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ㄱ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한강, 「심장이라는 사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8. 새벽에 들은 노래 3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9. 피 흐르는 눈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증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30. 피 흐르는 눈 2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31.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하여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끓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32. 피 흐르는 눈 4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뒷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갇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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