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학 산책

[스크랩] 문병란시인 초청 강연회(허형만 시인 목포문하생)

월정月靜 강대실 2007. 11. 2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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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2007년 11월 9일 오후 7시

장소:목포 허형만 현대시 연구소

현대시의 이해와 창작


1. 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순론의 편의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몇 가지 정의나 주장들을 예시하여 거기에서 잠정적인 결론을 얻고자 한다.

(1) 시는 자연의 모방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의 저서 詩學(poetica)에서 밝 

     힌 정의이며 유명한 모방론과 정화론의 단초이기도 하다

(2) 詩三百에 一言而蔽之하고 思無邪라 關雎는 樂而不淫하고 哀而不傷이니

     라. 興於詩하며 立於禮하며 成於樂이니라(이상논어) 논어에 공자의 어

     록으로 나타난 그의 詩觀으로 시를 思無邪나 言志로 정의한 데서 보이

    듯이 功利主義的 입장이나 선비나 군주가 필수적으로 닦아야 할 학과목

    이나 덕목으로 간주 되었다.

(3) 시는 자연스러운 강력한 감정의 발로이다(poetry is the sponte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워드워즈) 이말은 영국의 낭만적 호반시인

    워즈워드의 말로서 그의 민요시집 Lyrical ballad의 서문에 쓰여져 있다

    민중의 소박한 감정의 발로에 기반을 둔 그의 시관을 엿볼 수 있다. 이

    경우 ‘감정의 발로’에다 시의 특징을 집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시는 언어의 미적 운율의 창조이다(The poetry of words as the Rhyt

     hmical creation of beauty) _ E.A. poe 미국의 낭만적 탐미적 시인인

    포우의 말로 ‘미적 운율의 창조’에다 촛점을 맞춘 말인데, 장차 시에 있

    어서 유미주의나 탐미적 예술지상주의의 원조가 되는 이론적 근거이다.

(5) 散文은 徒步요, 韻文은 舞蹈이다(폴, 발레리)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이

    었던  발레리는 좋은 시를 사과에 비유한 것으로도 유명하거니와 ‘도보’

    와 ‘무도’의 원관념을 생각하면 시의 본질이나 그 효용성을 알 것이다.

    walking과 dance를 구분할 줄 알면 시와 산문의 차이를 알 것이다.

(6)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정서로부터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

    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그러나 물론 정서와 개성을 가진

    사람만이 도피의 의미를 안다(poetry is turning loose of emotion, but

    an escape from emotion , it is not the expression of personality.

    but an escape from personality. But, of course, only those who

    have personality and emotions know what it means to want to

    escape these things.) T.S Eliot의 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영미 현대시의 주축을 이루는 Eliot의

    말은 의미 심장하고 역설이 숨어 있어 매우 암시적이지만 현대시의 난

  해성과 주지성이 강조된 교본으로서 현대시, 이해에 필수적인 언설이다.

(7)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되며 있어야 한다.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 (Archibold Macleish의 <Ars poetica>에서 <詩> 라는 제목으

   로 쓰여진 詩句에 나온 이 말은 미국의 시인 맥리쉬의 시에 있는 말인데

   주지파나 imagism 시인들의 주장을  엿볼 수 있다.

(8)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의 비평이다(Poetry is at bottom a criticism of

    Life) (M. 아놀드) ‘인생의 비평’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시가 무엇인가

    이해 될 것이다.

(9) 시는 즐겁게 하면서 가르친다.(호라치우스) 즐겁게 하는 것 (쾌락)과 가

    르치는 것 (교시적인 면) 두 가지를 문학의 기능으로 제시한 시관으로서

    그의 선배 루크레치우스의 문학 당의설(糖衣說)과 함께, 시의 기능을 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의이다.

(10) 기타 시는 정열이다 (Poetry is passion.) (밀턴) 시는 긴장이다

      (Poetry is tension) (Allen Tate) 등도 현대시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말이다.

또이색적인 정의들에게도 귀기울여보자

(ㄱ) 시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감정’ 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남아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시는, 정

     말로 ‘경험’ 인 것이다(릴케) ‘감정’과 ‘경험’의 차이를 곰곰이 새겨볼 만한 말이다 .

(ㄴ) 시가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시가 쇠하면 나라가 망한다. (신채호) 茶山

     이나 丹薺의 詩觀은 攻利主義的 애국시에 기준을 둔 사실주의적 문학

     관이다. 실학자(牧民官)의 입장에서 쓴 <적성촌><기민시><유민도><애

     절양> 같은 고발시나 계몽기의 애국시 저항시 등은 이 정의에 합당하

     다 하겠다.

(ㄷ) 시는 악마의 술이다(聖아구스티누스) 신학자의 입장에서 본 시관으로

     감정과 정열, 퇴폐와 향락등 비도덕적 비종교적 요소까지 포괄하는 문

     학이나 시는 종교적 입장에선 위험물로 보았을 것이다. 이상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하겠다는 Palton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ㄹ) 허구는 시인의 특권이다(플리니우스 로마의 황제) 허구(fiction)란 실제

     가 아니라 만든 가상의 세계이다. 창조의 이칭이기도 하다.

