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읽은 좋은 시

최하림 시편

월정月靜 강대실 2008. 10. 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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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의 수런거림
최하림 시의 근원 목포
정상철 기자  

▲ 최하림이 김현, 김지하 등과 함께 문청시절을 보냈던 목포 오거리. 당시 오거리에서는 한국문학의 중심이 옮겨온 듯 빈번하게 문화행사가 열렸다.
ⓒ 전라도닷컴


최하림의 시는 고향 목포라는 공간에서 시작한다. 그의 초기시들이 가진 어두운 색채는 모두 목포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그가 줄기차게 밀어 올린 언어의 균형 역시 목포가 간직한 회색빛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세상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어느 한 곳에 발을 담그거나 치우치지 않고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한다. “명백하게 구획을 나누고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그것은 개인적 성향에 닿아 있으면서 또한 보편적 ‘균형’을 견지하고 있다.

언제나 전체를 겨냥하는 최하림의 시는 면밀한 계산 위에 서 있다. 그 계산은 언어에서는 적당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이쪽도 가깝고 저쪽도 멀지 않다는 것은 역으로 따져보면 어느 한 곳 쉽게 손 건넬 수 없는 지점을 의미한다. 그는 시를 써왔던 전 생애에 걸쳐 순수와 참여 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가려 했고, 그럴수록 이분법으로만 분화돼 있는 세상의 관계 안에서는 멀어져 갔다.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부터 근자에 나온 『풍경 뒤의 풍경』까지 최하림은 끊임없이 언어의 경계에 서는 시어들을 다듬어 왔다. 그 작업은 고독했고 누구 하나 최하림의 시를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시는 성과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 본다/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 (‘광목도로’ 중)

목포로 향하는 길 광목도로, 한때 그는 국도 1호선의 시작을 알리는 목포와 광주 구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을 찾았다. 그가 <잠시 유숙할 집>은 고향 목포도 아니고 그렇다고 광주도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둘을 한 데 아우르는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단순히 지역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경계에 닿기도 한다.
80년 오월의 기억은 시인의 전 생애를 어둠 속에 밀어 넣었고, 어떤 불빛도 다시금 그를 밝혀 주지 못했다. ‘어둠’을 통해 그는 오월 광주에서 저질러진 만행이 거꾸로 돌린 역사를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아픔의 근원을 개인의 것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최하림의 시는 그렇게 ‘중간의 미학’ 안에 서 있다.

아름다운 아지트, 목포 오거리
최하림은 목포의 바다와 그 안에서 질박한 삶을 이끄는 인간들의 힘이 만들어낸 시인이다. 그는 목포 오거리와 해안통 거리를 날마다 배회하며 시를 떠올렸다. 헤매임의 근저에는 굶주림이 깊게 놓여 있었다. 해방이 되고 몇 해를 앓다가 아버지는 목숨을 놓아 버렸다. 아버지의 부재는 집안을 가난으로 몰아 넣었다. 당시에는 등록금을 내지 못하면 교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고, 그는 책가방을 맨 채 해안통을 떠도는 일로 시간을 소진했다. 그 때 최하림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사리 때의 해안통은 그야말로 세상 모든 인간군상들의 집합소였다. 바다에서는 중선배들의 돛대가 수없이 솟아올랐고, 만선을 알리는 풍악이 해안통 전체에 울려 퍼졌다. 고기를 사기 위해 몰려든 상인들과 생선 비린내로 해안은 언제나 왁자한 풍경을 연출했다.
“해안통에는 언제나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이 날아 올랐고 술에 취한 뱃사람들이 사창가 골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해안통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시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굶주림이 시의 풍경 옆으로 나를 데려다 놓은 셈이다.”

<날이 피안에 미쳐 전화받고 있음을, 이렇게/인간의 의사가 전달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발밑까지 올라온 충실의 바닷물을 타고/배들은 항구로 돌아가는데/구석구석에서 어둠을 품으며 쏟아져 나오는/무수한 이들의 불안에 싸인 아름다움> (‘황혼’중)

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의 초기시들은 대부분 비현실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가 처한 현실이 불안한 기대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순간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아득한 나락에 서서 해안통을 적시는 바닷물에 마신 술을 토해내고 다시 마시기를 반복했다. 더구나 그는 당시 발레리의 시를 교본으로 삼고 있었다. 최하림의 초기시가 대부분 장문이고, 서구적인 이미지와 관념의 언어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 유달산의 가장자리를 타고 연결된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목포의 바다.
ⓒ 전라도닷컴


