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많이 읽히는 시

23. 여승//백 석

월정月靜 강대실 2024. 5. 17. 20:46

         
 내가 읽은 좋은 시23                        

 

 여승/백  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
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1]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193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한 여승의 비극적인 인생역정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가족공동체마저 해체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고발하고 있다.

전4연 12행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는 서정시로서, 역순행적(회상적) 구성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한 여인의 일생을 시의 제재로 삼아, 식민지시대의 사회적 현실을 애상적이며 감각적인 어조로 형상화한 사실주의적 시이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소설을 연상시키는 평서형 종결어미의 사용 및 전통적 율격의 접목으로 산문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객관적 서술법과 비유법을 통한 시상의 압축을 꼽을 수 있다.

제1연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에서 시인은 한 여승과의 오랜만의 해후를 이야기한다. 가지취의 내음새로 속세의 번뇌를 잊은 듯한 그 여승에게서 인생에 대한 서러움과 안쓰러움을 느낀다. 제2연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나는 파리한[2]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는 시인이 평안도의 어느 산속 금점판에서 옥수수를 팔던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파리한 안색의 그 여인은 우는 아이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아이를 때리면서 차갑게 울 수밖에 없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제3연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에서는 남편도 없이 유랑민이 되어 어린 딸을 데리고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 가난으로 인해 딸마저 잃게 된 여인의 힘겨운 삶을 이야기한다. 의지할 곳 없게 된 여인의 처량한 신세야말로, 1930년대의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던 우리민중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딸의 죽음을 돌무덤 주변의 도라지꽃으로 비유한 데에서 시인의 섬세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고/도라지꽃이 좋아/돌무덤으로 갔다 라고 표현한 데에서 운율이 잘 드러난다. 제4연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에서 한 많은 여인이 삭발하고 여승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여승은 비록 불교에 귀의했으나 아직도 현실적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글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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