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21. 허형만 시/ 11. 녹을 닦으며

월정月靜 강대실 2025. 2. 9. 17:04

녹을 닦으며-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환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었던 뽀요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