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많이 읽히는 시

37. 사랑의 변주곡/김수영

월정月靜 강대실 2024. 5. 20. 22:07

내가 읽은 좋은 시37        
 

사랑의 변주곡/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사랑의 변주곡에서 사랑의 음악은 혼란의 소음과 흡사하며,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시의 처음을 압도하는 것은 단호한 명령과 선언이다. 이 목소리는 욕망의 입에서 쏟아진 삶의 생음(生音)을 사랑의 음악으로 변주하려는 강렬한 결의를 전달한다. 인간의 본능인 욕망, 타자를 향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사랑으로 고양하는 비법은 발견의 행위다. 그런데 발견은 무한히 갱신되는 것이기에, 욕망을 사랑으로 변주하는 작업은 끝없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4·19 혁명에서 배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이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어두운 현실에서 사랑의 빛나는 현재를 계속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기술.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부패한 현실과 타락한 문명에 굴복했던 우리가 욕망에서 사랑으로 끊임없이 도약할 때, 그 사랑의 아슬아슬한 절도를 열렬히 유지할 때,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소음과 광증(狂症)과 속도와 허위”(‘시골 선물’)의 도시에서 사랑의 위대한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때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은,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 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는 것이다. 김수영이 시와 산문에서 자주 다룬 라디오는 독재정치, 현대문명, 일본과 북한 방송을 금지한 비극의 역사, 언론 규제, 문화의 후진성, 생활 등을 다양하게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의 변주곡의 첫 음으로 선택된 라디오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닌, 사랑이 없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라디오 소리에서 출발한 사랑의 변주곡은 침묵의 속삭임이 되어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퍼져나가고, 어느새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시 밀려닥친다. 사랑의 주파수에 맞추어진 세상은 지금 같은 에너지의 흐름 속에 있다.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강, , 기차, , , 할머니, 심부름하는 놈, 봄베이, 뉴욕, 먼 날 등을 사랑의 장()으로 연결한다. 끊어짐을 뜻하는 간단’(間斷)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양한 존재와 공간, 시간을 차별 없이 연결하는 사랑의 운동의 현장이 여기에 있다.

   

'내가 읽은 좋은 시 > 많이 읽히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39. 푸르른 날/서정주  (0) 2024.05.20
38. 눈/김수영  (0) 2024.05.20
36. 윤사월(閏四月)/박목월  (0) 2024.05.20
35. 그리움/유치환  (0) 2024.05.20
34. 절정/이육사  (2) 202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