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1
흰 바람벽이 있어/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고향을 떠나 홀로 살아가는 인물의 쓸쓸한 마음을 한 편의 영상처럼 그린 작품이다. 좁은 방에 혼자 있던 시적 화자는 흰 바람벽의 쓸쓸한 풍경에서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을 향한 시적 화자의 그리움은 흰 바람벽에 영상으로 흐르면서 쓸쓸한 정서를 더욱 고조시킨다. 곧이어 영상이 끝난 후 바람벽에는 글자들이 지나가는데, 이 글자들은 지금의 처지에 대한 체념적이고 수용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기가 가난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지만 고결한 정신을 간직한 채 살아갈 운명이며, 이는 자신이 하늘의 은총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바람벽에 투사된 내면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현실의 세계에서는 패배했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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