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낭송시. 읽는시/3)시와 낭송

시와 낭송/ /뼈저린 꿈에서만, 시 전봉건, 조성식

월정月靜 강대실 2024. 9. 7. 03:37

뼈저린 꿈에서만/ 시 전봉건,  시낭송 이서윤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
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
개울물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
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없이
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
우물가엔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
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
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없이
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큰 홰나무 아래로
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
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
가만히 옮기시던
그 발걸음 하나하나
조용히 웃으시던
그 얼굴의 빛 무늬 하나하나
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 쳐도 그것만은
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못합니다
강이 산으로 변하길 두 번
산이 강으로 변하길 두 번
그리고도 더 많이 흐른 세월이
가로 세로 파 놓은 어머님 이마의
어둡고 아픈 주름살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말로 하려면 목이 먼저 메이고
어머님
꿈에 보는 어머님 주름살을
그림으로 그리라면 눈앞이 먼저 흐려집니다
아아 이십육년
뼈저린 꿈에서만 뫼시는 어머님이시여
 
 
전봉건(1928~1988) 평안남도 안주 출생. 1945년 평양 숭인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월남하여 형 전봉래의 영향으로 문학 수업을 시작하였다. 1950년 『문예』지에서 서정주와 김영랑의 추천을 받아 등단. 언어에 대한 남다른 실험적 접근을 멈추지 않았던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의 시세계는 참혹한 전쟁의 현실 속에서 관능적 서정과 희망의 언어를 노래한 초기시에서, 암담한 시대 현실을 관통하여 정신적 단련과 견인주의를 추구한 후기시로 변모해왔다.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 『속의 바다』 『피리』 『북의 고향』 『돌』, 시선집 『꿈속의 뼈』 『새들에게』 『전봉건 시선』 『트럼펫 천사』 『아지랭이 그리고 아픔』 『기다리기』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 그는 출판 기획자나 잡지 편집자로서도 인상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특히 그가 창간한 시 월간지 『현대시학』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국내 시 전문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