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491

1. 한강 시/26. 여름날은 간다

26. 여름날은 간다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한강, 「여름날은 간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 한강 시/25. 서울의 겨울 12

25. 서울의 겨울 12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내 가슴에 잠겨차마 숨 못 쉬겠네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올 수만 있다면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강물 소리,들려주겠네한강, 「서울의 겨울 1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 한강 시/24. 저녁의 소묘 / 한강

. 저녁의 소묘 / 한강어떤 저녁은 피투성이(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흑과 백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평화도,오랜 지옥도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외등은 희고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그의 눈을 적신 것은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한강, 「저녁의 소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 한강 시//23. 새벽에 들은 노래

23.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봄빛과번지는 어둠틈으로반쯤 죽은 넋얼비쳐나는 입술을 다문다봄은 봄숨은 숨넋은 넋나는 입술을 다문다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기다려봐야지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혀가 녹으면입술을 열어야지혀가 녹으면입술을 열어야지다시는이제 다시는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 한강 시//22. 거울 저편의 겨울 2 /

22. 거울 저편의 겨울 2 / 한강새벽에누가 나에게 말했다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나쁜 꿈에서 깨어나면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어떤 꿈은 양심처럼무슨 숙제처럼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빛을던진다면빛은공 같은 걸까어디로 팔을 뻗어어떻게 던질까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때로두 손으로 간산히 그러쥐어 모은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차갑거나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지금 나는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그 꿈을 기억한다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 한강 시//20. 저녁의 대화 / 한강

20. 저녁의 대화 / 한강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너는 삼켜질 거야.』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아니,나는 삼켜지지 않아.이 운명의 체스판을오래 끌 거야,해가 지고 밤이 검고검어져 다시푸르러 질 때까지혀를 적실 거야냄새 맡을 거야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나직이, 더없이,더없이 부드럽게.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내 무릎에 깃들어잠들 때까지.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너는 삼켜질 거야.』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검푸른그림자

1. 한강 시//18. 저녁 잎사귀

18.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한 백 년쯤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내 몸이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알 것 같다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볕 속을 걸어야 한다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긴다

1. 한강 시//16. 어깨 뼈

16. 어깨뼈 사람의 몸에서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두려우면 움츠러들고당당할 때면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목덜미와 어깨 사이가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햇빛이었으면나직한 오월의바람소리였으면

1. 한강 시//15. 2월

15.  2월 나의 어머니, 쉰 두살, 윗입술이 잘 부르트시고, 반세기를 건너오시면서도 웃을 때면 음조나 표정이 소녀같은, 아니 소년같은 분.고즈넉한 저녁 딸과 마주앉아 마늘을 까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소리, 바람 찬 창으로 두리번거리던 딸은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 못 한다. 이렇게 또 봄이 온다는 건가. 딸은 믿을 수가 없다. 구성진 가락은 다뉴브강의푸른 물결, 윤심덕이 부른 노래.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곳···  좋은 날은 다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엄마어머니 조용히 웃으신다너도 지금 좋을 적 아니냐이젠 저도 책임져야 될 나이가 된 걸요, 곧 졸업이에요어머니 일어나 가스렌지 불을 줄이신다느그 외할무니 하시던 말씀이 다 맞어야···비 피할라고 잠깐 굴에 들어갔다 나온 것맨이로 그렇게..

1. 한강 시//1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하루가 끝나면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저녁이 식기 전에나는 퇴근을 한다저녁은 서랍 안에서식어가고 있지만나는 퇴근을 한다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아직도 따뜻하다나는 퇴근을 한다저녁이 식기 전에퇴근을 하면서저녁을 꺼내어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하루의 끝에서퇴근을 하고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나는 퇴근을 한다퇴근을 하면서저녁을 꺼내어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하루의 끝에서

1. 한강 시//13. 효에게

13. 효에게(작가가 아들에게 쓴 편지)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겁먹은 얼굴로아이가 말했다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밀려오길래우리 몸을 지나 계속차오르기만 한 줄 알았나보다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마치 내가그 어떤 것,바다로부터조차 널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기침이 깊어먹은 것을 토해내며눈물을 흘리며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마치 나에게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하지만 곧너도 알게 되겠지내가 할 수 있는 일은기억하는 일뿐이란 걸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시간과成長,집요하게 사라지고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처음부터 모래로 지은이 몸에 새겨두는 일..

1. 한강 시//12. 조용한 날들

12. 조용한 날들아프다가담 밑에서하얀 돌을 보았다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아프다가돌아오다가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손을 뻗지 않았다

1. 한강 //10. 유월

10. 유월// 시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못 일으키고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발바닥만이 아니었다밤새 앓아 정든 위胃장도 아니었다무엇이 나를 걷게 햇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등을 떠밀고맥없이 엎어진 나를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혀끝을 감싸주었는가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아름다워라 산천 山川, 빛나는물살도 아니었다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숙주이니, 병들대로 병들면떠나려는가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거기 피어 있었다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나는 귀를 막았지만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막을 수 있는 노래가아니었다 (1993년 발표 시)

1.한강 시//11. 첫새벽

11. 첫새벽/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정갈한 절망을,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감은 머리칼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밟는다, 가파른 골목바람 안고 걸으면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아아 첫새벽,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늘 거기 눈뜬 슬픔,슬픔에 바친다 내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10. 한강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10.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출처] 노벨문학상 한강의 등단 시 서울의 겨울/서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작성자 행복한작가 배정자

1. 한강 시//9. 서시

9.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

7. 한강 시// 편지

7. 편지/ 한강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궁금했습니다꽃 피고 지는 길그 길을 떠나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가슴 타는 꿈 속에어둠은 빛이 되고부셔 눈 못 뜰..