(ㅁ) 시의 목적은 진리와 도덕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다만 시를 위

     한 표현인 것이다.(보들레르) <악의 꽃> 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세

     기말의 시인 보들레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대시의 혁명을 일으킨 시인인  데, 톨스토이도 불사루어야 할 시집으로 악평했지만 보들레르의 입지는 좁아지기보다 현대시의 비조로 그 영역이 넓어진 점에 유  의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몇 사람의 정의를 인용하여 시가 무엇인가를 말하기에 앞서 말문을 열기 위한 시도를 해 보았다.

만만치 않은 이 여러 가지 주장들을 종합하여 문학의 기능이나 효용성, 그 태생학적 발생과정을 참고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무엇일까. 괴테는 “위대한 작품들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변화시킬 뿐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가르치는 것 to teach의 기능 , 이는 敎示的인 교훈성이다. 변화시키는 것 to move의 기능 감동과 감화로써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미적 진지성을 의미한다. (Aesthetic seriousness) 할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이츠도 그의 시 <희랍고화병>에서 Beauty is truth, Truth is beauty, 라고 힘주어 강조한 바 있다. 즐거움과 가르침, 쾌락과 교훈 문학은 숙명적으로 이 두 가지의 기능을 본질로 속성으로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는 수많은 문학유산 속에서 톨스토이적인 것과 보들레르적인 것을 아울려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시는 도덕적인가 부도덕적인가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시가 시답게 쓰여졌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중요하다 (오스카. 와일드)> 이 주장은 보들레르의 말을 뒷받침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교훈적이야 아니냐가 아니라 시가 제대로 창작되었느냐 아니냐가 핵심인 것이다. 시는 다른 것을 위하여 봉사하는 기능보다 그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 르네 웰렉과 오스틴 워렌의 <문학의 이론>에서 여러 가지 주장들을 종합하여 언급한 포괄적인 정의를 빌어다 말미를 장식하고자 한다. “모든 예술(문학 기타 제반 예술)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그 속성에서 진실한 것이다” 아름다움ㅡ 미적쾌락 ㅡ즐거움ㅡ진실성ㅡ

교시적 기능ㅡ교훈성ㅡ 진지성 이 두가지 요소는 시에 있어서도 숙명같이 느껴진다. 본질과 속성을 뒤바꾸어도 그 작품은 아무 하자가 없을 것이다.

시인은 현실 속에 살면서 누구보다 더 진실하고 참다운 삶의 자세로 임하여 체험을 겪는 성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체험을 (현실에서 느낀 감격이나 온갖 감동적사건) 운율적인 언어에 의하여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시인이라 할 것이다.

 

2. 시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1) 언어

모든 예술은 표현이다(Art is expression) 라고 말한다. 예술의 시작도 표현이요, 끝도 표현이다.  표현되지 않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으로 작품 이전의 소재로서 아직 질서에 이르지 않은 혼돈 상태이다. 영국의 시인 콜리지는 <散文은 단어들이 가장 좋은 순서대로 배열된 것이고 韻文은 가장 좋은 단어들이 가장 좋은 순서대로 배열된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표현은 어떤 형식에 의한 형상화이고 혼돈(막연한 감정이나 소재)에서 질서 (창조)를 얻는 것을 말한다. 흔히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니 장인(匠人)이니 언어의 건축이라고 말하는데, 이 모두 표현을 두고 한 말이다. 본래 expression의 영어단어는 ex(밖으로) +press(누르다. 밀다)의 두 단어가 합하여 된 말로 ‘밖으로 짜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表出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표현 본능(self- expression instinct)을 문학의 발생으로 보는 것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한자의 表字는 衣 +毛 의 會意文字로서 속에 모피를 입고 곁에 상의를 입는다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이처럼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출시켜 형상화 하려면 어떤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문학의 경우 이 표현수단이 바로 言語가 될 것이다. 그래서 시는 ‘언어 예술’ 이라고 한다.

언어란 의미라는 내용을 형식이라는 음성으로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생활도구이다. 시도 이 언어의 기능을 활용한 언어예술이다. 흔히 말하는 5대 장르.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 모두 언어에 의하여 표현된 형상물이다.

언어의 기능을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형식 음성_ 음악성(리듬이나 압운등)_순수시(김영랑의 시)

언어               개념(관념)- 철학시-니체의 철학시, 관념시_한용운의시

        내용 의미             경향시, 이데올로기적인시 목적시

                   형상(그림)- 회화시. 사물시 즉물시,

이것은 언어의 특성을 도식화한 것이고 언어의 음악성, 개념성, 형상성 3가지 요소가 적절히 잘 어울어진 시가 언어예술로서의 충분조건을 잘 갖춘 시가 될 것이다.

 

2. 情緖

언어의 특징을 이해하였다면 다음 단계는 “情緖的表現”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내용이라는 기록면과 형식이라는 표현면 양면을 가진 하나의 유기체이다. 따라서 이해건 창작이건 이 양면의 고찰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

문학을 표현하는 4요소란 情緖, 思想, 形式, 想像을 드는데 사상은 밑바닥에 숨어 있는 작자의 의도, 인생관, 자기주장이며 거죽에 드러날 때는 형식요소와 정서적 표현인 것이다. 구체적 정황과 감각 감정을 정서적으로 표현하여 그 밑바닥에 숨겨진 생각, 사상이나 관념을 넌지시 완곡하게 전달하게 된다.

