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순 밭에서
문병란
죽순 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 밭에는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 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 올리는 대나무 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 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소리
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
달빛을 받아먹고
이슬을 받아먹고
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
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
쑥쑥 뽑아 오르는 소리
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
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
유혈이 낭자하던 대밭
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 대밭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굳은 땅을 뚫고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오는 소리
죽순 밭에는
뾰쪽뾰쪽 일어서는
카랑한 달빛이 흐른다
도도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묵은 끌텅에 새 순이 돋아
창끝보다 날카로운 아픔이 솟는다.
가슴이 막혀 답답한 날
대밭에 가서 창을 다듬자
왕대 곁에 서서
꼿꼿이 휘이지 않는
한줄기 죽순을 뽑아 올리자
응혈진 어둠을 뚫고
핏물진 연한 살을 뚫고
벌떼같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낭자하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아 소리 없는 아픔이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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