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128

꿈길에 받은 편지

꿈길에 받은 편지/ 월정 강대실 야야, 주원이 어멈아!아비가 집으로 와 몸조리 잘 하다 다시 입원을 했다니 무슨 날벼락이냐!한 장이 멀다 하고 지성으로 들러더니발길이 끊어진 지가 길어만 져날마다 눈이 까맣게 들머리만 내다봐지고몽조까지 뒤숭숭하더니만...아무튼, 네가 고생이 많다자고로 긴 병에 장사 없다고 했다특히 네가 끼니를 에우는 일 없이제대로 챙겨야 한다, 안 지치게원체 의지가 강철 같아 쉬이 털고 일어날 거다그리고 지금은 용한 의사도 좋은 약도 많지만큰밭 감나무 아래 머위가 효험이 좋단다뿌리를 차로 끓여 상복하도록 해 보아라하루 속히 완쾌해 우리 몫까지 살면서두 손자 동재로 만들어 손부까지 꼭 봐야 한다너희들 옥작옥작 살게 도와 달라고네 아버지랑 기도 더 많이 할란다, 이제는고맙다.초2-812202..

오늘의 시 2024.10.27

감사한 도선생께

감사한 도선생께 / 월정 강대실  두 발로 지구를 받치는 사람이라면어느 누가 군침 삼키지 않을 수 있으리오처마 밑 맛깔스레 익어 가는 곶감을 보고는. 유년의 아슴아슴한 기억 속 아버지 흉내 내 감 깎아 꿰어 즐빗이 매달아 놓고 보니그 연출 하도 순수하고 예술 바로 그 자체라이리저리 사진 찍어 자랑쳤지요 볕 좋고 바람 일고 중천에 달이 휘영청해 검붉고 달보드레하니 숙성해 가는데감꼬치 곶감 빼 먹듯 한다는 말 되새기며춘향이 한양 도령 기다리듯 완숙을 기다리지요 가을 나들이 나선 도선생 뜬금없는 선경에 솔깃이 도지는 곶감 서리의 추억 농막의 길손 되어이마 앞 두고 보자니 마음이 혼미해졌겠지요  참으로 요상하고 감사한 도선생!얼마나 끌끌하고 점잖으시면, 더도 아닌꼭 두 꿰미만을 왼손에 쥐셨나요, 금줄을 친 듯도..

오늘의 시 2024.10.27

사랑의 두 얼굴

사랑의 두 얼굴 / 월정 강대실 이제 그만 동거 끝내자고거실 꽃분 남창 아래로 내놓으며, 문득생각을 해 본다 내 사랑의 두 얼굴.아비 아들 범벅 금 그어 먹는 건 아니되두 아들 어느새 자라 앞산도 들쳐 멜 만하여책가방 내려놓게 되면 다음 날 부터는눈앞에 얼씬도 말라 이르곤 한.성미 칼칼한 바람 기웃거린다 싶으면유난히도 호들갑을 떨며 거실로 맞아들여삼동을 눈 맞추며 고운 꿈 키우다햇살의 은사로 꽃 피워 고운님 모셔라며진자리 마른자리 골라 돌보는.선뜻이 파도 더 센 인해로 뛰쳐나가허위허위 나래치는 모습 안타깝기도 하지만머잖아 태산준령을 맨발로 넘어야 하기에뒤를 받칠 건 맵고 쓰거운 훈계와지금껏 바쳐 온 붉은 정성을 다한 기도뿐어찌 못할 야누스 같은 내 사랑의 두 얼굴.초2-821

오늘의 시 2024.10.27

호반의 길손

호반의 길손/ 월정 강대실 소슬바람 그지없이 집적거려도 요조숙녀처럼 얌전하고 정숙한 산국 풍기는 향기 호안에 가득한 외져 발길 뜸해진 고요로운 호수 오늘도 긴 벤치에 홀로이 찾아와 앉은 호반의 길손 밀려갔다 밀려드는 파문 산산이 부서져 반짝이는 윤슬에 실려 그윽이 풍겨 오는 물의 내음 짓누른 생의 무게 어느덧 사라지고 붉어오는 나뭇잎의 체온 오롯이 가슴에 담는다. 초2-839

오늘의 시 2024.10.21

고향 무정

고향 무정 / 월정 강대실  보고파 고향에 다시 찾아왔어도아버지 어머니 뵈올 길 없어이사 드신 봉안당 찾아 성묘 드리고늦자란 제비풀만 쥐어뜯다 간다 고향 동네 몇 바퀴를 둘러봐도봉철이 명문이 소식 전해들을 데 없고윗주막 들 신작로 옆 큰밭에 들러감나무 매화나무 손만 한 번 잡고 간다 유년적 들일머리 말씀 귀에 생생한데뒷산 같은 그 모습 보이질 않고주인 잃은 전답에서 일어난 바람서낭당 고개까지 등을 떠민다 지금도 상월부락은 상월부락인데묏등걸에서 뒹굴던 벗들은 어디로 가고오장산 봉머리 에돌아 온 구름밀재 너머 북으로 북으로 울어 옌다. 초2-820

