지의 데생의 기초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시단의 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 난해한 아류의 것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새로움도 있고 표현의 신선함을 주는 작품으로󰡐�일획‘󰡐�마네킹’󰡐�소금밭의 기억‘󰡐�바늘’󰡐�파문‘󰡐�등피를 닦으며󰡑�등을 들 수 있었다. 작품 하나 하나 놓고 볼 때 모두 독특한 포즈를 지니고 있어 오래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이 모두 고르다는 점에서 이장근의 󰡐�파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파문‘은 자칫 통속적으로 떨어질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독특한 시적 비전에 의해 삶의 진지성과 감동을 주는 데 효과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지닌 삶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더 깊은 비전에 천착해 좋은 작품을 생산하길 바란다.               심사 :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정호승(시인)

♡ 매일신문 당선 시조 - 눈 속의 새 / 황성곤

광년을 달려와 빛이 된 투명한 새
망막에 앉은 기억, 때늦은 아픈 고백
이른 봄
번갯불 튄 그대 스르르 한 점 불이었던

빅뱅의 환상이거나 눈부신 기록이었을
이별 뒤 하얀 여백 지울 수 없는 허공 같아
가락지
흰 원을 걸어 필생의 울음 가둔 걸까

수축하는 잔등, 달이 팽창하는 저 언덕
환각처럼 눈 속의 새 쪼그려 앉아있는데
우수수
눈망울 털어 내면 겨울 그 후, 빈 고요

<심사평>  
최종까지 거론된 이들은 황성곤, 유현주, 박해성, 박선미, 최재남, 박미자 등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황성곤의 '눈 속의 새'는 특이한 시적 언술 방식을 보인다. 그가 함께 보낸 다른 세 편들도 그런 점에서 이채롭다. 범상치 않은 언어 운용으로 읽는 이의 눈길을 끌어당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력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랜 시력에서 기인된 바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와, 세계와 자아의 교호 속에 어떻게 언어가 제대로 된 개성적인 이미지를 빚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공정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기량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심미적 재현을 성취하고 삶의 원리를 비밀스럽게 드러내는 이러한 형상 능력은 다른 많은 응모작들의 가장 앞자리에 세우기에 모자람이 없다. 또한 엄정한 정형 형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으면서 시상을 자유자재로 전개하는 활달한 수사법이 담긴 내용과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신뢰를 더한다. 형식을 부리는 능력을 웬만큼 갖추고 있으나, 그리 놀랍지 않은 일상사를 평이하게 그리고 있는 점은 적잖은 응모자들에게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또한 상당한 수련의 흔적이 엿보임에도 끝까지 한 호흡으로 끌고 가지 못하거나, 참신한 발상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띈다. 표피적 묘사를 넘어서서 대상의 본질적인 국면을 관통하려는 상상적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일에 힘을 기울일 때 고유의 형식과 결합하여 보다 밀도 높은 언어 예술적 성취가 가능할 것이다. 이 점은 당선자나 모든 응모자들이 함께 되새길 일이다.                    심사 : 이정환(시조시인)

(8) 전북도민일보 당선 시 - 바람의 일 / 공인숙

오랫동안 바람을 사랑했습니다
바람만큼 외롭고 쓸쓸한 건 이 지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들녘에서, 포구에서, 노을 비껴 가는 강가에서도
언제나 안녕하며 내 마음을 쓸어줍니다
바람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다만, 살구꽃이 눈부신 날
할머니 무릎베개에 옛 이야기 듣는
아이의 눈꺼풀을 힘겹게 하는 것도,
깊은 우물 속 맑은 물 위에
꽃잎의 연서를 날리는 것도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오게 하는 것도
다 바람의 일이지요
또한 종아리가 유난히 예쁜 산골 계집아이의
상고머리를 산당화의 향기로 흔들어 주는 것도
바람의 일이고요
길섶에 피어난 쑥부쟁이의 꽃대를
한두 번 흔들어 보기도 하다가 그저 슬몃...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 빗물을 바다로 보내
파도를 보며 영혼을 키우는 누군가에게
한 점 살이 되게 하는 것도
바람의 일일 겁니다
수 없는 바람이 수많은 별이 될 때까지
바람을 사랑하겠습니다

