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2)시인의 대표시

8. 문병란 시/1. 문병란 시 모음 33편

월정月靜 강대실 2024. 11. 27. 07:38

문병란 시 모음 3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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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월의 시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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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의 여백에 앉아서

문병란

가을은 먼저
4만 원짜리 횟감 두 접시와
우리들의 단란한 술잔 속에 와서
비린내도 향그러운 가을바다
아침이슬 한 잔씩을 가득 채웠다.

길고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모처럼 하늘이 높고 푸른 날
때마침 제철 만난
남해 바다 전어 떼
그 싱싱한 비린내 속에서
우리들의 눈빛 가득
익어 가는 가을이 주렁주렁 열렸다.

시인은 술보다
은비늘 파닥이는 가을바다에 취하여
코스모스 손짓하는 바닷가 횟집의
풍어의 식탁 앞에 허리띠를 풀고
원고료 없는 시 청탁에 쉽게 응하였다.

일금 5만 원짜리 원고료 대신
그 다섯 배 비싼 점심을 대접받고
가을의 여백에 앉아
우리들은 이미 모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시인이 되어 붉으레 고운 단풍이 들고 있었다.

가을은 취하는 달
그리고 외상으로도 서로 사랑하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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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꽃가게 앞을 지나며

문병란

그 꽃빛깔만큼이나 예쁜 이름을 가진
온갖 꽃들이 진열된
꽃가게 앞을 지나면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문득
너의 이름이 떠오른다.

진정 그리움이란
진홍빛 장미꽃만큼이나
간절히 타오르는 정열인 것이냐.

아름다운 것만 보면 문득
푸른 하늘이 치어다 보이고
거기 눈부신 이국종
아네모네의 이름보다 멀게
너의 고운 미소 피었다 스러지나니.

삶의 외로움 나누는
목마른 어느 길목에서
나는 너의 조그만 미소를 구하여
이리도 간절히 발돋움해 애태운다.

오라, 노을지는 꽃길 위에
종종 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 지우며
봄과 함께 꽃내음 타고 올
제비꽃 초롱 내 사랑하는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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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씨

문병란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 날의 대화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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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꽃의 생식기

문병란

매사에 박식한 K교수가
꽃의 생식기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물었다.

내가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 사이
그는 꽃이 바로 생식기라고 했다.

인간의 치부, 그것이 부끄러워서
꽁꽁 가리고 살기에
밝은 햇살 아래
온통 드러내놓고 환히 웃는
그 꽃이 바로 생식기라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옳거니!
그 빛깔 향기에 반하여
꺾고 만지고 냄새 맡았던 꽃
나도 그 꽃을 하나
몰래 감추고 있음을 알았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잎사귀로 가리던 때부터
너와 나의 꽃은
밤에만 피는 숨겨진 꽃이었다.

오늘도 꽃은
밝은 햇살 아래
빛과 향을 머금고
눈부신 생식기로 환히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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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문병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는 없다.
더듬어 보면 우리가 만난 짧은 시간 만큼
이별은 급속도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사랑도 삶도 뒤지지 않고
욕심내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에게 켜져가는 사랑으로
흔들림 없고, 흐트러지지 않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할 뿐이다.
외로움의 나날이
마음에서 짖궂게 떠나지 않는다 해도
내 너를 사랑함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말을 하지 않겠다.
말로써 다하는 사랑이면
나는 너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환한 마음으로 너에게 다가갈 뿐이다.
조금은 덜 웃더라도
훗날 슬퍼하지 않기 위해선
애써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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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땅의 연가(戀歌)

문병란

나는 땅이다
길게 누워 있는 빈 땅이다
누가 내 가슴을 갈아엎는가?
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

아픔을 참으며
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
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
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
가만히 쓰러지는 사람
농부의 때묻은 발바닥이
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

멋대로 사랑해 버린 나의 육체
황토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
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
연한 잠 속에서
나의 씨앗은 새 순이 돋힌다.

철철 오줌을 갈기는 소리
곳곳에 새끼줄을 치는 소리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새벽마다 연한 내 가슴에
욕망의 말뚝을 박는다.