인간은 四端七情論에 의하면 仁義禮智와 喜(기쁨) 怒(노여움) 哀(슬픔) 樂(즐거움) 愛(사랑) 憎(미움) 懼(두려움) 憂(근심) 思(생각) 欲(五욕등)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性情과 욕망 등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거기에 부딪쳤을 때) 감정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정서(emotion)라고 한다. 흔히 7대 정서니, 8대정서니 하여 예술 표현에 있어 한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랑(love) 미움(hate) 기쁨(delight) 슬픔(grief) 원한(resentment grude) 분노(indignation) 공포(horror) 존경(veneration) 찬탄(Admiration) 기타연민(fity) 우울(melancholy) 향수(nostalgia). 情恨, 怨恨에서 연유된 恨의 정서등 주로 이성적인 면보다는 감성적인 면이나 욕망(재욕, 식욕, 명예욕, 성욕등) 등에서 나타나는 정서를 통하여 형상화되는 매우 주관적 감정의 산물이 시이기도 하다. 描寫나 敍述 대화가 위주가 되는 소설보다 시는 주관적 감정을 직접 표현하기 때문에 이 정서가 매우 중시된다. 그래서 T.S Eliot도 <시는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이다>라고 했는데, 사상을 진술조로 서술하기보다 정서로써 형상화하며 관념적 표백보다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하여야 시적 감동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시의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정서적 표현에 의한 정서적 미감이며, 설명(expotion),  논증(demonstration) 서술(narration)등 설명적인 기술법과 다른 함축적 표현이 바로 詩이다.

“호수‘ 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육지가 우묵하게 패이고 물이 고여 있는 곳‘ 이라 풀이 되어 있다. 이것이 설명이고 외연적 언어(denotative language) 이다 아무런 유추도 암시도 없는 무미건조한 사전적 뜻이다.<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 //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이것은 <호수> 라는 제목으로 쓴 정지용의 시이다. 이 경우 ’호수‘ 는 사전적 뜻과는 전혀 다른 ’보고 싶은 마음 (그리움)‘ 의표상물로서 내포적 언어(connotative language)로써 함축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ㄱ)<菊花: 국화과에 딸린 관상용으로 심은 다년생 풀, 줄기는 조금 목질성을 띠었고 보통 높이는 1m 쯤 됨. 잎은 어긋 배겨 붙었고 난형이며 결각 또는 톱니가 있음. 꽃은 두상화로 테두리는 설상화관, 가운데는 관상화관으로 대개 가을철에 핌. 원예품종은 수백 종이나 되는데 꽃 빛이나 꽃 모양이 여러 가지임. 꽃이나 잎을 관상용 외에 먹는 종류도 있음.> 이글은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기위하여 쓴 설명적 글이다. 감동요소가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글이다.(ㄴ) <이즈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80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이 푸르게 젖어 있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모밀밭께로 흘러간다.(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ㄱ)은 국화의 식물학적 설명 (ㄴ)은 소설의 지문으로서 묘사적인 글이다. 썩 시적 분위기에 가깝게 서정적으로 묘사 되어 있지만 시의 함축적 표현과는 다르다.

<(ㄷ)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춘풍 더 보내고/ 낙목 한 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고시조 이정보) 국화를 소재로 하여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지닌 고결한 충의지사나 선비를 유추시키기 위한 시적 표현 이다. <국화> 라는 제목은 같아도 그 문장의 구조나 목적은 전혀 다르다, 설명적 기술과 정서적 함축적 표현과의 차이다.(ㄹ)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솟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네 노오란 꽃잎이 필랴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이 시는 작은 국화 한 송이로써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원리와 억겁의 인연론에 이르기까지 확대 하였다. 한 송이 꽃이 피는데도 전 우주가 동원되고 온갖 인연이 작용하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자기완성이 이루어지기 까지도 온갖 과정이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방황, 고뇌, 오류, 그리움 등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이 원숙미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가위 단어가 지닌 마술의 경지가 곧 정서적 표현을 통한 시의 함축미이며 메타포(metaphor)의 기능임을 이해할 것이다.


(3) 정서의 갈래와 시의 아름다움

  정서적 형상화를 통하여 이룩된 시는 정서의 갈래에 따라 그 미적     아름다움이 구분된다.


