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함석헌 시 모음 9편

월정月靜 강대실 2024. 6. 4. 18:07

함석헌 시 모음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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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천리 길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면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세상이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라고 믿어 주는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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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현

만리 길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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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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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

함석헌

맹꽁이의 음악 너 못 들었구나.
구더기의 춤 너 못 보았구나.
살무사와 악수 너 못해보았구나.

파리에게는 똥이 향기롭고
박테리아에게는 햇빛이 무서운 거다.

도둑놈의 도둑질처럼 참 행동이 어디 있느냐?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처럼 속임 없는 말이 어디 있느냐?
거지의 빌어먹음처럼 점잖은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정치가의 정의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고,
군인의 애국보다 한층 더 믿을 만한 것이고
종교가의 설교보다 비길 수 없이 거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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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석헌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자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 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

이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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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함석헌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분주한 일 다 마치고
떠들던 손님 다 보내고
사람이 다 자고
새도 자고 쥐도 죽은 밤
티끌이 다 가라앉고
구름 다 달아나고
높이 드러나는 파란하늘
깜박깜박하는 파란 별
아슬하게 올려다볼 때 같이,
진리의 얼굴 마주 대하면
파랗게 슬퍼.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엉클어진 넝쿨 다 헤치고
우는 시냇물 그대로 남겨두고
험한 골짜기를 건너
위태로운 바위를 더듬어
무르익은 산과를 내버리고
어지러이 피는 꽃밭도 뒤에 두고
나무도 없고 풀도 없는 높은 봉에
하늘 쓰고 돌 위에 앉아
포구의 그림자도 없이
망망하게 열린 파아란 바다
끝없이 일고 꺼지는 파란 물결
아득하게 바라볼 때 같이,
진리의 눈동자 건너다보면
파랗게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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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를 사는 계집

함석헌

꽃 쓰러진 배꼽 달고 줄기 달린 꼭지 쓴 줄을
배꼽 줄 떨어진 날부터 먹어 알아온 참외를
"이 참왼 꼭지에 갈수록 더 달다" 하는
"참외 참외" 하며 말 파는 사내 말 곧이 사
대가리 같은 박참외를
한 입 또 한 입 싱겁게 다 먹었구나

남의 말 믿고 맛을 따라
내 혀 도리어 의심하는 어리석은 계집
먹다 남은 쓰디쓴 꼭지 공중에 내던진 후
입 닦고 손 떨고 멋없이 구름 보고 서니
배는 풍랑 맞고 파선한 뱃잔등 같고
빈 주머니만 그 위에 맥없이 목을 매고 달려
지나가는 초가을 바람에 흔들 또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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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함석헌

몰랐네
뭐 모른지도 모른
내 가슴에 대드는 계심이었네

몰라서 겪었네
어림없이 겪어보니
찢어지게 벅찬 힘의 누름이었네

벅차서 떨었네
떨다 생각하니
야릇한 지혜의 뚫음이었네

하도 야릇해 가만히 만졌네
만지다 꼭 쥐어보니
따뜻한 사랑의 뛰놂이었네

따뜻한 그 사랑에 안겼네
푹 안겼던 꿈 깨어 우러르니
영광 그득한 빛의 타오름이었네

그득 찬 빛에 녹아버렸네
텅 비인 빈탕에 맘대로 노니니
거룩한 아버지와 하나됨이었네

모르겠네 내 오히려 모를 일이네
벅참인지 그득 참인지 겉 빔인지 속 빔인지
나 모르는 내 얼 빠져든 계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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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함석헌

얼음도 아니 녹아 피는 향기 갸륵커늘
고개 숙고 털옷 입어 숨기잠 웬 뜻인고
깊은 속 붉은 맘 찾는 임만 볼까 함이네.

가뜩이 덧없는 봄 채 오지 못한 적에
잠시 영화 안 누리고 질러감 웬일인고
동풍에 백발이 날아 더욱 눈물겹고나

얼음과 싸우던 뜻 아는 이 하나 없고
덧없는 한때 영화 다투는 꼴 가엾어서
흰 머리 풀어 흔들고 허허 웃는 노장부

백화요란(百花요亂) 계집년들 봄꿈 깰 줄 모르건만
서리 치는 가을 심판 어이 멀다 할 것이냐
막대로 하늘 가리켜 부르짖는 예언자

동풍 비에 머리 푸는 즐풍목우(櫛風沐雨) 저 사내야
세상이 너 모른다 슬피 한숨 짓는 거냐
온 세상 다 모른대도 눈물질 난 아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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