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8
눈/김수영
눈을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은 ‘눈’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세 편의 시를 썼다. 시기를 달리하면서 같은 제목의 시를 여러 편 썼다는 것은 김수영이 ‘눈’에 관심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956년에 창작된 「눈」은 김수영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눈’과 ‘기침’이다. 1연의 도입부에서 시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눈’을 살아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떨어지는’이 아니라 ‘떨어진’이니 시인이 목격한 것은 마당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인 눈일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눈이 고결한 이유는 하늘이라는 권좌를 포기하고 기꺼이 더러워질 지상에 내려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이야말로 세상 모든 것들을, 심지어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마저 평등하게 뒤덮어 하얗게 만들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 깨끗하다, 아름답다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시인은 ‘살아 있다’라는 느낌을 받은 듯하다. 여기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생명이라는 의미이며, 이 표현은 동시에 살아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2연에 암시되어 있다.
2연은 젊은 시인에게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라는 권유가 내용의 전부이다. 이 시의 핵심 시어인 ‘기침’은 생명과 자유의 행동을 뜻한다. 이 기침의 행위 주체가 ‘시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시인에게 ‘기침’이란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유의 시를 쓰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젊은 시인’과 ‘눈’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상에 도달한 존재들이지만, ‘눈’은 살아 있는 반면 ‘젊은 시인’은 그렇지 못하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이 시 전체에서 살아 있음과 죽음이 반복적으로 대비되고 있는 것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은 불행한 시대 앞에서 잔뜩 움츠린 채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젊은 시인들에게 ‘자유’를 노래하라고, 그렇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강변하려는 듯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시인은 ‘젊은 시인’에게 “눈 위에 대고”, “눈더러 보라고” ‘기침’을 하라고 했을까? 심지어 4연에서는 ‘가래’를 뱉으라고 말하지 않는가? 흔히 침이나 가래를 뱉는 것은 대상을 혐오할 때 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시에서의 ‘눈’이 세상의 진짜 모습을 은폐하는 거짓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3연의 핵심적인 표현인 ‘눈’이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살아 있다는 진술에서도 동일하게 제기된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살고 있는 시인 자신, 그리고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을 가리킨다. 시인에게 죽음을 잊는다는 것은 타락한다는 것, 현실과 타협한다는 것을 뜻한다.
4연에서 시인은 다시 “기침을 하자”라는 진술을 반복한다. 그 기침은 ‘눈’을 바라보며 행해져야 하는 존재감 확인의 행위이다. 그런데 ‘기침’이 세상을 향한 자유의 외침이라면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현실이 억압적일수록 ‘기침’을 함으로써 존재감을 증명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시인은 ‘기침’을 할 수 없다면 “가래라도/마음껏 뱉”으라고, 뱉자고 제안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눈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 11., 고봉준, 정선태, 위키미디어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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