<심사평> 자연친화 인간생활 친근감 있게 표현

공인숙의 시 ‘바람의 일’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작품 속의 시인의식이나 언어의 선택과 표현이 더 신선했으면 좋은 시가 되었을 것이다. '바람의 일'은 바람을 의인화하여 그가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을 일상의 자연환경친화 인간생활과 연관지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심사 : 이기반  

(9) 부산일보 당선 시 - 예의 /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 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심사평> 상투성 벗어난 신선한 가능성

뽑는 이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김중곤의 '소금밭의 기억', 조연미의 '예의' 두 편이다. '소금밭의 기억'은 녹록지 않은 시력으로 다져진 단단한 틀거지를 지녔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라는 다소 낯익은 글감에 대한 흔치 않은 상상적 투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작품 세부까지 충분한 제어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열아홉 줄에 걸친 한 편 시 속에서 '하얀'이라는 수식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응모자는 곰곰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조연미의 '예의'는 '소금밭의 기억'에 견주어 단연 신선하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지닌 역량도 만만찮다. 사소한 일상을 결코 범상하지 않게 다듬어 내는 솜씨가 고르다. '예의'는 나와 타자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따뜻하면서도 곡진하게 끌어안은 작품이다. '창'과 '벽'으로 표현되고 있는 경계를 축으로 그 너머 세계와 합일을 꿈꾸는 상상적 줄거리는 가벼운 반어적 기슭까지 닿아 있다. 아직도 시가 우리 둘레에서 위안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가 됨직한 작품이다. 게다가 '몸의 뜨거움으로/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와 같은 빛나는 깨달음까지 얻고 있음에랴. 뽑는 이들은 상투형을 벗어난 '예의'의 신선한 가능성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어 당선작으로 민다. 모름지기 오래 기억될 시인으로 거듭나기 바란다.                 심사 : 황동규, 박태일, 최영철

(10) 한국일보 당선 시 - 차창 밖, 풍경 빈 곳 /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 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 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뜯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들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 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여,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심사평> 언어적 감수성, 말 걸기의 새로움 번뜩

시는 말 걸기다. 시적 대상에게 말 걸기. 하지만 여기에서 그친다면 아직 시가 아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결국 독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다. 시는 대화다. 그러니 시적 대사와의 대화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독자와의 대화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춘문예 시는 개성적인 대화 능력을 선별하는 과정이다.
당선작 <차창 밖, 풍경의 빈 곳>는 삶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차원에서 뛰어나다. 도입부도 참신하다. 정은기의 언어적 감수성에 점수를 주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새로움이 독자와의 신선한 대화로 이어진 것이다. 10년, 20년 뒤 누가 더 좋은 시를 쓸 것인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심사 : 정호승, 이숭원, 이문재  

♡ 한국일보 당선 동시 - 재개발 아파트 / 김영미

날마다
옥수수 이 빠지듯
불 꺼진 창이 늘어간다

관리실 아저씨는
떠나간 집마다
커다랗게 검은색으로
×를 그린다

이제 통로엔
딱, 우리 집
하나 남았는데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날마다
조바심하는 엄마

처음으로
나는 커다란 ×를
받고 싶었다.

