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인 시모음]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황지우 黃芝雨 (1952. 1. 25 - )본명 황재우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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