해안통의 현재는 크고 작은 상선들의 집합소로 정리되고 있었다. 해안을 사이에 두고 여전히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지만 그 시절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족의 감소로 인해 풍어와 만선은 이미 옛말로 굳어져 있었고, 해변가에 줄줄이 늘어서 만선에 들뜬 뱃사람들을 유혹하던 사창가들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60년대 초반 한국문학의 중심을 목포로 옮겨 온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오거리도 이제는 여느 도심가와 마찬가지로 소비와 향락만이 소통되고 있었다.
당시 오거리는 문학과 미술을 꿈꾸는 많은 청년들이 고뇌와 열정을 모아 밤낮으로 술판을 벌이고 토론의 밤을 지새우던 아름다운 아지트였다. 카뮈 추모의 밤이 열리고 음악의 밤과 시화전, 연극이 끊이지 않았다. 최하림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목포 오거리 일대를 걸으며 “내 생애에서 문학이 문학 자체만으로 성스러웠던 유일한 시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최하림은 당시 오거리 일대에만 대여섯 곳이 밀집돼 있던 다방들을 근거지로 몰려다니다가 김현과 김지하를 만났다. 오거리 일대에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건물은 단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최하림은 김현을 처음 만났던 다방이 있던 곳을 정확하게 가려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니체의 신에 대해서 열띤 논쟁과 공조를 번갈아 가며 벌였다.

오거리의 첫 만남 이후 김현은 평생의 친구였으며 경쟁자였고 스승이었다. “김현이란 존재를 만났기에 내 시는 목포 바닥을 벗어나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시간이 변하게 한 것은 목포 오거리만이 아니다. <별은 멀고/밤은 어둡고/얼굴은 붉었다/양수리 물가에 너를 묻어두고/고속버스를 타고 캄캄한 길을 달려/광주로 갔다 일하러 갔다> (‘김현을 보내고’ 부분)는 어두운 고백처럼 이미 김현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고, 평생의 친구를 땅에 묻은 최하림은 다음날 일을 하기 위해 광주행 밤차에 올랐다.

고요의 풍경, 그 이면에 담긴 소란
이즈음 최하림의 시는 고요한 풍경 속에 들어가 있다. 갑작스런 건강 이상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대면하게 했다. 그는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한 달쯤 뒤 다시 일어났을 때 봄날의 햇빛과 돌담 사이의 풀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 눈물만 흘렸다. 이후 그의 시들은 관념 대신 유리창처럼 투명한 언어로 만들어진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디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중)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 풍경 앞에서 최하림은 ‘아름답다’ 말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여전히 그와 한참의 거리를 두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풍경 속에 어둠이 내린다. 유리창에는 풍경 대신 유령 같은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저녁이 되어서야 풍경과 사람은 하나로 겹쳐진다.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 반응을/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가을날에는’ 부분)

그가 들여다본 풍경은 멀리서 보면 마치 절간처럼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의 이면 속에서는 수런거리는 소리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마치 나비의 여린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폭풍으로 돌변하는 ‘나비효과’처럼 끊임없는 관계 맺음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고요의 풍경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풍경, 세상은 사실 눈으로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실체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포를 떠나 다시 광주로 올라오는 길에도 최하림은 차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거기 시인의 눈에만 걸리는 또 다른 풍경 하나가 숨어 있었을 터이다.

*최하림은 1939년 목포에서 태어나 목포 오거리 일대를 중심으로 문청시절을 보냈다. 당시 목포는 찬란한 시절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미술과 문학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남농 선생은 아낌없이 그림을 그려 줬다. 그 그림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오거리 일대에서는 빈번하게 문화행사가 열렸다.
최하림은 미술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고 김현, 김승옥 등과 더불어 ‘산문시대’란 동인을 결성했다. 후에 김치수, 염무웅 등이 가세해 5집까지 동인지를 발간했다.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지만 문학에 대한 회의로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당시 최하림은 “시골 초등학교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사람이 시를 쓰는 사람보다 삶의 치열성에서 앞선다”고 생각했다.
평론가 황현산은 “최하림의 시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신비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정신 에너지의 주파수를 한껏 낮출 필요가 있다. 느껴야 할 것은 몸을 잘못 뒤채면 금방 끊어져버리고 마는 존재의 낮은 파동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 만큼 최하림의 시가 만드는 풍경은 낮고 고요하다. 또한 그 고요를 먼저 느껴야 이면의 소란까지 느낄 수 있다.
최하림은 1976년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를 펴낸 이후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등의 시집을 펴냈다.