<심사평> 대상 바라 보는 따스하고 진지한 시선

이번 투고된 작품은 모두 680편이었다. 작품 수로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으나 생각 외로 이렇다 할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안이한 동요적 발상에 기댄 작품이 많았고, 전반적으로 기존 동시의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다. 일차로 완성도와 참신성에서 비교적 점수를 줄만한 작품 10편을 골랐다. 그 10편을 놓고 머리를 맞댄 결과 최종 세 편이 가려졌다. <바지랑대와 빨랫줄> <경운기 소리> <재개발 아파트>가 그것이다. <바지랑대와 빨랫줄>은 바지랑대와 빨랫줄이라는 사물을 통해 삶의 지혜를 건네주는 솜씨가 남다른 작품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재가 요즘 아이들의 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경운기 소리>는 자연스러운 의성어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경운기 소리를 적절한 시늉말로 실감나게 표현한 점이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함께 보내온 작품들은 비슷한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재개발 아파트>는 무거운 현실을 어린이의 눈높이로 자연스럽게 풀어낸 작품이다. 새로운 시적 발견인가 하는 점에서는 다소 주저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고 진지한 점이 돋보인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역시 일정한 수준을 갖추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리는데 합의했다. 자신의 장점을 더욱 갈고 닦아 아이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시를 많이 보여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안학수, 김제곤

(11) 조선일보 당선 시-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심사평> 몰개성의 시대, 눈에 띄는 참신함  
예심을 거친 20명의 응모작들 가운데 이연후 씨의 ‘우니코르‘, 이서 씨의 ’고래자리’, 최수연 씨의󰡐�누에의 잠‘, 유희경 씨의󰡐�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정도가 최종심 대상작으로 언급할 만하다고 여겨진 작품들이다.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보면 한 시대의 사회적 징후가 집약된 듯한 목록들을 읽을 수가 있다. 그 목록들이란, 최근 수년 동안 뭉쳐져 있는 경향이어서 어지간해서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역시 현저히 즉물적이다는 것, 다분히 자폐적이다는 것, 몰개성적이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특징들이 나쁘다, 좋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요는 이런 특징들을 가지되 응모작들이 스스로를 한 편의 시로 ’성립’시키고 있는가를 가려내는 것이 우리 심사자들이 할 일이었다.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갖는 조건, 즉󰡐�시의 기본’을 모른 채 시 비슷하게 써서 시라고 우기는 것 같은 수많은 위조품들을 읽어야 하는 심사자의 고역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물적이다는 것은 사물을 주절이, 주절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헤프게 낭비하는 것, 동어 반복하는 것은 시에서는 범죄일 수 있다. 또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넌센스의 나열이나 실패한 은유들을 가지고 시의 특권이라고 오해하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많은 투고작들이 어쩜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는데 이 개성의 표준화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할까? 위의 네 편 최종심 대상작들도 이런 지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를 시로 성립시키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최수연 씨, 유희경 씨의 두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최수연 씨가 시를 다루는 데 더 유연해 보이는 점이 있지만 유희경 씨가 상대적으로 더 참신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선자는 앞으로 한 권의 시집으로 자신의 시인됨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심사: 황지우․문정희