(1)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燃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 杜甫의 絶句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 빛이 푸르니 꽃은 불타듯 붉다

   올 봄도 보니 또 지나가나니

   어느 날이 고향에 돌아갈 해인고.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노래한 대표적인 시이다. 피란 중 아름다운 봄철을 맞아 (起聯과 承聯) 고향에 돌아가지 못함 (轉聯)을 탄식하며 언제 돌아갈 것인가 그날을 기대해 본다. (結聯)


(2) 해만 저물면 짭조름히 저린 향수

    오늘도 나그네의 외로움을 차창에 맡기고


    언제든 갓 떨어진 풋 송아지 모양으로

    안타까이 못 잊는 향수를 반추하며


    아늑히 살어둠 깃들인 안개 마을이면

    따스한 보금자리 그리워 포드득 날러들고 싶어라

          <조벽암의 향수>

‘짭조름히 저린 향수’ ‘갓 떨어진 풋 송아지’ ‘살어둠 깃들인 안개마을’ ‘포드득 날러들고’ 등 언어 자체가 살가운 고향의 맛을 한껏 지니고 있다.


(3)秋風惟苦吟, 擧世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최치원의 秋夜雨中

   가을 바람에 애타게 읊조려도

   내 마음 알아 줄이 바이 없구나

   창 밖엔 삼경 빗소리 처량한데

   등불 앞에 달려가는 만리길 고향이여

번역으로선 그 시흥의 반도 전할 수 없는 5언 절구의 묘미가 절로 고향 생각과 묻어 날 것 같은 향수가 어려 있는 시이다.

정지용의 <향수> 포스터 가곡의 <머나먼 스와니강>이은상의<가고파>등 모두 고향을 소재로 한 향수를 노래한 시편들이다. 정서로 말하면 슬픔(grief)의 영역에 속하겠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애틋한 느낌이 있어 독특한 애수라 하겠다.


(4)利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梗인 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李兆年의 고시조)

이 시는 연모의 정(그리움)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이 시에는 다정다감한 춘심에 잠긴 봄밤임에도 연모의 대상(님)이 없다 그래서 그는 홀로 다정도 병인 양하여 그리움에 잠 못 들여 탄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연모의 정을 애상적으로 읊고 있다. 사랑을 충족할 조건은 공간적 장소(이화꽃이 핀 뜰) 분위기(춘심을 돋구는 자규소리) 여유와 넉넉한 시간(달빛 어린 한 밤중) _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대상이 없다. 그래서 결국 다정함은 병이 되고 만다. 한국의 전통적 情恨의 정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로 그것은 김소월의 시에서도 계승된다. 소극적이며 애상적 정서로서 기다릴 줄은 알되 찾아갈 줄은 모르는 다정병의 전형이다. 이 애상의 정서는 감상(sentimental)이라고도 하는데, 이 감상주의(sentimentalism)는 낭만주의의 한 모습이다.

혁명적 운동(sturm und drang)이었던 이상주의적 낭만주의가 절망했을 때 나타나는 창백함인데, 1920년 백조파도 이런 경향을 지녔다. 건강성을 잃을 때 퇴폐와 탄식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의지나 지성으로 조절을 하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5) 잊지 말고 생각하시오, 만일 운명이

    나를 그대로부터 영영 떼어 놓거든

    내 슬픈 사랑을 생각하시오

    헤어진 그 시절을 생각하시오_ 뮈세의 잊지 말고 생각하시오.


(6) 내가 죽거들랑 사랑하는 이여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셔요

    그리고 내 머리맡에 장미도

    그늘 지는 삼나무도 심지 마셔요

    나를 덮을 푸른 풀이나

    소낙비와 이슬에 젖게 하시고

    그리고 날 기억하고 싶으면 기억하셔요.

    또 잊고 싶으면 잊어 주셔요. -c.로제티 묘비명에서

두 편의 연시는 변심한 연인이나 미적지근한 자세의 연인의 마음을 돌리거나 묶어 둘려는 의향에서 비장미를 가미한 애상조이다. ‘운명이 떼어놓거든’ 이나 ‘죽거들랑’ 같은 표현이 가정인 점이 그러하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런 비장조의 감상시가 유행했다.


(7)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_ 김소월의 초혼에서

이런 경우에는 원망이나 애원 같은 것이 없다. 절대적 입장에서 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생각은 중요치 않다. 오직 자기 생각 망부석적 情操를 노래하면 그만이다.<진달래꽃>에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哀而不悲) 克己 속에 감추어진 일정양의 모진 마음이 있지만 , 초혼에는 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에는 생사를 초월하고 있다. 박제상의 부인이 읊었다는 <치술령곡> 이래 일편단심류의 매운재 노래는 우리 시가의 특이한 恨의 정서와 접맥 되어 있다. (恨)은 슬픔의 범주에 드는 정서이지만 怨恨과 情恨은 그 바탕이 다르다. <정과정><가시리><진달래꽃>은 情恨이다. 한 남성을 사랑하는 직업이 아닌 妓流詩人 황진이의 시조도 情恨의 정서이다.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라.> 이 경우 諦觀이 곁들여 있는 情恨이다. 그러나 그의 숙부에게 왕 자릴 빼앗기고 영월 배소 청령포에 쫓겨나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피눈물을 뿌리며 쓴 단종대왕의 시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하여 처형당한 전봉준 장군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쓴 시, 노량진 처형장에 끌려가며 썼다는 성삼문의 시 등은 원한의  정서이다.


