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2
백록담/정지용
1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꽃 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 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 새끼를 낳느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송아지는 움매애 움매애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아 솨아 솔 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넌출 긔여간 흰 돌바기*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용(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 식물을 새기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우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이겨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 정지용, 「백록담」
*촉루: 해골.
*흰 돌바기: 흰 돌 박힌.
*숭없지: 말이나 행동 따위가 불쾌할 정도로 흉하지.
*놋낫: 빗발이 굵고 곧게 뻗치며 내리쏟아지는 모양.
이 시는 산문시로 민족의 정기가 서린 백록담에 오르기 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연에서는 화자의 장소이동과 함께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며 절정에 가까이 화서 기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연은 1연의 긴호흡과 다르게 짧은 호흡으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어나는 화자의 모습을 그리며 3연과 4연에서는 각각 자작나무를 보고 도체비꽃을 보며 이들을 의인화해 자연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냅니다.
5연~6연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처집니다.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만소를 만난 화자는 각자 있는 마소들에게서 그리고 어미를 여읜 송아지가 모샋이 다른 어미(털색깔이 다른 어미 즉, 친 혈육이 아닌 대상)에게 맡겨지는 것을 보고 슬픔을 느낍니다.(이는 시대 상황과 연관되어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7연~8년에서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풍경, 동물들이 ㅇ러 식물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다시 백록담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9연에서 정말 맑고 깨끗한 백록담에 도달하여 몰아의 경지를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때 9연에서 화자의 쓸쓸함과 깨다 졸다 기도마져 잊었더니라라는 표현이 아오는 데 이를 구체적으로 해석하려면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기>가 나와야하니 일단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문제를 풀 때 <보기>가 나오면 이를 해석 기준으로 삼아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백록담에서 느끼는 신비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전문해석을 통해서 학습을 마무리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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