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106

시와 낭송// 비천, 시 박제천, 서수옥

비천(飛天)/ 박제천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의 슬픔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의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떠다니는 물결이었다 물결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아지랑이가 되어 바다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바람이었다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흘러다니는 구름이었다 구름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움이며 미움이고 말씀이며 소리였다 참으로 오랜 동안 나는 떠돌아다녔..

시와 낭송// 이슬의 꿈, 시 정호승

이슬의 꿈 / 정호승 ​   이슬은 사라지는 게 꿈이 아니다 이슬은 사라지기를 꿈 꾸지 않는다 이슬은 햇살과 한 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이슬이 햇살과 한 몸이 된 것을 사람들은 이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나는 한때 이슬을 풀잎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새벽별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슬은 울지 않는다 햇살과 한 몸을 이루는 기쁨만 있을뿐 이슬에게는 슬픔이 없다 ​ ​ 103) 정호승, 이슬의 꿈 https://bit.ly/3o4tuOK [출처] 이슬의 꿈 / 정호승|작성자 방지거

시와 낭송/ /황옥의 사랑가, 시 정일근, 장현주

황옥의 사랑가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首露,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耶蘇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神託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오천리二萬五千里 뱃길 내내 초야初夜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

시와 낭송//무궁화로 떠난 님이시여, 시 김태근, 정서영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 김태근 ​ 꽃이 피고 꽃이 져도 사시사철 그리운 님이시여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 파란 하늘을 바라봅니다 산천초목이 총소리에 흔들리고 만백성이 피 흘리며 억울하게 울부짖는 전쟁터에서 희뿌연 총탄 속으로 사라져버린 님이시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어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올해도 무궁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당신은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부모형제를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하여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신 님이시여 거룩한 님이시여 파리하게 멍든 잎으로 돋아난 무궁화 잎사귀는 당신이 내쉬는 푸른 한숨인가요 고운 자태로 피어난 분홍빛 하얀빛 꽃잎은 당신이 흘린 피 눈물인가요 무궁화가 되어..

육탁 시 모음

포장마차 국숫집 주인의 셈법​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숫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늙은 구두 수선공의 기술​ 닳은 구두 뒤축을 갈기 위해 구..

시와 낭송// 육탁, 시 배한봉, 고순복

육탁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시와 낭송/ /뼈저린 꿈에서만, 시 전봉건, 조성식

뼈저린 꿈에서만/ 시 전봉건,  시낭송 이서윤  그리라 하면 그리겠습니다개울물에 어리는 풀포기 하나개울물속에 빛나는 돌멩이 하나그렇습니다. 고향의 것이라면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지금도 똑똑하게 틀리는 일없이얼마든지 그리겠습니다 말을 하라면 말하겠습니다우물가엔 늘어선 미루나무는 여섯 그루우물 속에 노니는 큰 붕어도 여섯 마리그렇습니다. 고향의 일이라면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지금도 생생하게 틀리는 일없이얼마든지 말하겠습니다 마당 끝 큰 홰나무 아래로삶은 강냉이 한 바가지 드시고나를 찾으시던 어머님의 모습가만히 옮기시던그 발걸음 하나하나조용히 웃으시던그 얼굴의 빛 무늬 하나하나나는 지금도 말하고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한 가지만은그러나 아무리 몸부림 쳐도 그것만은내가 그리질 못하고 말도 ..

시와 낭송//살구나무, 시 유대준, 최현숙

살구나무 / 유대준쏙쏙 뼈가 쑤신다는 기별을 받고 고향에 갔다 검버섯 덕지덕지 핀 스레트 낡은 집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아끼던 옷 주섬주섬 걸치고 병원 가면서도 에미 잘 있고 선이와 철이도 잘 있냐며 어머닌 가족이란 끈을 놓지 않는다 골밀도 검사를 위해 분홍 가운으로 갈아입은 어머니 “빛깔이 참 곱다 이게 공단이냐 다우다냐” 시집 갈 색시처럼 만져보고 비벼본다 그때 젊은 날의 푸른 물살이 주름 속으로 잠깐 흘렀을까 한때 꽃자리였던 엉덩이 테이블에 얹고, 허리 펴지 못한 채 뫼 산(山) 자로 눕자, 이미 이승과 저승이 한 몸으로 섞인 차디찬 생, 그 슬픔이 기계에 읽힌다 바람 든 고목 한 그루 팔 남매 키운 풍성했던 젖가슴이 툇마루에 말라붙은 살구 꽃잎같이 쪼글쪼글하다  늙은 어머니 품고 사는 낡은..