(8) 一自寃禽出帝宮, 孤身隻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岺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천고 원한 품은 채 구중궁궐 쫓겨나와

   영월이라 깊은 산중 혈혈단신 될 줄이야


   밤이면 밤마다 뜬눈으로 잠 못 이루고

   사무친 원한 해마다 내 설움 끝이 없네.


   두견성 끊인 새벽녘 산봉에 새벽달 여위고

   붉은 피 흐르듯 봄 골짝에 떨어진 꽃잎 붉게 타네.


   아아 하늘마저 귀멀어 이 하소 아니 들으시네

   어찌타 나 홀로 설움 겨워 목이 메이나

         한국 명인 시선집에서  端宗大王 寧越樓에서 읊은 子規啼

이 시는 소년 왕 단종이 수양과 그 일파에게 쫓겨나 영월배소에서 子規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새의 슬픈 울음에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여 읊은 시이다. 얼마 후 수양의 추종자들은 후한을 없앤다고 그를 사약으로 죽였다


(9) 詩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謨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    _全奉準의  殞命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나를 따랐건만

   시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 무슨 허물이랴

   나라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있어 알아 줄고

이 시의 정서 또한 비장미의 예가 된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며 자기의 살과 피를 이 땅에 뿌려 달라 유언 할 때 남긴 시이다. 그는 일인의 재판을 받아 역도로 몰렸고 효수당하여 천고의 원한을 남긴 채 지금껏 민족주의자들의 가슴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恨은 원한과 저항의지와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이 복합된 비장미 바로 그것이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민중들이 생존권을 빼앗기고 형제가 도륙 당했을 때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복수의 일념이 응혈진 슬픔으로 오래오래 승리(복수)의 그날까지 살아남으려는 생명력으로서의 슬픔이다.


(10)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매고 나간다

     만장도 명정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떼매어 나온 옥문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악재를 넘는다 - 심훈의 挽歌에서


(11) 이제 또 한 사람의 朴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上海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朴君은

     눈을 뜬 채 동공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朴아 朴君아 XX야!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네 殘骸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네 동지들이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호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심훈의 그날이 오면에서 朴君의

        얼굴 후반부

위의 시 두 편은 심훈의 시집<그날이 오면>에서 발췌한 것이다. (10)은 옥사한 동지의 시체를 떼매고 가는 만가(Elegy)의 일부분이고 (11)은 감옥에서 죽어나온 동지의 얼굴을 보고 그 운명하는 순간에 복수를 다짐하여 쓴 시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한의 정서를 양산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시의 정서를 비장미 한의 정서라 할 것이다. 영국의 시인 알프렛 오웬의 <보다 큰 사랑> 윤동주의 시<서시> 이육사의<광야><절정> 유치환의 <생명의서>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 김지하의 <황토길> 김남주의<옥중시 편> 5.18 당시 읊은 <추모시><투쟁시>등도 모두 비장미의 정서를 기조로 하고 있다.


(12)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_ 박목월의 청노루


(13)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仙桃花

     水晶 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ㅡ 박목월의 모란여정

향토색이 깃들인 우아하고 청초한 서정미 서경미가 수묵화의 담백한 운치를 띠고 있다. 여백의 미를 한껏 살린 청록파의 시 전원적 목가시, 자연파적 관조시 에서도 이러한 한국적 고전미는 윤선도 이후 우리문학의 멋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조지훈의 <승무><낙화><파초우><고품의상>등 선미가 깃들인 고아한 풍류도 절로파 은일파적 특징이라 할 것이다. 우리 시의 귀중한 정서적 미감이기도 하다.


(14) 남으로 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ㅡ 김상용의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시의 핵심은 ‘왜 사냐건 웃지요’ 이다. 이른바 중국의 (詩仙)을 자처했던 李白의 <山中問答>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전원파 閑居나 隱逸, 淸貧樂道, 도연명의 낙향시<귀거래사> 정신에 연결되어 있다. 버드나무 다섯 그루 심을 땅이 있으면 벼슬하지 말라고 벼슬을 버리고(五斗米折腰)가 싫어서 <東籬下採菊, 悠然見南山> 하니 진리가 그 속에 있다고 한 <五柳先生> <山절로 水절로 山水간에 나도절로>에서 보여 지듯이 가장 이상주의적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이 은일파 표일파와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참여파 저항파의 입장 일 것이다. 인생파 자연파 시의 시적 당위성이나 인생관조적 초탈은 시적 아름다움의 윗자리를 점유할 수도 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내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나 <괜찮다>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내리는 눈발 속에서> 그의 <동천><신라초><떠돌이의 노래><추천사> 등 일련의 전통시들은 우리의 귀중한 정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산벌에서 옥쇄한 5천 결사, 우금치에서 금강을 피로물들인 동학군의 죽음, 6.25, 4.19, 5.18, 이 땅에서 수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역사 앞에서 한반도 전쟁공포가 상존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비껴가기가 더구나 괜찮다고 김빼는 소리를 한다고 초탈과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화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횡포와 온갖 부조리가 판을 치는 현대의 野에 살고 있는 것이다.<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이라 허황한 취흥을 흉내 내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닐까.


