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 모음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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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伽倻琴)
조지훈
1. 휘영청 달 밝은 제 창 열고 홀로 앉다
품에 가득 국화 향기 외로움이 병이어라
푸른 담배 연기 하늘에 바람 차고
붉은 술그림자 두 뺨이 더워온다
천지가 괴괴한데 찾아올 이 하나 없다
宇宙가 茫茫해도 옛 생각은 새로워라
달 아래 쓰러지니 깊은 밤은 바다런 듯
蒼茫한 물결 소리 草屋이 떠나간다
2. 조각배 노 젓듯이 가얏고를 앞에 놓고
열두 줄 고른 다음 벽에 기대 말이 없다
눈 스르르 감고 나니 흥이 먼저 앞서노라
춤추는 열 손가락 제대로 맡길랏다
구름끝 드높은 길 외기러기 울고 가네
銀河 맑은 물에 뭇별이 잠기다니
내 무슨 恨이 있어 興亡도 꿈속으로
잊은 듯 되살아서 임 이름 부르는고
3. 風流 가얏고에 이는 꿈이 가이 없다
열두 줄 다 끊어도 울리고 말 이 心思라
줄줄이 고로 눌러 맺힌 시름 풀이랏다
머리를 끄덕이고 손을 잠깐 쓸쩍 들어
뚱뚱 뚱 두두 뚱뚱 흥흥 응 두두뚱 뚱
調格을 다 잊으니 손끝에 피맺힌다
구름은 왜 안 가고 달빛은 무삼일 저리 흰고
높아가는 물소리에 靑山이 무너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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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의상 ( 古風衣裳 )
조지훈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주 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샅샅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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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조지훈
고운 임 먼 곳에 계시기
내 마음 애련하오나
먼 곳에나마 그리운 이 있어
내 마음 밝아라.
설운 세상에 눈물 많음을
어이 자랑 삼으리.
먼 훗날 그때까지 임 오실 때까지
말 없이 웃으며 사오리다.
부질없는 목숨 진흙에 던져
임 오시는 길녘에 피고져라.
높거신 임의 모습 뵈올 양이면
이내 시든다 설울리야...
어두운 밤하늘에 고운 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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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이야기
조지훈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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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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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야초
조지훈
포플라나무 꼭대기에
깨어질 듯 밝은 차운 달을
앞 뒷산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개가 짓는다.
옛이야기처럼 구수한 문풍지 우는 밤에
마귀할미와 범 이야기 듣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따슨 아랫목
할머니는 무덤으로 가시고
화로엔 숯불도 없고
아. 다 자란 아기에게 젖줄이도 없어
외로이 돌아앉아 밀감을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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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태양
조지훈
꽃 사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자.
가시밭길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른다.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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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꽃
조지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 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 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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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조지훈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인생은 항시 멀리 구름 뒤로 숨고
꿈결에도 아련한 피와 고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괴로운 짐승이로다.
모래밭에 누워서 햇살 쪼이는 꽃 조개같이
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
가련한 거이와 같이 언제가 한번은
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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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病)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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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아가는 길
조지훈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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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조지훈
사랑을 위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아마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이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밤에 울어 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 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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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山房)
조지훈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차운데
볕받은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움직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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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山上)의 노래
조지훈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 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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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문답 山中文答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오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난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매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맛을 알 만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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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침에
조지훈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태초 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와 불의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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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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岩穴의 노래
조지훈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
별과 달이 부서진
샘물을 마신다.
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
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쫓겨 왔으나
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기에
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
꿈이여 오늘도
광야를 달리거라
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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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人
조지훈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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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
조지훈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움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에 저녁 노을이여
이밤 자면 저 마을의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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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면
조지훈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萬里 구름길에
鶴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적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우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紫霞山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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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 (幸福論)
조지훈
1.
멀리서 보면
寶石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데도 없다
幸福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 三間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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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湖水)
조지훈
장독대 위로 흰 달 솟고
새빨간 봉선화 이우는 밤
작은 호수로 가는 길에
호이 호이 휘파람 날려 보다
머리칼 하얀 옷고름
바람이 가져가고
사슴이처럼 향긋한
그림자 따라
산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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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체개현(花體開顯)
조지훈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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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바람
조지훈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넣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사이
햇살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 생전
살의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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