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11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그가 지닌 삶에의 애잔한 슬픔, 그리고 정한(情恨)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해질녘 언덕에 올라앉아 저녁노을에 물드는 강을 바라보면, 마치 그 강은 노을빛으로 인하여 붉게 타는 듯이, 아니 붉은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더구나 서러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바라보면, 마치 내 설움이, 내 울음이 붉게 타는 듯이 보인다.
젊은 시절, 많고 많은 삶의 애환(哀歡)을 그 젊음과 함께 가슴에 안고 우리는 살아왔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마저도, 마치 나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인 양, 절절하게 듣던, 그 가슴 저리던 순수했던 젊은 시절. 언덕에서 바라보던 가을 강이, 마치 노을에 물들어 우리의 서러운 가슴 마냥 붉은 울음을 터트리며 흐르고 있었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그 기쁜 첫사랑의 산골 물소리 같은 도란거림도 사라져버렸고, 처연한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모두 녹아난, 그리하여 살면서 겪어온 모든 아픔, 기쁨, 아쉬움, 연연함까지도 모두 모두 안으로 안으로만 끌어안은 채, 다만 묵묵히 흐르고 있는 가을 강. 그 가을 강 같이 우리들 가슴 속 깊이 소리 죽여 흐르는, 붉게 물든 한(恨), 한(恨)만을 우리는 오늘 이렇듯 만나고 있을 뿐이로구나.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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