(15) 갈색 눈의 천사처럼

     나 그대의 침실로 찾아가

     밤의 어둠과 함께 조용히 그대에게 숨어들리

     그리하여 나 그대에게 갈색의 여인이여

     달빛처럼 차가운 입맞춤과

     구덩이 주위를 기어 다니는 뱀의 애무를 하여 주리


     그대의 생명과 젊음에

     남들 애정으로 대하여도

     나는 공포로 군림하리 ㅡ 보들레르의 유령

혼열녀 잔느 뒤발과의 육욕적 사랑을 읊은 퇴폐미의 한 예가 된다. 세기말적 상징주의 예술지상주의적 그의 Decadance 문학은 수많은 논쟁을 일으킨 바 있고 그 아류자들에 의하여 보들레르병을 시인들이 겪어야 할 시적  홍역으로도 비유했지만, 지금은 현대시의 경전이나 고전처럼 모든 전위문학 포스트모더니즘의 할아버지격이다. 따라서 이 시대 퇴폐미는 새로운 모더니즘의 한 모습일 수도 있다. 톨스토이의 예술론에 의하면 불량끼문학이지만 그 불량끼가 현대성이라고 주장해도 요새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보들레르나 랭보 베를렌느는 이미 졸업한 것처럼 태연자약한 지도 모른다. 술(포도주) 아편 섹스 세 가지를 권장하며<인공낙원>을 저술하기도 한 그를 흉내내기란 그리 만만치 않다.


(16) 구름장 열어 젖히매

     둥두렷이 나타난 달아

     그대 흰구름 쫓아 서으로 떠나감이 아니냐

     나는 흰구름 쫓음이 아니로세

     멀리 지상을 굽어보니, 새파란 알천 냇가에

     기랑의 모양이 있어라! 이제로부터 내가 모래벌 위에

     낭의 가지가 있던 그 끝을 좇으려 하옵네

     아 잦가지 높아 서리를 모르듯이

     더 없이 고귀한 화랑장이여 ㅡ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제목에 보여 지듯이 화랑장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다 1500년 전에 지어진 서정시, 그것도 향찰이란 불완전한 문자로 쓴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뛰어난 시이다. 이와 같이 신, 지도자, 자연, 연인, 조국 등을 찬미하는 정서가 찬미 찬탄의 정서로 위대성 숭고미 경건성을 지닌다. 균여의 <보현십원가>나 조선조<용비어천가>등은 이에 해당한다.


(17) 차린, 그대로 오셔요. 화장에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만일 그대의 쪽       진 머리가 흐트러지고, 머리칼 갈라진 곳이 바르지 못하며, 허리띠의        리본이 매어 있지 않더라도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차린, 그대로 오셔

     요. 화장에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ㅡ 타고르의 園丁에서


(18) 어느 5월밤의 매력이여

     그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느뇨.

     사랑에 그득한 몸둥이 같이

     그대 나에게 오는구나

     허지만 영혼이라 나를 생각지 말라

     풀잎처럼 수풀 속 새들처럼

     내 지극히 겸손한 마음에서 사노니._ 노아유 백작부인 어느 5월밤의 매력

       에서


(19) 나무, 어찌하여 신께선 너에게 영혼을 주시지 않았는지

     나는 미루어 알 수도 없지만

     언제나 빈 곳을 향해 두루는 희망의 척도_ 너의 머리는

     내 영혼이 못 박힌 발부리보다 아름답구나!_ 김현승의 나무와 먼길 제 

      4연

타고르의 기탄쟐라<Gitanjali> 신에게 바치는 송가 혹은 제물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뱅갈어로 쓰여 졌고 자신에 의해 영역한 다음 예이츠의 서문을 달아 영국에서 간행 큰 반항을 일으켰고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우리 스스로 신 앞에서 매일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친 이 송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18) (19)는 모두 자연을 찬미하는 한 예가 될 것이다. 茶兄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등 종교적 경건한 시로서 경건미 숭고미의 시를 썼다. 밀턴의 실낙원 단테의 비아트리체 송가(신생), 정송강의 <사미인곡>등 연군의 정을 노래한 시. 만해의 <논개의 묘 앞에 그 애인이 되어> 깉은 시도 참미와 경건미의 한 예가 될 것이며, 정인보의 <자모사> 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 시조도 같은 정서에 속한다 하겠다. 다시 한번 시는 관념의 표백이 아니라 정서적 형상화이며, T,S Eliot의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이란 문구를 결구로 이 항목을 끝맺는다.


시 창작을 위한 강의 안

제 1 강좌 좋은 시 감상

좋은 시를 쓰려면 우선 좋은 시를 감상해야 한다. 그러면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함인가. 정평이 나 있고 적어도 한 시대(50~100) 묵혔어도 낡지 않고 읽는 이에게 늘 새로운 맛이 나게 하는 시, 이른바 교과서적인시, 시의 정도 위에서 쓰여 진, 뭇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런 시를 의미할 것이다.

