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닦으며-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환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었던 뽀요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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