오늘의 시 2024.10.20

32. 한강 시/ 피 흐르는 눈 4

32. 피 흐르는 눈 4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뒷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되도록 오래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빛이라곤들어와 갇힌 빛뿐​슬픔이라곤이미 흘러나간 자국뿐조용한 내 눈에는찔린 자국뿐피의 그림자뿐흐르는 족족​재가 되는검은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에서

31 한강 시/ 피 흐르는 눈 3 ​

31.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초여름 천변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하여​(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그렇게 부서지고도나는 살아 있고살갗이 부드럽고이가 희고아직 머리털이 검고​차가운 타일 바닥에무릎을 끓고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부서진 입술어둠 속의 혀​(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더 묻고 싶어허락된다면,(정말)허락되지 않는다면,아니,​

30. 한강 시// 피 흐르는 눈 2

30. 피 흐르는 눈 2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29. 한강 시/ 피 흐르는 눈 ​

29. 피 흐르는 눈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이제 잊었어.달콤한 것은 없어.씁쓸한 것도 없어.부드러운 것,맥박치는 것,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무심코 잊었어, 어쩌다더 갈 길 없어.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생략하기로 해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눈을 덮고 쉴 때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입술을, 얼룩진 인증을 사랑하지 않아.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28. 한강 시/ 새벽에 들은 노래 3

28. 새벽에 들은 노래 3나는 지금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이미 꽃잎 진꽃대궁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누군가는목을 매달았다 하고누군가는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새벽은푸르고희끗한 나무들은속까지 얼진 않았다고개를 들고 나는찬 불덩이 같은 해가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다시견디기 힘든달이 뜬다 다시아문 데가벌어진다이렇게 한 계절더 피 흘려도 좋다​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7. 한강 시/심장이라는 사물

27. 심장이라는 사물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ㄱ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지워지기 전에 이미비어 있던 사이들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어깨를 안으로 말고허리를 접고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희미해지려는 마음은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덜 지워진 칼은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더 캄캄한 데를 찾아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한강, 「심장이라는 사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8. 새벽에 들은 노래 3나는 지금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이미 꽃잎 진꽃대궁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누군가는목을 매달았다 하고누군가는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새벽은푸르고희끗한 나무들은속까지 얼진 않았다고개를 들고 나는찬 불덩이 같은 해가하늘을 다 긋고 지..

26. 한강 시/ 여름날은 간다

26. 여름날은 간다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한강, 「여름날은 간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5. 한강 시/ 서울의 겨울 12

25. 서울의 겨울 12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내 가슴에 잠겨차마 숨 못 쉬겠네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올 수만 있다면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강물 소리,들려주겠네한강, 「서울의 겨울 1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4. 한강 시/저녁의 소묘 / 한강

24. 저녁의 소묘 / 한강어떤 저녁은 피투성이(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흑과 백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평화도,오랜 지옥도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외등은 희고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그의 눈을 적신 것은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한강, 「저녁의 소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3. 한강 시/새벽에 들은 노래

23.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봄빛과번지는 어둠틈으로반쯤 죽은 넋얼비쳐나는 입술을 다문다봄은 봄숨은 숨넋은 넋나는 입술을 다문다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기다려봐야지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혀가 녹으면입술을 열어야지혀가 녹으면입술을 열어야지다시는이제 다시는​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2. 한강 시/거울 저편의 겨울 2 /

22. 거울 저편의 겨울 2 / 한강​새벽에누가 나에게 말했다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나쁜 꿈에서 깨어나면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어떤 꿈은 양심처럼무슨 숙제처럼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빛을던진다면빛은공 같은 걸까어디로 팔을 뻗어어떻게 던질까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때로두 손으로 간산히 그러쥐어 모은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차갑거나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지금 나는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그 꿈을 기억한다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 한강 시//저녁의 대화 / 한강

20. 저녁의 대화 /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 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18. 한강 시//저녁 잎사귀

18.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16. 한강 시//어깨 뼈

16. 어깨뼈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사랑의 두 얼굴

사랑의 두 얼굴/ 월정 강대실  이제 그만 동거 끝내자고거실 꽃분 남창 아래로 내놓으며, 문득생각을 해 본다 내 사랑의 두 얼굴. 아비 아들 범벅 금 그어 먹는 건 아니되두 아들 어느새 자라 앞산도 들쳐 멜 만하여책가방 내려놓게 되면 다음 날 부터는눈앞에 얼씬도 말라 이르곤 한. 성미 칼칼한 바람 기웃거린다 싶으면 유난히도 호들갑을 떨며 거실로 맞아들여삼동을 눈 맞추며 고운 꿈 키우다햇살의 은사로 꽃 피워 고운님 모셔라며진자리 마른자리 골라 돌보는.   선뜻이 파도 더 센 인해로 뛰쳐나가허위허위 나래치는 모습 안타깝기도 하지만머잖아 태산준령을 맨발로 넘어야 하기에   뒤를 받칠 건 맵고 쓰거운 훈계와지금껏 바쳐 온 붉은 정성을 다한 기도뿐어찌 못할 야누스 같은 내 사랑의 두 얼굴.초2-821

오늘의 시 2024.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