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제2전자시집 - 먼 산자락 바람꽃

먼 산자락 바람꽃

월정月靜 강대실 2026. 5. 3. 10:58

 

 

2시집

 

먼 산자락 바람꽃

 

강대실

 

 

 

 

 

 

 

 

 

 

 

 

 

 

 

 

 

유페이퍼

먼 산자락 바람꽃 / 목차

 

 

1: 동네 경사가 났다

 

산밭 1 · 10

큰댁 형수 ·11

국수 · 12

생가를 찾다 · 13

동네 경사가 났다! · 14

뜬소문 · 15

생금밭 · 16

고향집 · 17

자작골 봄밤 · 18

고향 산하(山河) · 19

고향의 만추(晩秋) · 20

산방 일기 1 · 21

산방 일기 2 · 22

산방 일기 3 · 23

산방 일기 4 · 24

 

 

2: 봄날 엽서

 

말바우 시장 1 · 26

말바우 시장 2 · 27

회초리 · 28

봄앓이 1 · 29

봄날 엽서 · 30

꽃마중 · 31

쑥잎 · 32

며느리밑씻개 · 33

아카시아꽃 그리움 · 34

사모곡(思母曲) 1 · 35

성묘 1 · 36

그리움 2 - 고향 노래 · 37

아픈 회상(回想) · 38

가을이 보내는 메일 · 39

가을을 두고 간 여자 · 40

골목길 · 41

가을 · 42

 

 

3: 오동꽃 피는 봄날

 

일출(日出) · 44

봄비 · 45

격포의 봄 · 46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 47

담쟁이 2 · 48

오동꽃 피는 봄날 · 49

석류화 지는 해거름 · 50

원추리꽃 · 51

해변의 밤 · 52

소래 포구 · 53

연동사(煙洞寺) · 54

늦은 귀갓길 · 55

홍시 · 56

가을 나그네 · 57

바람 · 58

겨울나무 1 · 59

겨울산 1 · 60

 

 

4: 부끄러운 날

 

수양산에 가다 1 · 62

걸레질 · 63

살아내기 1 · 64

살아내기 2 · 65

오늘 하루 2 · 66

부끄러운 날 · 67

산 찾은 날 · 68

정도리 구계등에서 · 69

가을 산사에서 · 70

산사 찾아가는 날 1 · 71

마당 풀을 뽑다 · 72

화분을 들이며 · 73

집 없는 달팽이 · 74

사랑을 위하여 · 75

낙화를 꿈꾸다 · 76

비움 · 77

 

 

5: 행복 예감

 

화롯불 곁에서 · 79

아들 전 하서(下書) · 80

그대의 고독을 위하여 · 81

세상 눈뜨기 · 82

()은 생()이다 1 ·83

또 다른 출근 · 84

행복 예감 · 85

어느 여름날 1 · 86

어느 여름날 2 · 87

미움 · 88

고향에 띄운 편지 · 89

산을 바라봅니다 · 90

제야의 세목(洗沐) · 91

새해 기도 · 92

또 한 해를 위하여 · 93

 

 

작가 소개 월정 강대실

발문/향수(鄕愁)어린 사무친 동경(憧憬)에의 영상(影像) - 시인 정소파

 

 

 

 

 

 

 

 

 

 

 

 

 

 

 

 

 

 

 

 

 

 

 

 

 

 

작가의 말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부질없이 세상을 향하여 또 한 번

종주먹을 들이대는 일일지 모르지만.

 

어느 누가

살아 온 삶을 다 말로 할 수 있으랴마는

가슴속 한 켠에 꼭꼭 묻어두고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진솔한 노래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들이지만

착하게 살아가면서도 늘

가슴 시려하는 이웃들에게

한 가닥 햇살이 될 수 있다면

보람으로 알고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20265

秋月산방에서

강대실

 

 

 

 

 

작품 소개

 

 

 

 

자연과 삶의 결을 따라 사유를 펼친 두 번째 시집이다.

산자락과 바람, 그리고 일상의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감정은 절제된 언어로 담담하게 흐른다.

시인은 지나온 시간과 마주하며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삶의 태도를 조용히 드러낸다.

작은 사물과 순간에서 길어 올린 의미는 과장되지 않은 언어로 스며들어,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비움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다져진 시편들은 삶의 결을 더욱 또렷하게 비추며, 사유의 깊이를 한층 더 확장해 간다.

이 시집은 조용한 울림으로 독자와 마주하며, 각자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여백을 남긴다.

