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1. 한강 시/27. 심장이라는 사물

월정月靜 강대실 2024. 10. 20. 13:58

27.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한강, 「심장이라는 사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8. 새벽에 들은 노래 3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9. 피 흐르는 눈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증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

30. 피 흐르는 눈 2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31.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하여​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끓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32. 피 흐르는 눈 4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뒷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갇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