고전이란 낡았으면서도 온고지신 할 수 있는 새로움을 창출 해내는 창조의 샘물이 솟아나는 그런 작품인 것이다. 그러기에 고전적 명작은 몇 백년 몇 천년 후에도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는 정화감을 가져 다 주는 신비한 매력이 풍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시론에서 시는 사상 감정의 정서적 형상화라고 배웠다. 정서란 바로 미적 감동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상 그 자체는 관념적 인식이지 미감을 통한 감동요소는 아니다. 형상화란 이미지(心象 image)를  통한 구체적 모습. 비유나 상징 메타포에 의하여 마음의 그림(mental picture)을 그려 주어야 한다. 시각적 회화적 시를 쓰는 것도 그 방법의 하나이다. 특히 모더니즘 중 이미지스트 들은 객관적 상관물에 의한 형상화를 좋은 시적 표현으로 주장하였다. 동양의 한시는 본래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시를 “ 영혼의 회화”라고 정의 하였다.


(1)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으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_김광섭의 <마음>

‘마음’ 은 관념어이다. ‘사랑’ ‘고독’ 과 같이 형과 색이 없는 추상적 인식이 세계이다. ‘영혼’ 이 있다고 믿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그려 볼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우선 이 마음을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비유적 방법으로 메타포를 만들었다.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 (은유. 암유)이 그것이다. 이 경우 마음이 원관념이고 ‘고요한 물결’ 이 보조관념이다. 이 보조관념이 마음의 구체적 모습, 고요함과 흔들림이라는 눈을 통해 인식되는 물결을 통해 마음을 유추케 한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김동명의 내 마음)>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김광균의 추일서정)> 도 같은 표현법에 의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물결이기에 바람에 흔들리고, 맑으면 수면에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가변성임을 나타난다.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으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등 수많은 유혹자가 마음을 고요하게 놔두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항상 유혹에 약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막연했던 추상적 마음의 세계가 구체적 사물에 의하여 그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잡다한 유혹을 이기고 마음의 침잠을 이룬다. 시인은 관조적 상태가 되었을 때만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의 경지에 이르러 시가 쓰여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조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 이상적 연인상의 표상으로나 생각해 놓을까. 그 사람이 오는 날 마음이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는 것이다> 이 경우 꿈은 헛된 욕망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 잡몽을 생각할 수도 있다. 경건하고 고결한 수양된 마음으로 그 님을 기다리겠다는 자기 마음의 다짐이 아닌가 싶다.


(2)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_김현승의 <무등차>

시(2)는 김현승의 <무등차>라는 시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시일수록 영혼을 맑히는 정화감을 준다. 이 시의 중심 행은 끝 행<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이다. ‘외로움’ 은 고독의 감정과 같이 혼자 있거나 사귀는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쓸쓸한 감정이다. 우리 말 사전 가운데 수십 만 단어중 매우 별 볼일 없는 형용사이다. 그런데 이 무등차란 시에 와서는 매우 귀하고 향기로운 단어로 변해 있음을 본다. 김현승 시인의 형상 능력 그의 마술적 언어표현 능력이 그 언어에 향기를 풍겨나게 만든 것이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깊어가는 가을 밤 외로운 시인이 무등차를 끓이고 있는,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어드는 남쪽 11월 밤의 그 호젓한 정서가 한 잔의 작설차처럼 마음 속에 향기롭게 스미는 것 같다. ‘갈가마귀 울음’ ‘씀바귀 마른 잎’ 이 이 외로움을 감각화 시키는 상관물로서 남쪽 11월의 긴긴 밤이 향기로운 무등차로 외로움을 달래 준다. 담백한 차처럼 맑은 정화감을 주는 서정시다.


(3)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마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_ 문병란 의 호수

(3) 문병란의 <호수> 라는 시이다. 어떤 시연구가는 그의 <한국현대시 해설서>에서 서정적 상징시라고 분류하고 호수는 물이 괴는 웅덩이 지만 여기서 수많은 사람의 집결과 교감이 이루어지는 만남을 호수로 설정하여 이채로운 서경을 이루었다고 해설하였다. 그보다는 오히려 구상적 객체인 호수를 추상화시킨 무한한 기다림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영원한 인간의 숙명적 고독감 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3연에서 수많은 사람은 군중들,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의  연인, 감상자마다 다 다른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작자는 어쩌면 아무 대답도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의 종구는 바로 수수께끼  같은 숙명적인 어떤 사랑의 암시일지 모른다.


(4)

   가을 날

   빈 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긴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_문병란의 <꽃씨>

인천 지역의 여고에 근무하는 국어교사가 학생들 지도에 참고가 될만한 작자의 변을 부탁해 왔다. 나는 무척 어려운 부탁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느 시론 교수가 자기의 시를 해설하여 유명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의 강의 시간에 학생들 틈에 끼어 청강을 했다. 그래서 그는 “저건 내 시가 아니라 자기의 시 군“ 하고 강의실을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 시인이 시를 쓰지만 시인 자신보다 평론가나 독자가 그 시에 대해서 멋대로 이야기 한다. 그럴 권리가 있다 시는 써서 시인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이미 독자의 것이니까. 어떤 시인은 어느 문예지에서 격정의 세월을 보내고 노년기에 접어든 시인의 열정이 한 알의 꽃씨로 여물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 시는 60년대 중반 순천고 교사로 재직 시 추천 받을 무렵 썼던 초기 시로 제1시집에 수록 되어 있다. 앤솔로지로 간행된 명시 모음집이나 여러 잡지들에서 재수록 하여 요새는 교재에까지 실린 것이다. 그러니 이미 이 시는 내 손을 떠나 독자의 시가 된 지 오래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시의 경지는 너무나 넓다 힘과 열정으로 압도하는 동적인 다이나믹한 시들이 지니 감동은 또 다른 미감과 맛을 지니고 있다.