♡ 조선일보 당선 시조 - 염전에서 / 김남규

오늘도 서산 댁은 낮은 바다 막고 선 채
뒤축의 무게로 새벽 수차를 돌린다
바람은 빈 가슴 지나 먼 바다를 일으키고

지친 오후 밀어내고 살풋 잠이 들자
잠귀 밝은 수평선 해류 따라 뒤척이며
뒤틀린 창고 이음새, 덴가슴도 삐걱인다

남편은 태풍 매미에 귀항하지 못했다
소금기 절은 목숨 몇 잔 술로 달랠 때
눈시울 노을로 번져 잦아드는 썰물빛

설움으로 풍화된 닻 말없이 내려두고
무명의 소금봉분, 메다 꽂힌 삽자루여
가슴엔 뱃고동 소리 야윈 달이 차오른다

<심사평> 빈틈없는 구성… 시적 감도 높여 주어  
새벽의 언어를 캐기 위하여 밤을 밝혀온 생각들이 시조의 높은 가락을 뽑아 올리고 있다. 신춘문예의 벽을 오르기 위해 모국어의 틀 속에서 오늘의 삶을 깎고 다듬는 손길들이 섬세하고 맵짜다. 더욱 반가운 것은 응모작품들이 거의 고른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음이다. 시조가 지니고 있는 시적 구성요소를 잘 체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자재롭게 글감을 찾고 거기 맞는 가락을 짜내는 일에도 능숙한 작품들이 많았다. ‘염전에서‘, ’눈 속의 새’, 그 해 겨울 갯벌에서(송이나), ‘감나무 합창‘, 풀씨 이야기’, 겨울 쑥부쟁이‘(임채성) 등이 마지막까지 밀고 당기었다. ’눈 속의 새’는 새 맛내기로는 단연 앞섰다. 그러나 관념의 과잉이 의미의 실상을 보여주는 데는 미흡했다. ‘그 해 겨울 갯벌에서’는 우선 제목이 주는 추상성이 걸린다. ‘그 해 겨울’이면 ‘갯벌’의 지명도 따라야 하지 않을까? 평시조의 시행을 산문형으로 이어나간 것도 거슬렸다. ‘감나무 합창’은 너무 정직하게 형식미를 지킨 것이 오히려 시를 답답하게 가두고 있다. 시조의 형식은 고체가 아니라 액체임을 깨우치기 바란다. ‘겨울 쑥부쟁이‘는 시를 구성하는 맛이 탄탄하다. 그러나 진술적 낱말들이 자주 튀어나온 것이 시의 감도를 떨어트리게 했다. 치열한 다툼 끝에 ’염전에서‘에게 낙점을 주었다. 당선작은 왜 시조를 쓰는가에 대한 답을 알고 찾아낸 글감에 대해 거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말을 꿰고 있다. “오늘도 서산 댁은 낮은 바다 막고 선 채”의 첫 수 초장에서 “가슴엔 뱃고동소리 야윈 달이 차 오른다“의 마지막 수 종장까지 소금밭을 배경으로 ’서산 댁‘을 내세운 삶의 포착을 외연성과 내포성이 알맞게 결구하여 시조가 갖는 시적 감도를 높여주고 있다. 더욱 정진하시기를 빈다.                                              심사: 이근배

♡ 조선일보 당선 동시 - 봄 길 / 김영민

햇살이 놀고 있는데

〈나도〉
〈나도〉
〈나도〉
민들레가 끼여들었다.

〈나도〉
〈나도〉
〈나도〉
개나리가 끼여들었다.

〈나도〉
〈나도〉
〈나도〉
벌, 나비도 끼여들었다.

어서 와
어서 와.

<심사평> 단순 명쾌하고 童心 잘 깃들어 있어  
동시는 ‘동심 읽기’를 잘 해서 써야 한다. 좋은 시적 표현에다 동심이라는 옷을 잘 입혀야 한다. 그래서 동시는 특수한 문학 장르이다. 그 때문에 동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아무나 쓰는 글이 아니다. 무르익은 시 쓰기 능력을 가져야 좋은 동시를 빚을 수 있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때묻지 않은 순진 무구한, 인간 원형질적인 마음이다. 어른보다 어린이에게 그런 심성이 제대로 살아 있다. 그런 심성은 단순함에서 온다. 어린이는 단순하다. 단순한 것은 명쾌해 보인다. 따라서 동시는 단순 명쾌한 것이 특징이다. 응모작 1000여 편에서 이런 특성에 부합되는 5명의 작품을 골라냈다. ‘봄길’ 외 3편, ‘하지 말랬지’, ‘주인공’, ‘우리 엄마는’,  ‘사랑’은 단순 명쾌해 읽기에 저항감이 없었다. 동시가 단순 명쾌하려면, 시적 스토리와 주제의 분명함에다 압축 절제돼 있어야 하고, 동심이 깃들어야 한다. 이런 요소에 가장 근접해 있는 김영민의 작품 4편 중 ‘봄길’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시어 하나만 빼 버려도 시가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압축, 절제돼 있다. 따듯한 햇살이 내리는 봄 들길에 민들레 개나리꽃이 피고, 벌 나비가 날아오는 광경이 산뜻하게 그려져 있다. 잘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모습이다.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감각적인 시가 이런 의미에 둘러싸여 오히려 빛난다. ‘나도’ ‘끼여들었다’ ‘어서 와’ 같은 시어로 동심 읽기에도 소홀함이 없다. 이게 이 신인의 역량이다. 정진해, 동시문학의 탑 쌓기에 돌 하나 얹기 바란다.  심사: 박두순

