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5. 김춘수 시/ 5. 순명(順命)

월정月靜 강대실 2024. 11. 23. 07:20

순명(順命)

김춘수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