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3 9

1. 한강 //10. 유월

10. 유월// 시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못 일으키고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발바닥만이 아니었다밤새 앓아 정든 위胃장도 아니었다무엇이 나를 걷게 햇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등을 떠밀고맥없이 엎어진 나를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혀끝을 감싸주었는가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아름다워라 산천 山川, 빛나는물살도 아니었다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숙주이니, 병들대로 병들면떠나려는가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거기 피어 있었다살아라, 살아서살아 있음을 말하라나는 귀를 막았지만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막을 수 있는 노래가아니었다 (1993년 발표 시)

1.한강 시//11. 첫새벽

11. 첫새벽/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정갈한 절망을,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감은 머리칼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밟는다, 가파른 골목바람 안고 걸으면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아아 첫새벽,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늘 거기 눈뜬 슬픔,슬픔에 바친다 내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10. 한강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10.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출처] 노벨문학상 한강의 등단 시 서울의 겨울/서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작성자 행복한작가 배정자

1. 한강 시//9. 서시

9.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

8. 한강 시/ 서울의 달

8. 서울의 달/ 한강​ 어느날 어느 날이 와서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네 사랑내 가슴에 잠겨차마 숨 못 쉬겠네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네 먹장 입술에벅찬 숨결이 되어주지,네가 온다면 사랑아,올 수만 있다면살 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 하던강물소리,들려주겠네[출처] 노벨문학상 한강의 등단 시 서울의 겨울/서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작성자 행복한작가 배정자

카테고리 없음 2024.10.13

7. 한강 시// 편지

7. 편지/ 한강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궁금했습니다꽃 피고 지는 길그 길을 떠나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가슴 타는 꿈 속에어둠은 빛이 되고부셔 눈 못 뜰..

1. 한강 시//5. 파란 돌

5. 파란 돌 /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

가을에// 고재종

가을에 /고재종 *가을볕 아무도 모른다 이 뿌듯함을. 묵직한 나락깍지 무게에 취하여 싹둑싹둑 나락 베는 이 흐뭇함을. 가을볕 부시게 내려 세상 온통 서럽도록 훤한데 아무도 모른다 이 기쁨을. 우리 내일 삼수갑산 갈지라도 이 금나락 고그란히 거두어 가마솥 가득 쌀밥 지어 한 두레반에 둘러안고 싶은 소망을. *연기 추수 끝낸 뒤 검불을 태우는 연기가 오른다 예의 빈 들에 보리씨 뿌리며 겨울로 나설 이 삶의 엄숙한 싸움 앞에 펄럭펄럭 솟아오르는 봉화처럼 봉화처럼 *초승달 공판에 나가 빈손으로 돌아오며 길섶에 앉아 해 저문 서편 하늘 노을 바라 우는데 거기 해진 자리 뚜렷이 돋는 서늘한 비수 같은 것 새파란 독침 같은 것 저 속 깊이 번뜩이는 촌철의 희망 같은 것 이윽고 그쪽으로 한 마리 저녁새 싱싱히 날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