(12) 경향신문 당선 시 - 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 llama 낙타과에 속하는 동물)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심사평> 뛰고 달리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쾌감
모두 열두 분의 시가 본심에 올랐다. 그 가운데 김 란 씨의 '자벌레' 외 4편과 이제니 씨의 '검버섯' 외 5편이 마지막으로 논의됐다. 김 란 씨는 시를 안정감 있게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문체는 단정하고 간결하다. 쓸 데 없는 수사가 없다. 그런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약하다. 그래서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저 무난히 스쳐간다. 󰡒�생식기도 성기도 아닌/ 비뇨기만 남았다던󰡓�('골똘한 화장'에서)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활달함이랄지 생기랄지가 모자라 보인다. 관념어의 잦은 사용과 리듬감 없이 늘어진 문장은 생동감의 걸림돌이다. 당선작으로 이제니 씨의   ‘페루‘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거기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에서) 그의 시들은 대개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다. 그런데도 그 시들은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 생동하는 말 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 이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더 힘차길 기대한다.    
                                                               심사: 황인숙․최승호
(13)동아일보 당선 시-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 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심사평> 요즘의 詩답지 않은 탁 트임
예심을 통과한 15명 투고자의 작품을 읽고 검토한 결과 두 명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무릎‘등 5편의 작품을 투고한 조율의 경우 일상적 삶의 구체성에 바탕을 둔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감상이나 과장을 멀리한 채 삶의 신산함과 남루함을 적절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투고자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반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경전)’등 5편을 투고한 이은규의 경우 일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기보다는 관념에서 시를 끌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상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작품을 관류하는 활달한 상상력 덕분에 요즘 시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느낌과 더불어 세련된 이미지와 진술의 어울림이 주는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두 선자는 이번 심사에서 일상의 세목에 대한 충실보다는 󰡐�바람을 동경하는󰡑�󰡐�유목의 피󰡑�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당선자의 시가 한국시의 비좁은 영토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언어의 모험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심사 : 이시영, 남진우

♡ 동아일보 당선 시조 - 천수만 가창오리 / 김종열
                1.
들레는1) 늦가을 날        
하늘 길 빗장 풀 즈음
천수만 저 갈대밭 빈방 여럿 예비하고
제 몸 확! 불질러놓고 연방 풀무질한다.
밀레의 대작이다,
모이 줍는 가창오리
비로소 붓질하듯 군무(群舞)는 펼쳐지고
휑하던 너른 그 들녘, 아연 잔칫집인가.
일 년을 하루같이 덧칠만 되풀이하는
감 물든 여문 해가 낙관 하나 꾹 쏟아내고
저 멀리 물러선 방죽, 타닥타닥 잔불 끈다.
               2.
간월암 갈마드는2) 갯바람에 실린 물결      
무르녹은 나의 하루 놀빛 속에 깃들어도
예인선, 예인선처럼 산 그림자 끌고 간다.
* 1) 왁자지껄하게 떠들다
* 2) 서로서로 대신하여 번갈아 들다