상냥하게 비명을 지르는 새벽녘
내 아픔을 밟으며
누가 기침을 하는가,
5천년의 기나긴 오줌을 받아 먹고
걸걸한 백성의 눈물을 받아 먹고
슬픈 씨앗을 키워온 가슴
누가 내 가슴에다 철조망을 치는가?

나를 사랑해다오, 길게 누워
황토빛 대낮 속으로 잠기는
앙상한 젖가슴 풀어헤치고
아름다운 주인의 손길 기다리는
내 상처받은 묵은 가슴 위에
빛나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다오!

짚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고무신이 밟고 간 다음에도
군화가 짓밟고 간 다음에도
탱크가 으렁으렁 이빨을 갈고 간 다음에도
나는 다시 땅이다 아픈 맨살이다.

철철 갈기는 오줌 소리 밑에서도
온갖 쓰레기 가래침 밑에서도
나는 다시 깨끗한 땅이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아픔이다.

오늘 누가 이땅에 빛깔을 칠하는가?
오늘 누가 이땅에 멋대로 선(線)을 긋는가?
아무리 밟아도 소리하지 않는
갈라지고 때묻은 발바닥 밑에서
한줄기 아픔을 키우는 땅
어진 백성의 똥을 받아 먹고
뚝뚝 떨어지는 진한 피를 받아 먹고
더욱 기름진 역사의 발바닥 밑에서
땅은 뜨겁게 뜨겁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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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바다가 내게

문병란

내 생의 고독한 정오에
세번째의 절망을 만났을 때
나는 남몰래 바닷가에 갔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빈 바닷가
머리 풀고 흐느껴 우는
안타까운 파도의 울음소리
인간은 왜 비루하고 외로운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려야 하고
마침내 못 다 채운 가슴을 안고
우리는 왜 서로 헤어져야 하는가.

작은 몸뚱이 하나 감출 수 없는
어느 절벽 끝에 서면
인간은 외로운 고아,
바다는 모로 누워
잠들지 못하는 가슴을 안고 한밤내 운다.

너를 울린 곡절도, 사랑의 업보도
한데 섞어 눈물지으면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허허 몰아쳐 웃어 버리는 바다

사랑은 고도에 깜박이는 등불로
조용히 흔들리다
조개 껍질 속에 고이는
한 줌 노을 같은 종언인가.

몸뚱이보다 무거운 절망을 안고
어느 절벽 끝에 서면
내 가슴 벽에 몰아와
허옇게 부서져 가는 파돗소리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은 더욱 뜨겁게 포옹하라
바다는 내게 속삭이며
마지막 구석까지 채우고 싶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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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람의 노래

문병란

어젯밤 알프스 넘어간 구름
오늘은 어느 항구에서 빈 술잔에 포도주를 채우는가.

방랑길에서 바람이 가르쳐 준 말은
인생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
머물지 않는 바람은 저만치 고개를 넘으며
내일 쉴 곳을 정해놓지 않는다.

오늘은 오늘의 술을 마시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국경이 없어도 외롭지 않은 바람은 유유히 손을 흔든다.
정 주지 마라
꿈을 버려라
미워하지 마라
미련을 남기지 마라

네가 앉았던 자리
네가 마셨던 잔
이제는 다른 사랑이 속삭이고
다른 잔을 마신다, 뒤돌아보지 마라.

바람이 앉았다 간 자리
오늘도,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고 있다
이름이 무어냐고 묻지 마라, 다짐 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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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백지 앞에서

문병란

운명처럼 내 앞에 놓인
순수한 하나의 여백
거기에 나는 유언을 쓸까.
오래 숨겨 놓은 비밀을 고백할까.

증인처럼 등불이 지켜보고 있고
사위에 정적이 에워싸는 밤
나는 최후처럼 백지 앞에 앉아
한 마디의 마지막 낱말을 찾고 있다.

창밖은 12월, 계절을 휩쓸어가는 북풍이 불고
어지러운 구름 사이로
반 남아 이지러진 조각달 헤매어간다
달빛을 가린 구름장이여,
잠깐 비켜나 달님의 얼굴을 보게 해다오.

이 밤에 내 마음도
구름 사이 헤매는 이지러진 조각달
아직도 백지로 놓여 있는 종이 위엔
그대 모습 어지러이 그릴 길 없고
처음도 끝도 잊은 백지의 사연 위에
부서진 마음 조각만 촛불처럼 가물거린다.