시와 낭송//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배창환,신승희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 배창환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노가다 도목수 아버지 따라서문시장 3지구 부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할매술집에 갔지담벼락에 광목을 치고 나무 의자 몇 개 놓은 선술집바로 그곳이었지 노가다들이 떼서리로 와서 한잔 걸치고 가는 곳대광주리 삶은 돼지다리에선 하얀 김이 설설 피어올랐고나는 아버지가 시켜주신 비곗살 달콤한 돼지고기를 씹었지벌건 국물에 고기 띄운 국밥이 아닌, 살코기로 수북이 한 접시를(!)꺽꺽 목이 맥히지도 않고아버지가 단번에 꿀떡꿀떡 넘기시던 막걸리처럼맥히지도 않고, 이게 웬 떡이냐 잘도 씹었지뱃속에서도 퍼뜩 넘기라고 목구녕으로 손가락이 넘어왔었지 식구들 다 데리고 올 수 없어서공부하는 놈이라도 한번 실컷 먹인다고누이 형제들 다 놔두고 나 혼자만 살짝 불러 먹이셨지얼른..

시와 낭송//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김윤아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彼岸(피안)이 이렇게 가깝다백색 淨土(정토)! 나는 늘 꿈꾸어왔다.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수궁)을.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하늘이 바로 눈앞인데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여기 와서 보니피안이 이렇게 좋다나는 다시 배운다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마음의 수수밭, 1994] [출처]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작성자 푸른들녘

시와 낭송//곡창의 신화,신석정, 낭송 손효성

곡창穀倉의 신화神話/ 신석정     바다도곤 넓은 김만경金萬頃 들을 눈이 모자라 못 보겠다 노래하신 당신과 우리들의 이 기름진 땅을   아득한 옛날에 양반과 벼슬아치와 조병갑이와 아전 떼들의 북새 속에서   그 뒤엔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따라붙은 동척회사東拓會社와 가와노상과 노구찌상과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와 왜놈의 통변들의 등쌀에 묻혀   격양가도 잊어버린 벙어리가 되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과 손주들이 대대로 이어 살아왔더란다.   서러운 옛 이야기 지줄대며 동진강東津江 굽이굽이 흐르는 들을 그 무서운 악몽이 떠난 지 스무 해가 되었다 하여 우리 할아버지들의 피맺힌 옛 이야기를 잊지 말아라.   태평양太平洋을 건너왔을 지리산智異山을 넘어왔을 모악산母岳..

시와 낭송//벙어리의 연가,시 문병란

벙어리의 戀歌        - 문병란온 얼굴을 찡그려 보아도 끝내 말이 되어 나오지 않고 온 가슴을 쥐어짜 보아도 끝내 노래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손바닥 펴 보이듯 내 가슴 당신 앞에 환희 보여 줄 수 있을까? 시월의 과수원 우으로 조용히 떠오르는 달 말이 없어도 온 몸으로 말하는 한 떨기 풀꽃이고져... 어떻게 하면 응혈지고 뒤틀린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인  슬픔을 실꾸리 풀 듯 당신의 발아래 펼칠 수 있을까. 한 송이 꽃으로 피워낼 수 없는 맵고 독한 나의 눈물, 바다처럼 출렁이지 못하는 피아픈 나의 가슴을 열어 안아도 안아도 안을 길 없는 임이여. 온 누리 어둠만 에워싸는데 나의 아씨는 어디서 머리털 깍 이우고 심한 구박 모진 매에 울고 있을까. 나는 이 밤도 온 몸으로 우는 벙어리 조국은 슬..

시와 낭송//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시 이승하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을 깎아드린다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이 발로 아장아장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이 발로 폴짝폴짝고무줄놀이도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뼈마디를 덮은 살가죽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굳은살이 덮인 발바닥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발톱 깎을 힘이 없는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가만히 계세요 어머니잘못하면 다쳐요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맞닿은 창문이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어머니에게 안기어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사회생활을 할 때는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