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많이 읽히는 시

16. 사평역에서//곽재구

월정月靜 강대실 2024. 5. 16. 17:45

 

내가 읽은 좋은 시16

 

 

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연 27행의 자유시이다. 1981년『중앙일보(中央日報)』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로서 1983년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첫 시집『사평역(沙平驛)에서』에 실렸다. 80년대 이후 대표적인 서정시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임철우(林哲佑)가 『사평역』이라는 이름으로 소설로 꾸미기도 했다.
 
이 시의 표제인 ‘사평역’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체험했던 남광주역과 남도의 회진포구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평역은 가상의 공간이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이 군부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혔던 암울한 현대사의 질곡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시공간의 동일성과 공감각적 이미지의 다발을 통해 그리움과 슬픔의 정서를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시간은 멈춘 듯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합실 밖에는 밤새 눈이 내리고 톱밥난로가 지펴진 대합실 안쪽에서는 시인과 더불어 삶의 지친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정지된 장면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내장하고 있는 연속체이다. 과거는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통곡하며 배설하는 설움이 아니다. 침묵 속에 깊게 그러나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붙들고 있다. 이 장면 속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독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슬픔의 도가니이다. 드러나지 않지만 미래는 그리움을 내장하고 있다. 한 줌의 눈물을 톱밥난로 불빛 속에 던져주는 행위에서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구체화된다. 미래는 그 그리움의 힘으로 살아야함을 시인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합실을 뒤덮은 흰 눈과 청색의 손바닥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슬픔의 증류과정을 거쳐 동질화된다. 청색이 새파랗게 질린 민중의 시련과 고통을 알레고리하고 있는 반면 흰 눈은 화해와 용서를 위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눈꽃의 화음’ 속에 사평역으로 환치된 역사의 현장은 침묵 속에 갇힌 듯하다. 그처럼 역사는 이미 자정이라는 심판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섰다. 시인은 이 지점에서 죽어간 모든 생명들을 부활시키고 있다.
 
이 시는 현실적 상상력을 낭만적 상상력으로 자연스럽게 변주시킴으로써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를 보였다는 데 의의를 지닌다. 진술과 토로로 일관하는 교술적 메시지에 의지하지 않고 휴머니즘의 든든한 바탕위에서 역사를 시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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