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4
절정/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의 뜻, 국어사전에 '산의 맨꼭대기', '사물의 진행이나 발전이 최고의 경지에 달한 상태'라고 나옵니다.
시인님은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17번이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투쟁하는 길은, 시인님이 위의 산문에서 썼듯이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입니다.
그 과정은 얼마나 극도의 긴장의 연속이었겠는지요. 그래서 '절정'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일제의 옥죄임에 몰려 더 나아갈 수 없는, 그렇다고 굴복할 수 없는 투사의 '극한 상황'이라고 새겨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이육사 시 '절정' 중에서
'매운 계절의 채쭉'(채찍). 이 몇 음절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스며있겠는지요.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 같은 채찍이라고 합니다. 이 가혹한 추위는 일제하의 폭압의 시간이며, 그 냉혹한 시간에 맞서는 시인님의 투쟁의 시간입니다.
시인님은 그 '채찍에 갈겨' 조국에서 내몰려 '북방으로 휩쓸려'왔다고 합니다. 북방은 만주 같은 특정 공간일 수도 있고, 어떤 혹독한 상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느껴지고('매운'), 잔인하게 휘두르는 일제의 가혹함이 선연히 보이는('채찍') 것만 같습니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시인님이, 아니 일제 강점기에 고통받는 우리 민족이 내몰린 상황은 '북방'에서 '고원'으로, 고원에서 다시 '서리빨 칼날진 그 위('우')로 좁혀졌습니다. 하늘이 끝난 곳이라고 여겨질 만큼 아득히 높은 고원, 그중에서도 서릿발 칼날진 위에 서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을 이 짧은 시 구절 속에 새겨 놓았네요. 간결하고 강밀한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도 시인님과 함께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선 듯 호흡이 가빠집니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구원의 기도를 위해 어디에 무릎을 꿇어야할까요? '재겨디딜'(제겨디딜)은 '발끝이나 발뒤꿈치만으로 땅을 디디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무릎을 꿇을 대상조차,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선 우리를 구원해 줄 누구도 없다는 절망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그런데 시인님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칼날진 그 위'에 선 시인님은 절망 대신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관조(觀照)'를 택합니다.
'겨울'. 견디기 어려운, 모든 생명이 위축되는 시련의 시간입니다. 시인님은 관조를 통해서 자신에게, 우리 민족에게 닥친 이 '겨울'을 직시하고 통찰합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에서 해석이 가장 분분한 마지막 행입니다.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이 글의 서두에서 만난 시인님의 산문을 떠올려봅니다.
-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혹한의 '겨울'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며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건 비장한 투쟁이었을 것입니다.
'무지개'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장한 투쟁으로 성취해야 할 희망으로 새깁니다. 지금은 손에 잡을 수 없지만 어딘가에 있는 무지개/희망입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
겨울/시련 속에 강철처럼 단단한 무지개/희망이 잉태되어 있다는 걸까요? 자신의 의지로 강철/겨울을 부수어야 만날 수 있는 것이 무지개라는 말일까요?
어느 쪽이든 '겨울'의 시간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려는, 시인님의 칼날처럼 날카롭고 번쩍이는 정신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나는 육사처럼 치열한 정신을 안으로 감추고
놀라우리만큼 자기의 자랑을 스스로 지키면서
칼날 같은 세대(世代)에서 칼날을 맞세우고 살아간 분을 보지 못했다.
그는 참다운 의미에서 멋쟁이였고 신사였었다.
- 「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박현수 지음, 예옥, 2008년)에 실린 박훈산의 산문 '항쟁의 시인 - 육사의 시와 생애' 중에서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김희곤 지음, 지영사, 2000년)이 발굴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으로 추정되는 감옥에 이육사 시인님과 함께 갇혔던 독립운동 동지 이병희 님(여성)의 증언입니다.
이육사 시인님의 콜록콜록하는 기침소리가 밤낮으로 감옥에서 들려왔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폐병으로 원래 몸이 약한 데다가 잘 먹지도 못하고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느라 더욱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먼저 풀려나온 이병희 님은 나중에 간수로부터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
시인님이 돌아가신 때는 1944년 1월 16일 새벽, '치열한 정신을 안으로 감추고' '칼날 같은 세대에서 칼날을 맞세우고' 타오르던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 시인님의 고귀한 '자신에 대한 희생'이 있었기에 시인님 순국 1년 7개월 뒤 우리에게 해방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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