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41
화사/서정주
사향(麝香) 박하 (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촛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출처]시삼백 643.화사_서정주|작성자맨달권정무
먼저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가 되는 '화사'는 꽃뱀을 뜻한다. 흔히 뱀은 그 징그럽고 꿈틀거리는 생김새로 인해 '악(惡)'을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는 여기에 '꽃'이 결합된 꽃뱀이므로 뱀의 일반적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화사'는 표면적으로는 꽃처럼 아름다운 빛깔과 무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징그럽고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양면성의 존재, 모순의 존재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아서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혹의 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뱀을 원시적 생명의 대상 소재로 하여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원초적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추구하고 있으며, 때묻지 않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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