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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정지용1

내가 읽은 좋은 시32             백록담/정지용 1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흰 바람벽이 있어/백 석

내가 읽은 좋은 시31           흰 바람벽이 있어/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이 흰 바람벽에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이 흰 바람벽에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

거울/이 상

내가 읽은 좋은 시30           거울/이  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6연 13행의 자유시로, 행과 연은 구분되었으나 띄어쓰기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이상은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데 이것은 정서법이나 기존의 율격의식 같은 모든 상식이나 질..

산정묘지1/조정권

내가 읽은 좋은 시29                 산정묘지1/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산정(山頂)은얼음을 그대러 뒤집어 쓴 채빛을 받들고 있다.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차라리 침묵하는 것.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그러나 한 번 잠든 정..

갈대/신경림

내가 읽은 좋은 시28             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    이 시는 신경림의 초기 경향을 대표하는 시로, 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생명 인식을 보여준 작품이다. 다시 말해, 삶의 근원적인 비애를 '갈대'의 울음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갈대'가 연약한 인간 존재를 상징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갈대는 '울고 있고', '흔들리고 있고', '바람도 달빛도 아닌 제 조용한 울음으로 흔들리고 있으며' , '사..

저녁 눈/ 박용래

내가 읽은 좋은 시27         저녁 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출처]저녁눈 - 박용래 -|작성자안정식   ​ 이 詩는 1960년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의 눈 내리는 풍경을 단순하면서도 정 감있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말집’은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귀틀집을 말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합니다.등도 그럴 고요 이 詩를 읽다 보면 무엇보다, 언젠가 우리가 눈이 내리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을 때, 똑같이 내리는 눈들 도 유독 어느 한두 군데에 더 많이 내리며 쌓이는 듯 ..

흙내 맡고 싶었다

흙내 맡고 싶었다 / 월정 강대실  잃어버린 흙내 맡고 싶었다.대처 생활 마음에 격이 생겨눈에 모를 세우다가도 옆이라도 보면한정 없는 부끄럼 떨칠 수 없어비루해진 이 몸 끌고 쌍태리* 큰밭으로 간다. 흙의 숨결에 마음 다잡으며후줄근히 땀에 젖어 삽질한다감나무 밑에서 쉬기도 하며 나를 생각해 본다그럴 때면 흙은 긴말할 것 없다는 듯넌지시 토룡土龍을 내보이기도 한다.잡풀이며 가시나무 같은 것들에게도어미 닭처럼 품을 내준다는 듯뒷발치께로 눈길 이끈다어느새 몸에 향긋한 흙내 스민다.* 쌍태리: 필자의 고향마을 (담양군 용면에 있음)((제3시집 숲 속을 거닐다)

오늘의 시 07:07:25

무등을 보며/서정주

내가 읽은 좋은 시26         무등을 보며/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5연으로 된 《무등을 보며》전..

광야/이육사

내가 읽은 좋은 시25          광야/이육사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1연까마득한 옛날에 천지가 창조되어 하늘이 열렸고, 닭 우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인간 문명이 존재하기도 이전에 광야가 이미 있었음을, 광야의 근본성을 제시한다.2연바다를 연모해 휘달리는 산맥은..

유리창/정지용

내가 읽은 좋은 시24   유리창/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시의 주제가 죽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임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유리'는 표면적으로 시적화자가 머무는 공간인 '안'과 '밖'을 차단 하기도 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연결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집니다.실제로는 차단되어 있지만,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즉 '유리'는 화자가 살고 있는 이승..

여승/백 석

내가 읽은 좋은 시23                            여승/백  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1]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193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한 여승의 비극적인 인생역정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상실..