 

 

 

 

 

 

 

 

 

 

 

 

1

 

동네 경사가 났다!

 

 

 

 

 

 

 

 

 

 

 

 

 

 

 

 

 

 

 

 

 

산밭 1

 

 

 

 

앞장선 기억 따라, 산발치
칙칙한 오솔길 타고 드니

찔레나무 두렁을 파고들어
여기저기에다 진을 치고

개망초 우부룩이 모여서
한바탕 새하얀 춤판인데

좋은 미영밭 다 묵혔다고
솜구름 눈흘기며 영을 넘는다.

 

 

 

 

 

 

 

 

 

 

 

 

 

큰댁 형수

 

 

 

안 잊고 꼭 상골 찾습니다
큰댁 형수, 동구 밖 벅수처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십니다

해와 달 번갈아 이고 지며
한세상 밭고랑창에 묻혀 사시다
허위허위 녹두밭 윗머리에 다다르신 

앞 고샅 돌멩이 채이는 소리에
고무래처럼 휜 허리 일으켜
뒤뚱뒤뚱 사립까지 걸어 나오시는

“아재요, 나는 아주 잊은 줄 알았어!”
두 손 덥석 받아 쥐고
한사코 안으로만 들자 하십니다

마주 앉으면 그새 더 왜소해진 데다 
여기저기 거뭇거뭇한 저승꽃 
가슴이 아르르 저며 옵니다.

 

 

 

 

 

 

 

국수

 

 

 

 

담양 땅 당도하면
관방제 초입, 초사막 국수거리 들러
멸치국수 한 대접 하고 간다.
기다라니 늘어선 느티나무 그늘 아래
이마를 맞대 내놓인 평상
손님들 틈서리 비집고 올라서
한쪽 빈 상머리에 자리 잡고 앉으면
국수 한 그릇 꼬옥 먹고 잡더라만
문 앞까지 갔다가는 그냥... 하시며
허리춤에 묻어 온 박하사탕
가댁질 치다 우르르 달려드는
자식들 입에 눈물처럼 물리시던 어머니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 위로
흔흔한 미소 뒤에 가라앉힌 그 허기
원추리 새순처럼 뾰조롬 솟아올라
국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들이킨다.
내 안의 배고픔 대신 채우고 간다.

 

 

 

 

 

 

생가를 찾다

 

 

 

 

강담에 비듬히 기대인 철문 밀치자

꽃초롱 밝혀 든 참깨

두엄자리에 나와 멀끔히 쳐다본다

주인 영감님 겉잠 자며 손짓하는

때 절은 마루턱에 엉거주춤 앉으면

발길 뜸한 마당 여기저기에서

돌부리 입을 삐쭉삐쭉 수군댄다

주춧돌에 붙들린 기둥뿌리 삭고

바람은 벽 여기저기 구멍 내며 다닌다

소복소복 꿈을 키우던 윗방엔

빛바랜 책상이 한쪽에 맥없이 앉아 있다

눈감고도 훤한 뒤꼍에 돌아가자

성한 장독은 온데간데없고

아픈 것들만 몇 샐쭉 토라져 있다

웃자란 옥수숫대 헉헉거리며

골방 부엌간 허물어진 슬레이트 떠받고

서까래에 얹힌 흰 구름 무심하다

울안으로 기다란 팔 내밀고

홍시 떨구던 늙은 감나무 베어져 없고

자두나무랑 까치발 딛던 죽나무

우뚝이 갈맷빛 뽐낸다.

 

 

 

 

 

동네 경사가 났다!

 

 

 

 

넷째야, 동네 경사가 났다!

아래 고샅 상 큰댁 네 순기 형

순하디순하고 일 잘 하는 순덕이

산고를 앞산이 다 쩌렁쩌렁 따라 울더니

순산했는갑다, 아까참에

네 배 짼디 잠잠해졌다 인제는

야야! 낼 아침에는 식전에

갈초랑 큰 소쿠리에다 속겨 꼭꼭 눌러 담아

한행부 살째기 짊어다 주어라

먹고 새끼 젖 잘 물리고 얼른 힘 타,

농골 수렁배미 애갈이해야 쓴다 해토하면

그러고, 단단히 일러두어라

이참에는 송아치 암수 간에 젖 떨어지면

기스락 밑에라도 꼭 판도치 숙부네 집에

소고삐 매어 줄 생각 하라고

소 뜯기던 언덕 너머 금살 소 울음소리,

망각의 강 질러오는 아버지 말씀.

