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가을 편지//원태연

월정月靜 강대실 2007. 7. 19. 09:33
가을 편지 최종수정 : 2005-08-10 03:32:41  


가을 편지

                            원태연

 
오늘은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며칠의 밤샘 작업으로 어제 작정을 하고
오래 자서 그런지 다시 눈을 붙여보려 해도 마음처럼 쉽지가 않군요.
 이런 날은 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져 생각들이 한참 많아지는데……. 글을 쓰겠다는
놈이 생각이 많아질까봐 두려워 하다니, 이제 펜을 버릴 때가 왔나봅니다.
참! 그래서 눈을 떠 무엇을 할까 생각을 했지요.
 물론 너무나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먼저 생각난 것도
당신이 나를 위해 만들어 주셨던 편한 미소였지요.
그래서 오늘은 작정을 하고 잠시 나타났다 이내 사라지는 그 얼굴을
머리 안에 오래 잡아둬 보려고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인사말이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비오는 목요일 저녁, 두고 가신 체크 무늬 우산을 보며 얘기하듯,
사랑하는 당신, 요즘에는 어떤 우산을 쓰고 다니시나요?
 할 수도 없고, 시계 좀 보고 살라 하다, 걸어둬 봐야 보지도 않을
무용지물이니 들리는 것으로 걸어놔야 한다며 심사숙고 끝에
골라 걸어주신, 시간마다 어김없이 뻐꾹대는 뻐꾹이 시계를 보며 얘기하듯,
 사랑하는 당신, 시간을 알고 살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할 수도 없고, 하루에 세 번 먹어야 하는 감기약을
일주일에 두 개밖에 안들고 잊고 가신 감기약을 보며, 얘기하듯,
사랑하는 당신, 요즘은 감기와 별로 안 친하시죠?  할 수도 없으니,
도대체가 사랑하는 당신 빼고는 말로나 글로 아니면 생각으로
당신을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인사는 생략하고 편지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생략하고 안부를 좀 물어봐야겠는데
이런, 다짜고짜 건강을 묻자니 평소에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들리실 테고, 졸업한 지 한참 됐을 학교 생활을 물을 수도 없고,
즐겨 들던 치즈케�은 여전히 하루에 한 조각씩 드시는지 물으려니
무슨 치즈케�에 중독된 사람처럼 느껴질까봐 그것도 그렇고…….
 이래서 사람은 서로 좀 만나면서 살아야 하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글 쓰는 직업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 한 장 제대로 못 쓰고 있으니,
이거 어디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당신이 언제나 눈에 힘을 주고 강조하셨죠!
나는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려고 글 쓰는 놈이 아니라,
세상 한 번, 내가 느끼는 이 세상 한 번 그대로 표현코자 글 쓰는 놈이니
조금 전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그럼, 내 얘기를 들려드려 볼까요.
 뭐, 편지라는 것이 내 얘기 상대와 얘기 주고 받으며
써내려가는 것이니 그것도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닐 것 같군요.
 가만있어 보자,…… 어떤 얘기를 해드릴까?
 살이 너무나 많이 빠져버려, 건너편 유선 슈퍼 아저씨가 더 이상 내게는 술을 주지
않는다는 걸 말씀드리면 또한 걱정하느라 속 꽤나 상해버리실 테고,
사랑하는 당신이 좋아하셨던 이 목소리는 언제부터인지 쇳소리가
많이 섞여나와 주위에서 담배를
아예 끊어버리라는 얘기가 많이 들려온다고 말씀드리면 그나마 아름답게 기억되는
나의 모습의 그나마도 사라져버릴 테고,
그러자니 이번에도 내 원고들은 출판사에서
화장지가 남아돌아 받아 줄 수 없겠다는 그 얘기 그대로 전하면 또 돈 많은
사람한테 시집가 출판사 하나 차려주겠다고 울먹일 테니 그것도 관둬야 하고,
어쩌죠? 뭐하나 당신에게 전해드릴 만한 산뜻한 소식이 없으니…….
 노인네처럼 괜히 쓸데없이 일찍 일어나 골치만 썩이지 싶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사랑하는 당신에게만큼은 써드릴 얘기가 많았었는데
이제 당신마저 내가 써볼 수 있는 성질의 주제가 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아무것도 써볼 수가 없군요.
 참! 어제는 오랜만에 과일을 한 번 먹어봤습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물론 내가 직접 산 것이 아니고 누군가 자기 이름으로 된 책 한 번 자기
얘기로 써서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길래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현실에 놀라 그 사람 고생하며 살아왔고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하는 얘기를 써주었죠. 물론 그 사람 인상과는 안 어울리는 얘기들이었지만.
 그랬더니 그 사람이 글쎄 고맙게도 얼마간의 생활비와
사과를 한 박스 사왔지 뭡니까? 당신 빼고는 누구한테 뭘 받아 본
기억이 없어 얼마나 감격을 했던지…….
 요 며칠 밤샘 작업을 한 보람이 넘치는군요. 그래서 그 마흔개의 사과
중 날 닮아 그 중에서 눈에 띄게 못생긴 사과를 하나 씹어 삼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한 입 두 입 씹다보니 그 궁금증이 더욱더 켜져갔습니다.
물론 이제 내 얘기를 들어주던 당신마저 몇 해 전을 끝으로
더 이상 들어주지 않아 기껏 질문이라고 한다해도
내가 그 답을 찾아 내게 대답해 줘야 하기는 하지만…….
그 사과 말입니다.
 내가 농사를 안 지어봐서 모르는 건지, 사과 안에 사과 씨가 몇 개인지는
먹다 보면 알아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과씨 안에는 과연 몇 개의 사과가 들어 있는 것일까요?
 역시 그렇죠!
 내가 생각해 내는 것들이란……, 어느 누가 그런 것 따위에게 관심을 주겠습니까?
그래도 난 너무나 궁금한데, 이제는 누구에게 질문이라는 것을 하는
방법조차 기억이 안나니…….
 어쩌겠습니까!
 남아 있는 서른아홉 개의 사과를 씹어 삼켜보며 알아봐야지요.
 그러다 운이 좋아 알아지면 그것으로 동화를 한 번 더 써볼 생각입니다.
왜 언젠가 우리의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들려 주겠다고 약속드린 적 있지 않습니까!
 아! 내가 항상 이런다니까.
 이제 그 약속을 지켜볼 필요도 없어졌는데,그 약속은 사과 씨앗에
사과가 몇 개 들어 있을지 알아내는 문제보다 훨씬 어렵고
가능할 수 없는 얘기인데 말입니다.
이래서 남 잘 시간에 못 자고 있으면 관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 나왔나봅니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