별 헤는 밤/윤동주

내가 읽은 좋은 시22       별 헤는 밤/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산유화/김소월

내가 읽은 좋은 시21 산유화/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꽃이 좋아산에서사노라네산에는 꽃 지네꽃이 지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지네     산유화(山有花)는 산에서 피고 지는 모든 꽃을 의미하며, 이 작품에서는 홀로 외롭게 피고 지는 비극적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산은 이러한 존재의 생멸이 순환되는, 근원적 고독감을 발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작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일상적 자연 현상에서 착안하여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시는 고독하게 태어나고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돌아간다는, 탄생과 소멸의 순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단순히 꽃이 피고 지는 내..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가 읽은 좋은 시20                즐거운 편지/ 황동규Ⅰ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1958년 『현대문학』 11월호에 추천 등단작으로 발표된 황동규의 시 작품. 총 2연..

국화 옆에서/서정주

내가 읽은 좋은 시19   국화 옆에서/서정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4연 13행의 자유시로 서정주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국화를 소재로 하여 계절적으로는 봄·여름·가을까지 걸쳐져 있다.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괴로움과 혼돈이 꽃피는 고요에로 거두어들여진 화해의 순간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 어느 논자의 말과 같이, 이 시에서 ‘국화’의 상징성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봄부터 울어대는 ..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내가 읽은 좋은 시18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金永郎)의 대표적인 시.이 작품은 12행시로 4행시를 즐겨 쓰던 저자로서는 새로운 변형이라 할 수 있다.모란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모란이 떨어져버린 뒤의 '절망감'이라는 이중적 갈등을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다..

봄에 대한 짧은 시 /박노해

1.봄이 오면 저만치서/박노해 봄이 오면 저만치서산이 나를바라보네 분주하고 쫓기는 나에게산 좀 바라보라고산처럼 나를 좀 바라보라고 봄이 오면 저만치서꽃이 나를바라보네 꾸미느라 애쓰는 나에게들꽃 좀 바라보라고꽃처럼 나를 좀 바라보라고  2. 처음 본 것처럼/박노해 꽃 피는 길에서도가슴에 꽃이 피지 않는 봄은봄이 아니다 눈 내리는 겨울 숲에서도뜨거운 가슴이라면봄은 이미 와 있으리 그대여 우리 인연이라면만 리 밖에 있어도만나게 되고 우리 인연이 아니라면지척에 있어도 만나지못하리니 잘 가라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우리 다음 생에서는 발길을 멈추고처음 본 것처럼 반가우리니  3. 풀꽃이 길을 낸다 /박노해  눈 녹은 야산 길에서작은 풀꽃을따라가다 보니 길도 없는 처음 길에발자국을 새기며길을 냈구나 봄이 길을 낸..

봄에 대한 짧은 시/나태주 시인

1.그저 봄/ 나태주 만지지 마세요바라보기만 하세요그저 봄입니다.  2.봄맞이꽃/나태주 봄이 와다만 그저 봄이 와파르르 떨고 있는뽀오얀 봄맞이꽃살아 있어 좋으냐?그래, 나도 좋다.  3.봄/ 나태주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그냥 봄이 봄이니까꽃이 피어나는 거다 까닭이 또 있었던 것도 아니다그냥 제가 풀이니까새싹을 피우는 거다 다만 너는 어여쁜 생명나도 아직은 살아 있는 목숨둘이 마주 보면 더러꽃으로 피어나기도 하고잎으로 자라기도 하는 것이다  4. 3월에 오는 눈/나태주 눈이라도 삼월에 오는 눈은오면서 물이 되는 눈이다어린 가지에어린 뿌리에눈물이 되어 젖는 눈이다이제 늬들 차례야잘 자라거라 잘 자라거라물이 되며 속삭이는 눈이다  5. 일으켜 세웠다/나태주 해마다 겨울 가고봄이 오려면나는 몸이 아프다아픈..

초혼 / 김소월

내가 읽은 좋은 시17초혼 /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 마디는끝끝내 마저 하지 못 하였구나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나는 그대 이름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출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 100선] 민예원 초혼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일이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면 망자의 체취가 스며든 옷가지를 들고 기와지..

사평역에서/곽재구

내가 읽은 좋은 시16     사평역에서/곽재구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 열차는 또..