<심사평> 치밀한 구성-생생한 언어 완성도 높아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홀로 서는 강󰡑�󰡐�겨울 을숙도 등본󰡑�󰡐�완도 배다릿집 어부 조씨󰡑�󰡐�길 위에서󰡑�󰡐�천수만 가창오리󰡑�였다. 저마다 벼루를 바닥내고 몽당붓을 만들며 벼려 온 기량들이 시조를 한 단씩 높여 나가고 있다.󰡐�홀로 서는 강‘은 섬세하고 투명하게 강의 내면을 그리고 있으나 주제의 새 맛을 보여 주지 못했고󰡐�겨울 을숙도 등본’도 말의 씀씀이가 잘 다듬어져 있으나 글감의 낯익음을 이겨내지 못했다. ‘완도 배다릿집 어부 조씨’는 실사구시의 어법에는 충실했으나 사실에 너무 얽매인 것이 흠이 되었고 󰡐�길 위에서‘는 시상의 전개에 무리 없는 가작이나 중량감에서 밀렸음을 일러둔다. 당선작 󰡐�천수만 가창오리’는 이 시를 구상하고 투고할 때는 태안반도에 기름 유출이 되기 전이었을 터인데 우연하게도 철새들이 찾아드는 천수만이 포커스로 맞춰졌다. 그렇다고 소재의 시의성 때문에 가산점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선과 색채가 예술성을 가름하듯이 시에서는 언어의 연출이 시의 완성도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4수의 연작인데 1부는 3수, 2부는 1수로 장면을 가른 것도 구성의 치밀성을 보이고 있다. 철새 떼의 군무가 펼치는 스펙터클1)이 마음껏 휘두르는 언어의 붓끝에서 눈부시게 살아나고 있다. 앞으로 끌어갈 그의 시조의 예인선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리라.                                                   심사: 이근배
* 1) spectacle 壯觀. 대규모로 하려하고 웅장한 자연을 구경거리로 하는 연극이나 영화

(14) 영남일보 당선 시-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조혜정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1) 앉는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에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 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 1) 액체 속에 섞여 있던 염분이 엉키어서 뭉쳐진 찌끼

<심사평> 작품 장점 찾으려 후속 작품까지 정독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했다. 거듭 읽어도 두드러진 작품이 보이지 않아 두 심사위원은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한 채 숙고를 거듭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메타세콰이어' '유클리드 연대기' '구름 위의 문장들' '두부의 힘' '주왕산' '천 개의 붉은 방'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한 시인의 개성화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군데군데의 흠을 지니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들의 장점을 발견하는데 주력하며 후속 작품들까지 정독했다. '메타세콰이어'는 발상이 신선하고 마지막 연이 진한 여운을 던진다는 미덕이 있으나 전체의 시가 지니는 언어들의 긴장감이 떨어지며 후속 작품들의 수준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한다는 결함이 지적되었다. '유클리드 연대기'는 일종, 이야기 시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시의 흐름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시는 편안하게 읽히기는 하나 언어의 긴장미가 떨어진다는 결함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시 안에 탈자(脫字)가 있음도 주의를 요한다. '구름 위의 문장들'은 '붉은 호수'와 함께 최근 유행하는 시들을 많이 읽었거나 그런 습작의 훈련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가 일상성에서 일탈한 신선한 감수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주왕산'은 섬세한 감각의 미덕을 보이고 있다. 흔하지 않은 새 이름, 꽃 이름들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도 돋보인다. 그러나 이런 유의 시가 갖는 공통적인 흠인 전달력과 무게의 약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두부의 힘'은 부드럽고 유려한 언어의 감각을 지니고 있어 음미할수록 시의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고 부분부분 좋은 구절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부가 서술적이고 긴장미가 떨어져 독자를 견인할 힘이 약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천개의 붉은 방'과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였다. '천 개의 붉은 방'은 강렬한 이미지와 생동하는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음이 장점이다. 형태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오랫동안 심사위원들을 숙고케 한 작품이다. 하지만 허두 부분의 신선함에 비해 중간 부분이 흐려져 있다. 거기 비해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는 허두부터 언어의 세련미가 돋보이고 참신한 상상력의 자장을 띠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한 정련의 과정을 말한 시인데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솟아난다. 그러나 후반부가 흐리고 기성 시인의 냄새를 풍기며 행을 좀더 압축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은 이상의 작품들이 갖는 결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작품으로 보이는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응모자 여러분의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이기철(시인․영남대 교수), 최동호(시인․고려대 교수)