공포처럼 놓여 있는 운명 앞에
차라리 나는 두 눈을 감을까.

영영 여백으로 남아 있을 백지
끝내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하고
백지 위엔 까만 정적만 기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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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불혹의 연가

문병란

어머니
이제 어디만큼 흐르고 있습니까

목마른 당신의 가슴을 보듬고
어느 세월의 언덕에서
몸부림치며 흘러온 역정
눈감으면 두 팔 안으로
오늘도 핏빛 노을은 무너집니다.

삼남매 칠 남매
마디마디 열리는 조롱박이
오늘은 모두 다 함박이 되었을까
모르게 감추어 놓은 눈물이
이다지도 융융히 흐르는 강
이만치 앉아서 바라보며
나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보셔요. 어머니
나주벌 만큼이나 내려가서
3백리 역정 다시 뒤돌아보며
풍성한 언어로 가꾸던 어젯날
넉넉한 햇살 속에서
이마 묻고 울고 싶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흐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새끼 네명을 키우며
중년에 접어든 불혹의 가을
오늘은 당신 곁에 와서
귀에 익은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아직도 다하지 못한
남은 사연이 있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흐르는 강
누군가 소리쳐 부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목마른 정오의 언덕에 서서
내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은
무슨 커다란 슬픔이 있어
풀냄새 언덕에 서면
아직도 목매어 흐르는 강
나는 아득한 곳에서 회귀하는
내 청춘의 조각배를 봅니다.

이렇게 항상 흐르게 하고
이렇게 간절히 손을 흔들게 하는
어느 정오의 긴 언덕에 서서
어머니, 오늘은
꼭 한번 울고 싶은 슬픔이 있습니다.
꼭 한번 쏟고 싶은 진한 눈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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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 오는 날의 시

문병란

비 오는 날 비로소
나는 구두가 새는 것을 알았다.

궂은 땅 더러운 땅
아무 데나 딛고 다니면서
고마운 줄 몰랐던 구두

너는 어느덧
헌 구두가 되어 있었구나
무좀기 있는 내 발가락 사이
솔솔 풍기는 고린내를 기억하는가.

구두야, 이젠 비 오면 물이 새는
헌 구두야, 수많은 길을 걸어
나의 모진 발바닥 밑에서
너의 여린 살가죽은 닳고닳았지.

쉽게 바꾸고
쉽게 버리는 우리들의 인정
나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네가 쓰레기통으로 가는 날
나는 나이 한 살 더 먹었다!, 헌 구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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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랑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서 만나야 할 사람
비로서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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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문병란

새벽에 깨어나 혼자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가늘은 현악기의 현 끝에
아리게 떨리는 알레그로
내 고독한 혼도 따라 울고 있다.
이 새벽 밖에서는
새록새록 싸락눈이 내리고
어디선가 외로운 목숨이
쓸쓸한 기침 소리로 돌아 누울 때
노래는 2악장으로 바뀌고 있다.
세상은 얼마나 차갑고 쓸쓸한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로 없이
눈 내리는 이 새벽
혼자서 듣는 차이코프스키
나도 한 마리 작은 귀또리처럼 운다.
산다는 것은 음악보다
얼마나 아프고 외로운 가슴이 모로 눠간다
오 기침 소리여
기침 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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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술에게

문병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갔을 때
비로소 나는
자네의 풍습을 처음으로 알았네.

찌프린 이마를
상냥한 입김으로 어려 주고
얼어 붙은 가슴을
뜨겁게 뜨겁게 불태워 주었네.

마시면 정직하게 취하고
슬픈 나의 공화국에 와서
무관의 제왕이 되어
또 하나의 법을 만드는 위력

'취하지 않는 자는
모두 엄벌에 처할지어다'

깡소주 한 잔을 놔 두고
낙화암도 의자왕도 없이
삼천궁녀도 양귀비도 없이
나는 누구에게 호령할 것인가.

술이여, 내게 잠깐
자네의 순수한 미친 불길을 빌려주게
넥타이를 비뚤어지게 매는 멋을 빌려주게
내 발걸음을 알맞게 비틀거리게 해 주게

바야흐로 40대의 우정으로
자네와 뜨겁게 입맞출 때
지금은
금빛 소슬한 가을이 절뚝이며 오고 있네

여보게,
진정 정직하게 미쳐 갈 방법을 가르쳐 주게.
진정 한꺼번에 살아 버릴 용기를 빌려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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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의 발견

문병란

청탁 원고를 구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펜을 팽개치고 산책을 나왔다.