 

인물
최하림
출생
1939년 3월 7일

출신지
전라남도 목포

직업
시인

데뷔
1964년 '조선일보신춘문예당선'

경력
1997년~1998년 전남일보 논설위원실 실장
1987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강사

수상
이산문학상
전남일보 논설위원실 실장

대표작
김수영 평전,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풍경 뒤의 풍경,
겨울 깊은 물소리,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애송시 100 - 46] 어디로? - 최하림

문태준·시인

 

 

 

어디로?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          



최하림(69)은 한글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62년 평론가 김현·김치수, 소설가 김승옥과 한글 세대 최초의 동인지 '산문시대'를 함께 냈다. 최하림 시인의 시는 점점 그윽하다. 그는 내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조금 걸어나가면 강이 바라보이는 양수리 그의 집에 갔을 때에도 그는 어둠이 내리는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은 "참 좋지요"가 전부였다. 그에게는 오연(傲然)함이 없다.

 

최하림 시인은 빛과 어둠, 정지와 운동 사이의 미묘한 오고 감을 살피는 데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 이 시를 읽어도 그렇다. 황혼이 내리는 무렵에 나무들이 있고 바람이 있고 오두막이 있고 사내가 있고 징검다리가 있고 흐르는 물이 있다. 이 존재들의 뒤에는 커튼처럼 황혼이 있다. 황혼은 아래로 하강하고, 바람은 직립한 나무들에게 수평으로 이동하고, 오두막과 사내는 수직으로 서 있거나 수직으로 움직이고, 물은 옆으로 흐른다. 존재들은 내려오고 올라가고 옆으로 이동한다. 움직이는가 했더니 곧 멈추어 선다. 동작을 보여주지만 격하지 않다. 시인은 돌보듯이 존재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건넨다. 하나만을 전유하려는 못된 버릇도 없다. 해서 존재들은 하나하나가 언뜻언뜻하고 얼핏얼핏하다. 어느 것 하나가 도드라질 양이면 그 윤곽을 살짝 지워놓는다. 마음은 곧잘 뛰쳐나가길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으니 갸륵하다. 마음은 이렇게 우묵하고 참할 때가 있다.

 

자작나무 껍질을 머리에 쓰고 너덜너덜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는, 숨어 살았다는 한산(寒山) "우스워라, 나의 길이여/ 거마(車馬)의 자국조차 없네/ 돌고 도는 시내의 굽이를 알 수 없고/ 첩첩의 산은 그 겹을 모르겠네/(…)/ 내 여기에 이르러 길 잃고 헤매느니/ 그림자를 돌아보며 '어디로?' 물어보네"라고 썼는데, 이 시에서는 나아갈 길의 향방조차 묻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잘 묻는다. 그러나 "어디로?" 라고 보채며 질문하지 말자. 다만 거기에 여기에 있을 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을 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할 뿐. 그럴 때 손결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듯 삶에는 빛이 인다. 그 빛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

 

 -아들에게/최하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들을 본다
아무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
지나가버린 시간들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서로 잘 어깨동무하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산다
비 내리는 둑에서
나뭇잎들은 푸르고
산색은 살아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슬픔 기쁨
으로 밤을 걸어가고 가끔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날이 깊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이 딱딱한 사물로 변해간다
내 손에서 따스했던 네 손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잃어버리게 될 시간들
을 생각하고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물푸레나무가
우거져 있다 시간들이 우거져 있다

 

 마음의 그림자

................................................... 최하림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 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 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욱 붉어 보였다


달이 빈방으로 -최하림- 모아모아

2008/09/22 23:24

복사 http://blog.naver.com/nampung112/80056201351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겨울 바람처럼

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 나가는 정경이 보입니다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 최하림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 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 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혹은
꽁지 붉은 비둘기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 포르릉 날며
흘러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음악세계 낭송詩] 독신의 아침 - 최하림
작성일: 2005/08/20 PM 07:01
작성자: 이라(iraclion)







독신의 아침


안개 속으로 부드러운
가지를 드러내는 버드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옥수수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마루를 닦기 시작한다
책들을 치우고 의자를 옮기고
쓰레기통을 비운 뒤 구석구석
물걸레질하다 보면 현관으로는
햇빛이 들어와 물살처럼 고이고
바람이 산 밑으로 쓸리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철새들이 말하며 가는 것을 본다.
순간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그리운 것들이 모두 집 밖에 있다.



- 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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