(15) 한라일보 가작 시 - 오월의 잠 / 김은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행방은 나무들의 습성을 닮아간다
뒤를 돌아보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잎새들의 발자국
기린처럼 도시를 넘겨보거나 하루의 마지막 햇살들을
꿈인 듯 곱씹어간다
사막이 될 사랑과 목마름 하나로 건너야 할 기억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나무들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
뿌리째 뒤적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해묵은 반란들,
나이테들의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불면의 등성이들을 오르내린다
숨이 가빠지고 발목이 푸르러진다
누군가 적어놓은 유서들의 단서를 찾는 동안
문맹의 슬픔이 불어온다
심장의 한 켠에 푸른 병조각이 들어차고
이 도시에선 어떤 나무이든 술의 날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조금씩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의문들은 나무들의 틈바구니에 묶인다
어제의 위치와 잎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가둔 채
숲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후의 통화와 몇 개의 망각이 푸른 위궤양을 앓는다
기린처럼 목을 늘려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오월의 잠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몇 개의 잎새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녹이다 만 박하사탕 같은 사랑을 되짚어 간다

<심사평> 한 줄기 사랑 놓지 않으려는 당당함
시(詩)가 말(言)의 사원(寺)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유와 언어의 적절한 긴장을 담보하는 의미일 것이다. 시가 다른 글쓰기보다 얼마간 힘들고 신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긴장의 밀도가 유다른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좋은 시란 그 숨 막히는 긴장을 잘 견뎌낸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2008 한라신춘문예 시부문은 1백 50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응모하여 풍성한 말의 성찬을 이루었고, 나름대로 각각의 솜씨들을 뽐내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언어와 사유의 긴장을 잘 견뎌내고 있는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들은 김경애, 김은실, 김일호, 명순이, 송정애, 이언지, 정두섭 제씨의 것들이었다. 이분들은 시적 구성이나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일정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반면에 사유를 끌어가는 힘과 긴장의 밀도 면에서 각기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중 사유의 깊이와 언어의 긴장에서 김은실 씨의 '오월의 잠'이 조금 더 돋보였다. '오월의 잠'은 권태와 절망의 팍팍한 삶 속에서도 한 줄기 사랑을 놓지 않으려는 자아의 의지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으로서 구성의 탄탄함과 신선한 비유가 뛰어났지만 부분적으로 모호한 진술과 맥락의 불분명함 때문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의 완성도가 부족한 점도 고려하여 아쉽지만 가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심사: 김승립․시인

(16) 서울신문 당선 시 - 가벼운 산 / 이선애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 단풍,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한시도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건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돋보여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 온 시편들을 정밀하게 읽고 이에 대해 논의한 다음 다시 최종심의 대상을 다섯 편으로 압축하였다. ‘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송인덕)는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가, ‘난초와 칼´(이연후)은 이미지의 선명성이, ‘양치하는 노파´(한세정)는 시적 함축성이,‘바닷가 떡집´(김영진)은 진득한 삶의 감각이, ‘가벼운 산´(이선애)은 시적 발상 전환이 돋보였으나 각각 그 나름의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시편을 놓고 좀 더 범위를 좁힌 결과 세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난초와 칼´은 이미지의 선명성은 두드러지지만 대립구도가 너무 단순하고,‘가벼운 산´은 시적 발상 전환이 참신했으나 설명적인 부분이 시적 밀도를 약화시켰으며,‘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는 자연스러운 시적 전개가 강점이지만 상식의 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엇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가벼운 산´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노파의 손등에서 고통의 향기를 관찰한 시인의 시선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솜씨와 더불어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고 하겠다. 삶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선이 시적 구도에서 빛날 때 남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시금 되새겨주기 바란다.
                                                          심사: 오세영, 최동호

