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15
빈 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출처]좋아하는 시 - 기형도 <빈 집>|작성자다온단열
화자는 사랑했던 순간의 대상을 하나하나 부르며 사랑했던 당시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잘가'를 반복하면서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잘가'라는 표현 속에는 사랑의 추억이 온전하길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은 화자는 세상의 빛을 잃은 장님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사랑의 대상을 빈집에 넣어두고 마지막 문을 닫습니다. 빈집은 사랑의 추억과 열망을 잃은 화자의 공허한 내면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기에 사랑을 가두고 문을 닫는 장면은 슬픔을 배가시킵니다.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랑은 빈집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화자의 마음도 공허한 빈집 같습니다. 사랑을 잃은 화자의 외로움이 짙게 느껴집니다. 빈집은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노래합니다. 사랑으로 인해 밤은 짧았고 짧은 밤 내내 겨울 안개처럼 창밖을 떠돌거나 촛불 아래 하얀 종이를 펼쳐놓은 채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열망'이 됐을 것입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사랑을 보낸 집은 집이 아닙니다.
빈집도 빈 몸도 빈 마음입니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긴 하지만 '문을 닫는다'는 것은 '내 사랑'이라 불리는 소중한 것들을 가두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김이자 감금일 것입니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이나 다름없고, 그 빈집이 관을 연상케 하는 이유입니다. 삶에 대한 격렬한 열망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떤 가슴엔 시가 꽃피는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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