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벗긴다
퇴직하고 시골로 간 친구가
한 보따리 농산물 놓고 갔다.
뭔가 벗기는 일은
가을 저녁의 별미 같은 것.
티븨를 보는 대신
늙은 호박 껍질을 벗기고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기고
도라지 껍질까지 벗긴 뒤
비닐봉지 뒤적거려 머윗대를 꺼낸다.
손가락 까매지도록
가을 저녁을 벗긴다.
생활의 껍질을 벗긴다.
나를 벗긴다.
난장판 거실 어느 구석에서
시골 친구가 흘리고 간
풀벌레, 울다 그쳤다 다시 운다.
'13. 내가 읽은 좋은 시 > 2)시인의 대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육탁시/7. 푸른 것들의 조그마한 항구 (0) | 2025.01.27 |
---|---|
14. 육탁시/6. 대답이 없다 (0) | 2025.01.27 |
14. 육탁시/4. 덜컹거리는 얼굴 (0) | 2025.01.27 |
14. 육탁시/3.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 (0) | 2025.01.27 |
14. 육탁시/2.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0) | 202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