시는 제작일까 발견일까
아니면 모조품 훔치기 일까
종일 끙끙대며 찾아다녀야
그리운 그이도 그녀도 만나지 못했다.

꽁꽁 숨어 버린 시
애숭이 삼류 시인의 눈에는 기적도 없어
나무도 산도 바위도 꽃도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
그리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외톨이가 된 외로운 마음
진달래꽃 앞에 앉아
김소월 스승께 물어 보아도
아편 꽃 앞에 앉아
보들레르 아저씨께 물어 보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혼자서 왼종일 해매었지.

그날 밤 집에 오니
쓰다 만 내 원고지 위에
바끔히 눈을 뜨고 앉아 있는 외로움
내가 버려 두었던
오직 하나의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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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
《18》
엉머구리의 합창

문병란

해질 녘
어두워 가는 들판에서
엉머구리 떼가 운다.

개굴개굴 개골개골
수 십 마리 수 백 마리
종당엔 수천 마리가 되어
한꺼번에 개굴개굴 울어댄다.

그들은 왜 우는 걸까.
집이 없는 것일까.
배가 고픈 것일까.
서러운 땅의 서러운 개구리들이
이 밤도 개굴개굴 울어댄다.

“저 요란한 소리는 무엇인고?”
“예, 배고픈 백성의 소리올시다!”
“당장 그 소리 그치게 하지 못할까?”
“원체 무식한 엉머구리라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짐의 마음 심히 불쾌하도다”
억척같이 우는 엉머구리들을
엄벌에 처하는 법을 만들지어다!“

법도 사상도 모르는 무식한 엉머구리 떼,
누가 저 울음소리를 멋게 할 것인가
누가 저 우는 개구리를 벌할 것인가
자식의 무덤이 떠내려가고
애비의 무덤이 떠내려가고
짓궂게 계속되는 장마
배고픈 엉머구리들이 울고 있다.

여기서도 개굴개굴
저기서도 개굴
날마다 개구리의 장례식은 계속되고
본시 울기를 좋아하는 엉머구리 떼,
아이고 아이고
밤마다 초상집 통곡 소리만 요란하다.

근심 띤 구름 어지러이 뒤덮고
또 작달비는 퍼붓는데
법을 모르는 무식한 엉머구리 떼들,
운다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을 모르는
본래 울 줄밖에 모르는 엉머구리 떼들.

배가 고파도 개굴개굴
임이 그리워도 개굴개굴
에미가 죽어도 개굴개굴
팔도의 온갖 개구리 떼 모여들어
서러운 합창을 부르고 있다.

개굴개굴
개골개골
걀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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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역두에서

문병란

누군가 보내야 할
그런 마음을 안고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먼 별 같은 이야길 남겨야 했다.

수많은 얼굴들이
고운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핏빛 꽃들이 한 잎씩 지듯
그렇게 사랑은 총총히 떠나야 했다.

그대의 모습
숨겨진 계절의 뒤안길
아네모네의 꽃망울처럼
계절에 실려갔다
하늘 밖으로부터 아득히
그렇게 너는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손을 흔들면
울음이 영그는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시그널로 사위어가는 그리움.

떠나간 사람으로 하여
시간은 별처럼 쌓이고
먼 행성에 실려간 사랑은
한 밤중 잠들지 못하는 호수의 물무늬
비에 젖은 돌멩이 되어
그렇게 외로운 마음들이 다시 돌아와야 했다.
☆★☆★☆★☆★☆★☆★☆★☆★☆★☆★☆★☆★
《20》
이별 연습

문병란

갑자기 헤어지면
눈물이 날지 몰라
우린 미리 조금씩 헤어지는 거야.
날마다 눈물을 아껴
가슴 깊은 데 몰래 감춰두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더더구나 뺏는 것인가
그날 밤 뒤따라 오던 열사흘 달이
두 눈 흘기며 구름 사이에 숨었지.

