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일을 보느라 며칠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집 주위가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는 날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마당 잔디밭이 수십 군데나 푹푹 파여 있습니다. 파여 있는 발자국의 크기나 모양으로 보면 멧돼지의 짓입니다. 지난해에는 텃밭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멧돼지 가족이 내려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우기에 올해는 고구마를 안 심었더니 화풀이를 한 건지 심술을 부린 건지 마당을 푹푹 파놓고 갔습니다. 뒷마당에는 고라니들이 까만 콩 같은 똥을 한 무더기 싸놓고, 앞마당에는 너구리인지 쪽제비인지 회색 빛깔의 똥을 길게 싸놓았습니다. 색깔을 보니까 하루에 싸놓은 똥이 아닙니다. 굳은 것도 있고 싼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똥도 있습니다. 제가 없는 날 매일 와서 먹고 놀다간 것 같습니다. 새의 깃털이 마당 가득 흩어져 있는 날도 있습니다. 새들끼리 싸웠나 하고 살펴보니 솔개가 새를 잡아 해친 흔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주 불어오다 우리 집 근처에서 만난 바람이 팽나무 잎을 서로 집어던지며 장난을 치다 그냥 달아났는지 나뭇잎이 뜰 가득 어질러져 있는 날이 있습니다. 거기다 다람쥐는 어디로 갔는지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루에 놓아준 알밤 다섯 알이 그대로 있습니다. 마치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가 제 친구들을 데리고 와 난리치며 놀다가 어질러 놓은 방안 같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며칠 출장 갔다 온 사이에 교실 바닥에 먹다 흘린 것 종이와 쓰레기 버린 것 연필 깎은 것이 그냥 널려 있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져 유리창은 깨져 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이 녀석들이 진짜, 이렇게 마당을 파헤쳐 놓으면 어떻게 해.”하고 소리를 칩니다. “누가 여기에다 똥 싸놓았어.”하고 주위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손드는 녀석이 없습니다. 나뭇잎이나 새의 깃털을 쓸고 똥을 치우면서 나는 내가 혹시 이 산에 사는 것들의 담임선생 노릇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몸에 밴 직업의식을 못 버려 이 산 속에 들어와서도 선생노릇,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짐승들이나 나무들 중에 아무도 나를 선생이라고 여기거나 주인처럼 모셔야 한다고 생각지 않을 텐데 나 혼자만 그러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나를 위험인물 취급하거나 경계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고, 만약 친구처럼 여겨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스산한 겨울 풍경 속에서 새들이 자기 마당이라고 생각하며 놀다 가도 고맙고, 짐승들이 제 땅이라고 생각하며 오줌 똥을 싸서 표시를 남기고 가도 그런가보다 하고 같이 지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메리 크리스 마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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