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3 33

8. 문병란/ 12. 꽃가게 앞을 지나며

꽃가게 앞을 지나며                        문   병   란그 꽃빛깔만큼이나 예쁜 이름을 가진온갖 꽃들이 진열된꽃가게 앞을 지나면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문득너의 이름이 떠오른다.진정 그리움이란진홍빛 장미꽃만큼이나 간절히 타오르는 정열인 것이냐.아름다운 것만 보면 문득푸른 하늘이 치어다 보이고거기 눈부신 이국종아네모네의 이름보다 멀게너의 고운 미소 피었다 스러지나니.삶의 외로움 나누는목마른 어느 길목에서나는 너의 조그만 미소를 구하여이리도 간절히 발돋음해 애태운다.오라, 노을 지는 꽃길 위에종종 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무수한 발자국 지우며봄과 함께 꽃내음 타고 올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아!

8. 문병란/ 11. 어리석음

어리석음                  문   병   란현명보다 먼저 와서너는 인간과 함께오랜 역사를 만들었다.많은 사람들너 때문에 사랑하고너 때문에 이별하고너 때문에 죽었다.20대에처음 만났던 너,조롱섞인 웃음소리 속에서나는 너와 더불어 사랑을 배웠다.어리석음.너는 또 하나의 스승이 시대의 암유 속에서너는 현명을 깔아뭉갠다.60년 동안너는 나의 오랜 친구,나의 묵은 원고뭉치 속에서내 젊은 날의 죄상에 대해은밀한 조서를 꾸미고 있고너는 이 아침에도맨먼저 깨어나 내 곁에 앉는다.어리석음아천하를 삼키고도 남을 위력으로내 한평생을 지배하는슬픈 인생의 동반자야이 아침 너는늙은 태양을 데불고 와서내 창문을 탕탕탕 총쏘는 구나.

8. 문병란/ 10. 곰내 팽나무

곰내 팽나무                                문   병   란아직도 젊고 팽팽한 몸뚱어리에푸른 가지를 죽죽 뻗치고남해의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서 있는곰내 팽나무임진년 난리 때이순신 장군의 노모 변씨와그의 부인 방씨가5년간 기거했다는 내력을 지니고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눈부신 유월 햇살 아래그 미끈한 아랫도리 당당하게 서 있다팽나무는 그대로아름다운 조선 역사그날의 내력 안으로 간직하고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두 팔 벌려이 세상 사내란 사내 천하의 모든 수컷들을죄다 삼키고도 모자랄 듯천하의 햇살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서 있다천하 장정들 다 오라그 넉넉한 무당각시의 품을 열고아랫도리 성한 왜놈들 한 부대쯤 모조리 삼키고이 세상 남편과 자식 줄줄이 거느리고그 수천 수만 개의 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