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좋은 시33
자화상/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1]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2]
그리고 한 사나이 [3]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소중하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면을 쓰거나 꾸미지 않은 순수한 자기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첫 구절이 그렇다.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간' 시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기대감이 부풀었을까? 실망감에 빠져 마주하기가 두려웠을까?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이 펼쳐진 하늘, 파아란 바람이 부는 가을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 자신과 마주한 첫 느낌은 미움이었다. 왜 미워졌을까? 기대가 컸기 때문에. 초라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려다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다시 돌아와 들여다 본 모습 역시 그대로여서 미운 감정이 올라온다. 미움과 측은지심이 교차하다 그리움으로 바뀌고 이젠 추억이 된다.
일상에서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많다.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아 존중감과 자기애가 부족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가면을 쓰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용기 있게 바라보고 처음에 가졌던 미운 감정을 정화하여 그리움으로 승화하였다. 자기 부정에서 자기 긍정으로 관점을 전환하였다.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다.
<자화상>은 남을 의식하며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가느라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진정으로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시의 구성을 보면 전반부 3~5행의 행갈이와 마지막 11~13행의 행갈이에 다소 차이점이 있다. 이와 같이 행갈이를 달리 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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