 

 

 

 

 

 

 

 

뜬소문

 

 

 

 

돈 버는 일 그만두고 나면 
이왕이면 탯줄 묻힌 향리 쪽에다 
토막집이라도 하나 마련하여 
詩도 쓰고 고즈넉이 살고 싶었다
 
호젓한 산자드락 양지바른,
주춧돌 놓을 만한 자리 없을까 하고
아내랑 여기저기 둘러보다
안면 있는 몇몇 만났더니
 
이젠 다 망해 굽도 젖도 못 하고
기어드는가 보다 비아냥대고
몰래 숨어든 게 틀림없다고
수군댄다는 소문 자자했었지.
 
머리털이 약쑥같이 희어지도록
호박꽃 소망 고이고이 품고
날이날마다 고향 하늘 우러르며
부끄럼 없이 살아온 내 마음을,
어느 누가 알기나 했을까.

 

 

 

 

 

생금밭

 

 

 

 

상골* 아들 부잣집 양반,

다랑논 부쳐서는 층층이 커가는 새끼들

지겟다리 장단에 초부타령 못 벗어난다고

여기저기서 하많은 새꺼리* 끌어대

언제든 대톱 하나로 뭉칫돈 캐내는 왕대밭

동네 들머리 신작로 가에 마련하셔

보람 반 꿈 반 생금밭 가꾸며

꼭두새벽 이슬을 쓸고

앞산 마루 솟는 달 바지게에 지고 드시니

촌로들 거친 입살이 밑거름 되어

세세연년 빼곡히 죽순이 솟아오르고

죽물꾼들 청죽 한 다발 베어 달라 줄을 서니

어섯눈 뜨게 된 자식들

두 분 어르신 대꽃 되어 가시자

어느 결에 줄줄이 들어앉은 외지인 주춧돌

울창한 꿈의 생금발이 애처롭다.

 

* 상골: 작자의 고향 마을을 이름.
* 새꺼리: 옛날 흉년이 들었을 때 부잣집에서 쌀이나 곡식을
꾸어다 먹고 이듬해 농사를 지어 두배로 갚아주는
제도를 일컫는 전라도 방언.

 

 

 

 

 

 

고향집 

 

 

 

굴뚝새 포로롱 달아난
어스레한 헛청 여기저기
어지러운 거미줄 살풍경하다.

등태 흘린 빈 지게
토담 벽 기대어 서서
등에 업고 나설 주인 기다리고

날근날근한 덕석 몇 닢
삭은 나무토막 베고 포개 누워
곤히 잠에 들었다

땀에 벌겋게 절은 괭이 쇠스랑
날이 금 간 삽, 구석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허리 구부러진 호미  
불쑥 튀어나와 응석 부리며
발목 거머잡는다.

 

 

 

 

 

 

자작골 봄밤

 

 

 

 

쑥잎 다보록이 돋아나
하늘 희뿌옇게 장막 진 봄날
앞산 마루 곰바위 빤히 굽어보는

자작골 산방에 다들 모여들었다

 

세상 사는 것처럼 꼭 한 번 살자더니
돌아보면 물 위에 떠도는 나뭇잎

기대할 건 대답 없는 바람뿐이라고

골짜기보다 깊은 회한
먼 산골짝 어느덧 어둑발 내린다


주배 돌아갈수록 넘치는 우정
방 안 가득히 흐르는 취기

함께 있어도 혼자 고독을 고독하고

주검처럼 골방 천장 서까래 응시한다


노래방 옛 노래 목이 메어서
바람은 꽃잎 몰아다 밤새 문을 때리고

두 눈 말똥말똥한 불면 속
속절없는 봄밤 길기만 하다.

 

 

 

 

 

고향 산하(山河)

 

 

 

 

아래로 아래로
 낮추어 살으라


무겁디무겁게
 다스려 살으라


그러나, 마음속 텃밭은
청청히 가꾸거라!


고향은 나볏이
 펴놓고 기다린다.

 

 

 

 

 

 

 

 

 

 

 

 

 

고향의 만추(晩秋)

 

 

 

 

일손 거둔 촌로

토담 밑 웅크리고 앉아

절은 노을 좇고

 

사립 잠든 빈집 앞

누렁이 한 마리 졸다 깨어

꼬리를 까딱인다

 

빛 잃은 먹감나무

까치 기다리다

고샅길에 홍시 흘리고

 

유년의 추억은

개울 가 갈꽃으로 피어나

하얀 바람 되어 날린다.