입술 훔치던 밤
숲 속에서 밤새가 울고
기뻤는데도 우리는 자꾸
눈물이 났었지 그날 밤.

이별은 끝이 아니라고
시작이라고 말한 밤
멀리멀리 떠나가 비로소
그대 가까이 가는 연습을 시작하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닌 오래 간직하는 것 비로소
눈물은 가슴 속 까만 씨앗으로 영그는 거야.
☆★☆★☆★☆★☆★☆★☆★☆★☆★☆★☆★☆★
《21》
인생 송가

문병란

어떤 사람은 인생을
허무하다고 탄식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지상의 축복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인생을 고해, 사막이라 적는다
더더욱 인생은 쓰디쓴 소태맛
오직 괴로움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루 낮 햇살 좋은 장성호(長城湖)
아름다운 물무늬 바라보며
나는 오늘 인생을 사랑이라 수정한다
찔레꽃 향그런 가시덤불 아래서
꽃뱀도 암수놈 어울어지는 봄날
나는 살아서 그대 고운 눈 애달퍼라
진흙밭 가시밭길 타오르는 불길속
그 많은 삶의 짐 무겁고 버거워도
장성호, 그 수심에게 물어 보아라
저 화무십일홍 웃으며 떨어지는
한 송이 복사꽃에 물어 보아라
변치 않는 사람도 변한 사람도
저 한철 울다가는 뻐꾸기
술잔을 들고 있는 나그네에게 물어 보아라
인생은 사랑이라고
인생은 눈물이라고.
☆★☆★☆★☆★☆★☆★☆★☆★☆★☆★☆★☆★
《22》
인연서설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풀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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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일본

문병란

나는 당신들을
벚꽃을 보듯 볼수는 없다
4월 달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온몸으로 웃는 저 활짝 핀 꽃
그 꽃의 청신한 자태를 보듯 볼 수는 없다.

누군가 말했다, 벚꽃은
순결하고 열정적이고
천하의 봄을 한거번에 물들이고 남는
넉넉하고 융융한 빛깔,
다 드러내고 감춘 것 없는 정직한 꽃
봄 동산 가득 향기로 채우는 가장 아름다운 꽃 중의 꽃 이라고.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벚꽃 피는 봄날
게이샤의 두 빰에 흐르는 홍조,
다소곳한 그 아미
간드러진 사미생의 가락에 따라
높고 낮게 흔들리는 살풋한그 춤사위
진정, 그 일본의 여인의
아양진 연가를 듣듯 바라볼 순 없다.

벚꽃의 향기 밑에
살모사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고
게이샤의 미소 밑에
피비린 닛본도의 캇날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자국내 자국끼리 통하는
일본 국민의 근면과 정직성이
남의 나라 국경을 넘어오면
침략이 되고 전쟁이 됨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 왔다.

잘도 핀 벚꽃을 보면서도
우리는 피 내음새를 연상해야 하고
아름다운 국화꽃 속에서도
잔혹한 닛본도의 피 냄새를 잊지 않는다.

우리의 남과 북의 기나긴 생이별의
진정, 그대들과 무관하다 생각하느냐
이 땅의 길고 긴 정치의 겨울이
진정, 그대들과 별개의 남의 일이라 생각하느냐.

오늘, 일본은 또 하나의 아시아의 미국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동양의 유태인 새로운 양키라고 보는
우리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달러를 등에 업은 엔화의 대리 역할
캘리포니아의 사막 무법자의 권총과
에도의 달빛 아래 빛났던 사무라이의 칼날
그 프런티어 정신과 대화혼이 합친
환태평양 시대의 새로운안보의 고리,
미국의 적자와 일본의 흑자가 만나는 곳에서
한국의 38선은 더욱 멀어가고
미, 소, 일, 중, 새로운 균형 속에
인질로 잡힌 한반도의 분단사
새로운 제국에의 아련한 향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잉태하고 있다.

진정, 당신들이 평화 헌법을 사랑하고
동양의 평화를 원하느냐
북한 동포의 자립 경제의 궁핍이
남한 동포의 저임금과 자유 쟁취의 갈망이
진정, 당신들의 부귀와 무관한 것이냐.