1. 한강 시//5. 파란 돌

5. 파란 돌 /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

가을에// 고재종

가을에 /고재종 *가을볕 아무도 모른다 이 뿌듯함을. 묵직한 나락깍지 무게에 취하여 싹둑싹둑 나락 베는 이 흐뭇함을. 가을볕 부시게 내려 세상 온통 서럽도록 훤한데 아무도 모른다 이 기쁨을. 우리 내일 삼수갑산 갈지라도 이 금나락 고그란히 거두어 가마솥 가득 쌀밥 지어 한 두레반에 둘러안고 싶은 소망을. *연기 추수 끝낸 뒤 검불을 태우는 연기가 오른다 예의 빈 들에 보리씨 뿌리며 겨울로 나설 이 삶의 엄숙한 싸움 앞에 펄럭펄럭 솟아오르는 봉화처럼 봉화처럼 *초승달 공판에 나가 빈손으로 돌아오며 길섶에 앉아 해 저문 서편 하늘 노을 바라 우는데 거기 해진 자리 뚜렷이 돋는 서늘한 비수 같은 것 새파란 독침 같은 것 저 속 깊이 번뜩이는 촌철의 희망 같은 것 이윽고 그쪽으로 한 마리 저녁새 싱싱히 날은다 ..

1. 한강 시//4. 괜찮아

4. 괜찮아/ 시 한강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아파서도 아니고아무 이유도 없이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거품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나는 두 팔로 껴안고집 안을 수없이 돌며 돌았다왜 그래.왜 그래.왜 그래.내 눈물이 떨어져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그러던 어느 날문득 말해봤다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괜찮아.괜찮아.이제 괜찮아.거짓말처럼아이의 눈물이 그치진 않았지만누그러진 건 오히려내 울음이었지만, 다만우연의 일치였겠지만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괜찮아왜 그래가 아니라괜찮아이제 괜찮아ㅡ 75쪽 '괜찮아 ' 전문[출처] 서..

1. 한강 시//3.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항아리가 되지

3.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항아리가 되지거리 한가운데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둥글게더 둥글게파문이 번졌을 테니까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알 수 없었어,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그렇게 영원히 죽었어,내 가슴에서 당신은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ㅡ 37쪽 '눈물이..

1. 한강 시//2. 얼음꽃

2. 얼음꽃// 시 한강  오래 내리어 뻗어간그들 뿌리의 몫이리라하여 뿌리 여윈 나는 단한 시절의 묏등도오르지 못하였고 허깨비,허깨비로 뒹굴다 지친 고갯마루에무분별한 출분의 꿈만 움터놓았다모든 미어지는 가슴들이그들 몫의 미어지는 가슴들이그들 몫의 미어지는 꽃이라면 꽃이라면 아아세상의 끝까지 가리라 했던죽어, 죽어서라도보리라 했던 저 숲 너머의 하늘무엇이 꿈이냐 무엇이시간이냐 푸르름이냐 빛이냐 나무여,나무여잠깐의 참회를 배우기 위해그토록 많은 세월을 죄지었던가알 수 없다 알 수있는 것은 다만 이 목마름을 건너저 버려진 잡목숲 사이로몸 번져야 할 일몸 번져 오래 울어야 할 일좋다 계절이여 오라눈발이여퍼부어라, 이 불타는 수액을뒤덮어다오, 그 위에찬란히춤추어도 좋으니.(1993년 발표)

1. 한강 시// 1. 한강 시 모음 32편

한강 작가(시인)의  시 모음 32편  1. 유월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못 일으키고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발바닥만이 아니었다밤새 앓아 정든 위胃장도 아니었다무엇이 나를 걷게 햇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등을 떠밀고맥없이 엎어진 나를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혀끝을 감싸주었는가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아름다워라 산천 山川, 빛나는물살도 아니었다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숙주이니, 병들대로 병들면떠나려는가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거기 피어 있었다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나는 귀를 막았지만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막을 수 있는 노래가아니었..

1. 서울의 겨울//8. 시 한강

서울의 겨울 / 시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사랑내 가슴에 잠겨차마 숨 못쉬겠네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벅찬 숨결이 되어 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올 수만 있다면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강물소리들려주겠네[출처] 서울의 겨울 / 한강 작가 詩 [2024 노벨문학상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작성자 사랑비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손택수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ㅡ 손택수 [출처] 가슴에 묻은 김칫국물|작성자 파크리움

육탁 시 모음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숫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 닳은 구두 뒤축을 갈기 위해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