 

 

 

 

 

 

 

 

 

 

산방 일기 1

 

 

 

 

지금에사 드느냐며 
산이 내려와 덥석 손 잡는다 

얼마나 사나 볼란다고 
개울물 쑥덕이며 뒤따라오고 

얼간이가 발붙인다며 
새앙쥐 곁눈질로 지나가고 

속없는 살쾡이 부부 
잔칫상 안 차리느냐 내다본다.

 

 

 

 

 

 

 

 

 

 

 

 

 

산방 일기 2

 

 

 

 

헌 살림살이 몰아 실은 화물차 
질퍽한 마당길에 세워놓고 
여기저기 내려 놓을 자리 재고는 

산창 열어젖뜨리고 짐 푼다 
여기는 서둘러 어둠이 든다고
산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힘 보탠다
한데, 어떤 무례한 것들인지
되게 신경 쓰이게 한다며   
산마을 개들 여기저기서 짖어대고
개울 건너 늙은 주막집 앞 외등
연신 눈을 끔뻑끔뻑해 대자 

안주인 신작로에 나와 어정거리다  
한참을 눈길 주고 들어간다.

 

 

 

 

 

 

 

 

 

 

산방 일기 3

 

 

 

 

추적추적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 
한숨 돌리는 새에 
누더기 짐 후다닥 내려놓고 
들이키는 산수(山水) 한 대접 
세사 흔적 없이 녹는다 


세간 정리에 밤 깊은 줄 모르고 
걸레질이 흥겨운 아내는 
마냥 처제와 입이 맞아 
선뜩선뜩한 방에 온기 넣는다 


옳아, 내 왜 모르리오!
삼십 여년을 하루같이 외통수 바라보다 
깊은 속 괴인 짜디짠 그 눈물 


예가 목마르게 노래한 낙원이라오 
산주 되고 거처 한 칸 내고 
무시로 드나들 시간 거머쥐었으니.

 

 

 

 

 

 

 

 

산방 일기 4

 

 

 

 

들둑길 느티형제가 
허리를 일으키며 말 건넨다
왜 여태껏 오지 않았느냐
지나는 길에라도 한 번
들러가지 않았느냐고 
삽심 년 전쯤 어느 여름날
무거운 하루를 쉬어가더니
말쑥이 잃었더냐며
기억의 갈피를 더듬는다 
냇가 돌멩이같이 
닳진 않아 천만다행이라며 
산바람 불어오니
어여 들라 돌아선다
어떻든 허몽을 품지말라
신신 당부한다.

 

 

 

 

 

 

 

 

 

 

 

 

2

 

봄날 엽서

 

 

 

 

 

 

 

 

 

 

 

 

 

 

 

 

 

 

 

 

말바우시장 1

 

 

 

 

마음이 헛헛하고
일손조차 무거워지는 날이면
저린 그리움 새떼처럼 몰려와
말바우 저잣거리로 나선다

생의 구렁에서 허덕여 본 사람은 안다
남모를 눈물 찍어내 본 사람은 보인다

현란한 네온의 길섶
가로수 성긴 그림자 밑
그믐달처럼 졸고 있는 고향 마을

한 생꿈 한 동이 땀 한 섬
휜 허리에 짊어지고 버텨온 세월
검은 비닐 봉다리마다
 한 줌, 덤 한 저분  더 얹어 주시는 어머니

 

 

 

 

 

 

 

 

말바우 시장 2                       

 

 

 

 

몸조리 할라고 순댓국집 담 쌓다가

그리워지는 사람 냄새, 시장통을 기웃댄다. 
외국 며느리 맞아 사대독자 면한 리어카 아재,
일 탓이라며 하고한 날 막차더니
젊은 부장과 눈 맞은 아내 버리고 낙향한 서울 영감,
노모 백수에 쌀 백 가마 이웃에 쾌척한 방앗간, 
빈 병 주워 반백 년 모은 짠지 같은 돈으로
이층집 지어 삼일 잔치 벌인 꺽다리,
단돈 이천 원에 고깃국 배불리 주는 할매집,
노점상 곗돈이랑 사방 일숫돈 싹둑 베어먹고
밤봇짐 싼 푸줏간 도 씨 소문이 자자하다.
웃음과 눈물과 한숨이 뒤범벅되어
온통 질척질척한 장바닥
파장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 절뚝인다.