독약에 숨진 민족시인, 복강 감옥의
윤동주의 넋이 역력히 외치고 있는데
도막도막 갈라진 사신, 기미년
유관순 누나의 부릅뜬 눈이 빛나는데
보는대로 죽이리라, 만주 하얼빈 역두의
안중근 의사의 육혈포가 절규하는데

어떻게 쉽사리 잊을 수가 있는가
어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데
어떻게 속빈 창자 헤헤거리며
새로운 선린의 악수가 가능한가.

오늘도 현해탄은 출렁인다
새로운 제2의 대동아 시대의
태풍주의보 발효 중
어디선가 아직도 총독의 소리는 들려오는데
북한은 고립시켜 목을 조이고
남한은 타락시켜 썩게 하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건망증 왜색 가요를 부르기엔 쑥스럽구나
기생 파티 모셔 놓고
명월관의 추억 가야금에 실으며
그날의 창경원 벚꽃놀이 되풀이는 민망하구나.

현해탄의 파도에 실은 은원의 세월,
관부 연락선의 난간에 기대인 사랑은
오늘도 짝사랑에 새로운 정사를 꿈꾼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홋가이도와 사할린 냉기어린 탄광,
막장에 묻힌 해골의 외치는 소리
관동군 군화 밑에 짓눌린 정신대,
나이 어린 조선 처녀의 신음 소리가
남양군도 밀림 석에 자지러지고 있다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백골로 울고 있다.

오오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여
앙두구육의 경제 대국,
우리들의 피를 딛고 번영하는
20세기의 동양의 아메리카인
또 하나의 양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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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당성 1

문병란

나의 행동에 대하여
나는 정당성을 찾는다.

외국 유학생의 비자 위에서
오늘의 지성은 정당을 찾는다.

마땅히 먹어야 하고
마땅히 배설해야 하고
모름지기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

나는 왜 그녀를 울렸던가.
나는 왜 수입이 적은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나의 입술은 무엇을 훔쳤는가,
우리들의 사랑은 정당하다.

데모대는 돌맹이 속에서
민주주의 소생을 믿고
경찰은 최루탄 속에서
법의 존엄성을 믿는다.
모든 것은 정당하다.

성토 대화가 열릴 때
도봉산에 가서 연인과 즐기고
데모가 전개될 때
당구장에 가서 휴강을 즐긴다.

껌을 씹으면서 패튼을 관람한
내 양심의 소재,
껌을 씹다
어금니로 입술을 깨문 그
실수 - 짭짤한 피의 맛을 아는가.

전쟁을 즐기는 위대한 영웅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졸병 사이에서
입 다문 휴머니티
어금니 사이에서 으깨려진
껌 - 모든것은 정당한가.

막걸리 집에서 행방불명이 된
오늘의 지성과 꿈.
나는 실연을 하고
체루탄 속에서 코스모스가 피고
저축 강조 주간에 적자를 낸
나의 아내 - 그러나 모든 것은 정당한가.

미니스커트가 자꾸만 올라가고
서울의 빌딩이 자꾸만 높아가고
이 가을 나의 적자도 늘어나고
그러나 모든 것은 정당한가.

정당성을 잃은 이 가을
입 다문 내 패배 위에
낙엽이 저야 하는 이유.
시월의 연서를 불살라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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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종착역에서

문병란

나이가 는다는 것은
인생의 빛이 샇인디는 것

아내에게
자식에게
그보다 그 옛날 부모에게
덤으로 쌓인 빚 바리바리 지고서
빚진 죄인 나는 종착역에서 서성거린다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길
이미 막차는 떠나 버렸고
채무자 과거가 홀겨보는 시간
떠밀려 나온 종착역
누굴 찿아 왔을까
가로등만이 포도 위에 아롱진다

무작정 달려왔던 길
기다리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길을 막는 빨간 불
검문 검색하는 역사 앞에
나는 너무 멀리 와 버렸구나

신과 대결했던 어제의 희망도
나의 마지막 밑천인 육체도
이제는 시들은 풀잎,희망은 저만치
등을 돌려 떠나버렸는데
여인아 너는 내 술잔에
무슨 빛깔의 눈물을 채우려느냐

기적마저 그핓 종착역에서
시효가 지난 어젯날의 차표를 들고
막차가 떠난 플랫폼에서
나는 나 홀로 전별의 손길을 흔든다

아 이 밤에도 시지프스는
그 형벌의 비탈길에서
잠깐 다리 쉬엄, 밤하늘의 별도 보며
향기로운 땀방울도 고요히 개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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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죽순 밭에서