(5) 태양아

   다만 한번만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어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우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 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새여가며 기다린다.

      -김기림의 <태양의 풍속>

30년대 반 낭만적 기수로서 <오전의 시론>을 썼던 그는 1920년대 우리나라의 병든 낭만주의 시를 이렇게 질타하였다. <태양의 風俗> 1934.10.15 서문에서 <탄식. 그것은 신사와 숙녀들의 오후의 예의가 아니고 무엇이냐, 비밀. 어쩌면 그렇게도 분바른 할머니인 19세기적 <비너스>냐 ? 너는 그것들에게서 곰팽이의 냄새를 맡지 못하느냐? 그 비만하고 노둔한 오후의 예의 대신에 놀라운 오전의 생리에 대하여 경탄한 일은 없느냐? 그 건강한 아침의 체격을 부러워해 본 경탄한 일은 없느냐? 그 건강한 아침의 체격을 부러워해 본 일은 없느냐?> 그가 어두운 낭만주의의 병실에서 기다린 태양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낭독해 보면 이 시의 열도와 힘을 느낄 것이다. 반 낭만적, 반감상적 태양처럼 밝고 강하고 어족들의  아침처럼 싱싱한 오전의 건강한 시를 염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6)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나는 죄인처럼 숙으리고

   나는 꼬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왔단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면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은 밤 우에 마련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가슴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츨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 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 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_ 이용악의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이용악의 시는 제목에서부터 압도해 온다. 핍진한 애정과 애국심에 자신 있는 사람만이 조국이나 국토산하 조국을 ‘너’ 라고 소리쳐 부를 수 있다. 식민지 백성, 집과 땅을 빼앗기고 북간도로 북만 국경으로 일자릴 찾아 망명길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떠나는 사람들, 응어리진 한이 절절히 압도해 오는 절규와 영탄이 안으로 응결되어 있다. 원한의 정서 망국의 恨 바로 그것이다. 1연에서 죄인처럼 숙으린 그는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두만강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앉아있다. 2연에선 얼어붙은 강, 그러나 얼지 않은 하나의 다른 강이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는 광복에의 염원을 안고 있다. 3연에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 아직도 많은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아침을 향하여, 나의 젊은 넋은 얼어붙은 듯 서 있다. 욕 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사방을 에워 싼 어둠 속에서 막막한 도피는 그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래서 그는 외친다. <잠들지 말아 우리의 강아!> 사실은 강보다도 자기에게 말하는 독백이다.<얼음길>은 거츨고 길은 멀다, 강을 건넌다고 다음 날 행복한 아침은 아무데서도 기약이 없다. 그래서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 앉은 /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탄식한다. 안으로 응혈진 통곡이 장송곡처럼 무거우나 다음 날엔 행진곡이 될 것을 믿는 역사의식이 강력하게 응결되어 있는 시다.

내개 길을 묻는 사랑이여

       -고희를 위한 메모



여기 한 송이 꽃은

열흘 붉은 짧은 목숨이지만

그는 필 때보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피는 꽃에 기약턴 마음

지는 꽃에 눈물 맺은 열매

맹세보다 사랑은 더욱 길다


오래오래 피려 하지 말아라

붉게붉게 타려 하지 말아라


저만치 놓인 인생의 갈림길

아니오와 예가 길을 막고 있다


하여가를 부를 것이냐

단심가를 부를 것이냐

부처님은 빙그레 웃고 있다


사랑이여,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

빛깔은 시들고 향기는 썩는다

머물다 가는 시간 앞에

오늘 고희를 위한 메모를 쓴다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죽을 뿐이다_ 헤밍웨이.

이 아침 초대받지 않는 손님

세월이 옆문으로 와서 노크를 한다.


2006년에 간행한 <민들레 타령>에 수록되어 있고 그해 詩竟에 발표한 시이다. 흔히 70대를 古稀, 從心이라고 한다. 고희는 杜甫의 曲江詩 ‘人生七十古來稀’에서 유래된 말이고, 從心은 孔子의 어록 논어의 七十而所欲從心不踰矩

(70이 되면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데서 온 말이다. 영원의 청춘시인, 그런 헌사가 아스라이 저물어 가고 어느덧 , 70세 인생의 종착역에 거의 도달한 느낌이다. 생명지수를 넘긴 나이 아픈데도 많고 나의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 역할도 이젠 뒷전이다. 떠날 준비를 하는 그 동안 빚지고 살아온 세상과의 화해의 뜻으로 쓴 시이다. 끝끝내 한길을 가겠다는 나름대로 자기정리를 노래하였다.

출처 : 서은문학회
글쓴이 : 문재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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