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는 무화과나무
물 젖어 풀린 화장지처럼 무화과
과육이 흘러내렸다, 나무 아래 서성이는
내 어깨에 머리에 무화과 맨살이
취객의 오물처럼 엉겨 붙었다.
열매란 둥글고 단단하게 자라서
익는 것이라 여긴 내게
비 맞는 무화과, 이런 삶도 있다고
꽃 시절도 없이 살았던
뚝뚝, 제 안에 고인 슬픔을
빗물로 퍼내는 것 같다,
웅덩이 같은 몸을 가진 무화과.
누구나 웅덩이 하나씩은
가지고 살지, 상처를 우려내
가뭄 든 마음을 적시기도 하지,
그러나 너무 오래 고여 있으면
안 되는 웅덩이,
퍼 내지 못하면 결국
출렁이지도 못하고 뭉크러지는
영혼의 폐허가 되고 말지.
취객 같은 무화과나무 아래
내 가슴속의 무화과 어디 갔나, 나는
폐허처럼 서서 한참이나 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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