문병란

죽순 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 밭에는
낭자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 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 올리는 대나무 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 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소리

사운사운 내리는 달빛 속에
달빛을 받아먹고
이슬을 받아먹고
천근 누르는 바위 밑에서도
만근 뒤덮은 어둠 밑에서도
쑥쑥 뽑아 오르는 소리
마디마디 매듭이 지는 소리

이윽고 참대가 되고 왕대가 되고
유혈이 낭자하던 대밭
임진년(壬辰年) 의병의 손에서
원수의 가슴에 꽂히던 죽창이 되고,

갑오년(甲午年) 백산(白山)에 솟은 푸른 참 대밭
우리들의 가슴을 뚫고
사무친 아우성이 솟아오르는 소리
안개 속에서 달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굳은 땅을 뚫고
모든 뿌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오는 소리

죽순 밭에는
뾰쪽뾰쪽 일어서는
카랑한 달빛이 흐른다
도도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묵은 끌텅에 새 순이 돋아
창끝보다 날카로운 아픔이 솟는다.

가슴이 막혀 답답한 날
대밭에 가서 창을 다듬자
왕대 곁에 서서
꼿꼿이 휘이지 않는
한줄기 죽순을 뽑아 올리자

응혈진 어둠을 뚫고
핏물진 연한 살을 뚫고
벌떼같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낭자하게 내리는 달빛 속에서
아 소리 없는 아픔이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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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직녀에게

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돗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여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돗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야 할 우리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은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돗돌 놓아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여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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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찬비 오는 저녁

문병란

나이 들면
사람 만나기가 차츰 두려워진다.
사양지심과 자존심의
어느 중간쯤 서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기웃거리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아, 웃어야 할 대목과
성내야 할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순 여덟이 되어서야
눈과 눈썹 사이가 가까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나들며
그네 타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다.

5분간 연설이 끝난 저녁
그림자를 따돌리지 못하는 비극
하늘에는 별이 멀어 보이고
방앗간 앞에서도 나는 그냥 지난다.
이 시간 고독한 산보자는
루소의 남은 꿈을 빌려
비 내리는 오솔길에 길게 서 본다.

찬비 오는 저녁
찬비 맞아 얼어 자고 싶은 밤
찬비 같은 여자가 젖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아, 아직도 꽃을 보면
가슴이 뛴다고 귓가에 속삭이지 말라.

오늘밤도 찬비가 등뒤에서
내 쓸쓸한 발자국을 적셔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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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첫눈

문병란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사내들은 모두 예수가 되고
첫눈이 내리는 밤이면
여자들은 모두 천사가 된다
여보게 우리도 이런 밤
소주 몇 잔 비우고 조금 취해
모닥불 가에 언 손 부비며
쓸쓸한 추억하나 만들어볼까
만원짜리 한 장에 꿈을 달래고
포실거리는 눈발에 맞춰
여보게 우리도 첫눈 밤 같은
사랑 하나 만들까
그립다
첫눈이 내리면 먼데 마을 하나 둘 등불 꺼지고
지금쯤 그리운 사람은
혼자서 외로이 잠이 드는데
창가에 기대어 먼데
여인의 발자국 소리 엿들어 볼까
이런 밤 우리도 고요히
손 모아 촛불 하나 지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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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첫사랑

문병란

눈썹 달이
나뭇가지 끝에서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어제 핀 꽃이
오늘 핀 꽃에게
부드러운 혀끝을 오므린다

산다화 냄새가
쎄하니
코끝에 와서 간질인다.

안 돼요 안 돼요
바람이
보리밭 속으로 숨는다

숨겨 놓은
오렌지를 훔치는
아도니스의 하얀 손

어둠은 살랑
눈썹달 끝에서
미약을 흘린다.
☆★☆★☆★☆★☆★☆★☆★☆★☆★☆★☆★☆★
《31》
코카콜라

문병란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 같이
양병에 가득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낀 일등 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구나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 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키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잘 넘어 가느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림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터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렛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키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큼새큼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
《32》
호수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뜩임 사이에서
더욱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
《33》
희망가

문병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 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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