빈 집/기형도

내가 읽은 좋은 시15     빈 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출처]좋아하는 시 - 기형도 빈 집>|작성자다온단열   화자는 사랑했던 순간의 대상을 하나하나 부르며 사랑했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잘가'를 반복하면서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잘가'라는 표현 속에는 사랑의 추억이 온전하길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세상의 빛을 잃은 장님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사랑의 대상..

나그네/박목월

내가 읽은 좋은 시14   나그네/박목월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南道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작자는 이 시의 주제적 모티프(motif)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 제목이 다 주제적 모티프가 되는 ‘나그네’는 바람과 함께 떠도는 절망과 체념의 모습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떠도는,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듯한 상실감으로 허전해진 모습을 ‘나그네’에서 상기할 수가 있다.제1연의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은 작자가 태어나서 자란 농촌 풍경이나, 우리 모두가 보아온 보편화된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을 찾아들거나 떠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구름에 달가듯이’ 간다. 이 때 ‘달’의 발걸음은..

북치는 소년/김종삼

내가 읽은 좋은 시13   북치는 소년/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이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 세 개의 연이 모두 ‘∼처럼’으로 끝났다. 시 본문만으로는 내용이 애매하다. 팁이 있기는 하다. 제목 ‘북치는 소년’을 맨 끝으로 가져오면 시가 새벽빛처럼 밝아온다. 그렇더라도 아직 명확하지는 않다.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이라니…. 이 말에는 빈 공간이 있다. 그러나 비어 있는 그 자체로 완성이다. 어쭙잖은 설명으로 그 공간에 개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시에서 ‘무의미’를 이야기한 사람은 김춘수(1922∼2004) 시인이다. 사물을 보는 고정관념을 해체시키고 사물 그 자체가 지닌 ‘순수’를 보려고 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내가 읽은 좋은 시1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하고눈은 푹푹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눈이 푹푹 쌓이는 밤나타샤와 나는 흰당나귀 를 타고 산골로가자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리없다아니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와 얘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이국 정취를 풍기고 있어서 백석의 시로서는 다소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기행체험의 시에 해..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내가 읽은 좋은 시11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저것 봐, 저것 봐,네보담도 내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그가 지닌 삶에의 애잔한 슬픔, 그리고 정한(情恨)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질녘 언덕에 올라앉아 저녁노을에 물드는 강을 바라보면, 마치 그 강은 노을..

향수/정지용

내가 읽은 좋은 시10   향수/정지용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빼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의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아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풀/김수영

내가 읽은 좋은 시9   풀/김수영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金洙暎)이 지은 시. 작자의 말기를 대표하는 시작품으로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것이다. 3연 18행으로 된 이 작품은 ‘풀’과 ‘바람’이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다.‘풀’과 ‘바람’의 반복적인 구조와 효음(效音)을 제외하고 문맥상으로는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받지 못한다. 단순히 ‘눕다’·‘일어나다’·‘울다’·‘웃다’라는 ..

진달래꽃/김소월

내가 읽은 좋은 시8   진달래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영변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이 지은 시. 1925년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한 시집 ≪진달래꽃≫에 실려 있다. 총 4연, 각 연 3행의 짧은 서정시로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의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담뿍 뿌리겠다는 것이 그 간추린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떠나가는 님은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다. 오직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그런 기대감을 갖고 보내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사람의 사무친 정(情)과 한(恨), 동양적인 체념과 운명관에서 빚어내는 아름답고 처..

동천/서정주

내가 읽은 좋은 시7 동천/서정주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출처] 동천 _ 서정주 (참나무공화국) | 작성자 참나무    이 시기는 작가의 초기 시에 보이던 생명력에 대한 갈구나 병적인 징후가 『귀촉도(歸蜀途)』와 『신라초(新羅抄)』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어느 정도 사라지고, 동양적 체념과 안식의 자세를 취하며 마음의 평정을 도모하던 때이다. 서정주 시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는 사상적 원숙미와 시적 구성력이 가장 고조된 시기라 할 수 있다.물론, 『동천』에 실린 작품들이 불교의 인연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신라초』의 연장선상에 놓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불교적 설화조의..

님의 침묵/ 한용운

내가 읽은 좋은 시6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1]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