(17) 세계일보 당선 시 - 너와집 /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 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덕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 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심사평> 재미있게 읽히는 시

이 시는 따뜻하고 호감이 간다. 일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과 ‘내’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다. 말, 감각이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쓴 시이다. 새롭지는 않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심사 : 신경림, 유종호

(18) 강원일보 당선 시 - 소라의 집 / 김정임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주꾸미가 소라의 빈집으로 스며든다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 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주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심사평> 진정성으로 정제된 단아한 멋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올라온 열일곱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권혁찬 씨의 ‘노트북’ 외4편과 김정임 씨의 ‘소라의집’ 외 4편이었다. 권혁찬 씨의 작품들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능력이 있고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공을 들인 문체에서 만만치 않은 문학적 역량이 느껴진다. 선이 굵고 리듬에도 탄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산문적으로 읽힌다. 시는 확산의 문법이 아니라 응축의 문법이고 생략의 문법이면서 여백의 문법이다. 언어를 최소화하는 과정 뒤에 남는 광채 나는 보석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이 좀더 정제되고 표현의 광채를 획득하기 바란다. 김정임 씨의 시는 단아하다 절제에서 우러나오는 응축의 힘이 있고, 활달한 어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감정의 과장 없이 조심스럽게 망설이듯 전개되는 그의 시들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깊이 각인되는 예리한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독특함이자 매력이다. 당선작 ‘소라의 집’에서 확인되듯이 노련한 장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인에게 요구되는 패기나 대담함 출렁거림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심사: 이영춘, 최승호

• 강원일보 당선 동시 - 자전거와 장갑 / 신지영

추운 날
학교서 돌아가는 길

힘껏 페달을 밟는다
촤르륵 감기는 길

발끝에 힘을 주어 바퀴를 감을수록
길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집은 점. 점. 점 가까워진다

지금쯤 엄마는 무얼 하실까
털실로 장갑을 뜨고 계시겠지

엄마가 만들어준 장갑을 끼면
내일부터 자전거 탈 때는
손 시리지 않겠지

손끝에 힘을 주어 장갑을 만들수록
털실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장갑은 점. 점. 점 만들어지겠지

자전거도 덩달아 신이 나는지
집으로 가는 길을 힘껏 감는다


<심사평> 동시야 놀자
동시단에 새해가 떴다. 희망적이다. 그 새로운 시인의 작품은 신지영의 ‘자전거와 장갑’이다. 심사위원 둘의 마음을 꼭 붙잡는 당선작을 고르는데 이견이 없이 당선의 영광을 올렸다. 시를 풀어가는 솜씨가 여러 해 동안 습작의 노력이 엿보여 당선으로 올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바퀴를 감을수록/ 길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집은 점. 점. 점 가까워진다.” 엄마가 “장갑을 만들수록/ 털실은 점. 점. 점 짧아지고/ 장갑은 점. 점. 점 만들어져” “자전거도 덩달아 신이 나” “집으로 가는 길을 힘껏 감는다”는 장면에서 동심도 덩달아 푸르게 살아 오르는 흥분된 감정과 설렘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와 엄마와 자전거 세 박자가 척척 호흡을 맞추어 시의 완성도를 높였다. 여기 새로운 시와 시인의 작품은 기존의 시 경향을 복귀 불능 상태로 추문화(醜聞化)시키기에 충분하다. 동시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는 시인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표출하기 바란다. 당선자 외에 참 아까운 시인의 작품도 많았다. 김민하의 ‘털실의 마음’도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으나 매끄럽지 못했다. 하지혜의 ‘숟가락 젓가락’도 논의의 대상이었으나 소품이었으며, 최일걸의 ‘고무줄놀이’는 산만했다. 지금 동시 문단에서는 새로운 동시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당선에 이르지 못한 많은 분도 꿈을 죽이지 말고 꼭 결실을 맺기 바란다. 그래야 동시의 본령(本領)이 더욱 높아지고 울울(鬱鬱)해질 것이다. 당선자는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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