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가을에// 고재종

월정月靜 강대실 2024. 10. 13. 04:38

가을에       /고재종
 
*가을볕

 
아무도 모른다 이 뿌듯함을.
묵직한 나락깍지 무게에 취하여
싹둑싹둑 나락 베는 이 흐뭇함을.
 
가을볕 부시게 내려
세상 온통 서럽도록 훤한데
아무도 모른다 이 기쁨을.
우리 내일 삼수갑산 갈지라도
이 금나락 고그란히 거두어
가마솥 가득 쌀밥 지어
한 두레반에 둘러안고 싶은 소망을.
 

 
 
*연기

 
추수 끝낸 뒤
검불을 태우는 연기가 오른다
예의 빈 들에 보리씨 뿌리며
겨울로 나설 이 삶의 엄숙한 싸움 앞에
펄럭펄럭 솟아오르는
봉화처럼
봉화처럼
 

 
 
 
*초승달

 
공판에 나가
빈손으로 돌아오며 길섶에 앉아
해 저문 서편 하늘 노을 바라 우는데
거기 해진 자리 뚜렷이 돋는
서늘한 비수 같은 것
새파란 독침 같은 것
저 속 깊이 번뜩이는 촌철의 희망 같은 것
이윽고 그쪽으로
한 마리 저녁새 싱싱히 날은다
 

 
 
 
*들국

 
다 거두어들이고
벼 빈 그루터기만 나란한 들녘
논두렁에 연보랏빛 들국떨기 한창이다
내 아내 눈물 같은 것들
내 어머니 땀방울 같은 것들
내 아버지 맑은 농심 같은 것들
이제 그만 떠나자고
저만큼 둔덕의 갈대꽃 하얗게 손짓해도
울먹울먹 떠나지 못하는
마지막 가을 같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