 

 

 

 

 

 

 

 

 

 

회초리  

 

 

 

 

여명 첫 자락 잡고 태왕봉 오른다 
동천(東天) 해맑은 강물에 
뽑아도 뽑아도 잡풀 돋아나는 마음 씻고 
산기운 받아 큰 바위 품고 내려오는 길 
번쩍, 들려주신 아버지 말씀 떠올라 
회초리 하나 꺾어 든다 

귓불에 솜털 보송한 두 녀석 
요량 없이 북새틈에 끌고 나와서는
허겁지겁 삶의 가파른 고빗길 넘다 돌아보니 
언제고 되새길 수 있는 말 한마디 
가을 나이 되도록 심어 주지 못했으니 
어이 두고두고 떳떳할 수 있으랴 

이 회초리 잘 보이는 데다 올려놓고 
들면날면 바라보며 가슴속 품고 살다 
혹여, 어둠 그림자에 발 닿은 성싶으면 
스스로 얼른 꺼내어서 
자기 종아리 찰싹찰싹 내려치게 하리라

 

 

 

 

 

 

봄 앓이 1

 

 

 

 

양지쪽
빈 화분에
잡풀이 가득

지천명
시린 가슴에
그리움 한가득.

 

 

 

 

 

 

 

 

 

 

 

 

 

 

 

 

봄날 엽서

 

 

 

 

황사바람 훔친 하늘에 금살 넘실댑니다

구례 지리산 들머리 고향 마을 산수유

어느새 여울여울 꽃불 탑니다

그대여, 지금 내가 못 견뎌 하는 건

봄이 너무 좋아서가 아닙니다

무심히 흐르는 섬진강 탓도 아닙니다

그대 떠난 자리에 외로 나동그라진

차디찬 돌멩이여서가 아니고

사무치는 그리움 못 참아도 아닙니다

그대여, 내가 긴긴 봄밤 망연히 지새는 건

하 많은 바람의 싹 파릇이 못 틔워 내고

떨쳐 버리지도 못해서가 아닙니다

가슴을 쓸어안고 피다 스러지는

민둥제비꽃 어르는 봄비의 아픔이 아니고

거기 그냥 서 있는 산 갈마들어 보듬는

계절의 목마름은 정말로 아닙니다

그대여, 지금 내가 너무도 못 견뎌 하는 건

서천에 붉게 타는 저 노을의 아름다움

감히 그대는 까맣게 몰라서 입니다.

 

 

 

 

 

 

 

꽃마중

 

 

 

 

광양 다압면 매화마을

매화꽃 소식에

꽃 마중 간다

꽃 같은 내 님이랑

 

하늘에 산천에

꽃처럼 고운 눈꽃 내리고 

바람 따라나선 꽃잎

꽃길을 수 놓는다

 

강섶 매원 가득히 꽃바람

단꿈 깊은 매실나무

시린 꽃눈 위에

난분분 난분분 눈꽃 진다.

 

 

 

 

 

 

 

 

 

 

 

쑥잎

 

 

 

 

강변에 곰삭은 쑥대에서도
어머니 무덤가 쑥잎에서도
그윽한 쑥 냄새 납니다.


소복이 자라나다 말고
쑥개떡 되었던 쑥이여
끝끝내 어머니 그리움 부르는
못 잊을 쑥잎이여


눈에 띄면 왠지 서글퍼져요
가슴에 스미는 어머니 살내음
자꾸만 눈시울 붉어집니다.

 

 

 

 

 

 

 

 

 

 

 

며느리밑씻개

 

 

 

 

돌아보면 볼수록 

기막힌 일도 

앙가슴 속 묻어 두고                 

                          

산그늘에 홀로 앉아 

몰래 짓던 한숨도 

세월물로 흘러 흘러 

 

억척스런 걸음마다 

하얀 별이 흐드러지고

 

뭣 모른 마파람

밑 씻더만 울며 간다.

 

 

 

 

 

 

 

 

 

 

 

아카시아꽃 그리움

 

 

 

 

달이 둥실 떠오르면 그대는
누구 얼굴 보고 싶나요
별이 총총한 하늘 바라보며
누구의 별 찾아 헤매시나요


잊으셨나요 하마
두견이 아련한 울음소리
밤은 깊은데 헤어지기 싫어
호반에서 우리 별이랑 소곤대다

아카시아꽃 향기 너무 좋다고,
그래서 슬프다고
스르르 흐르는 눈물 훔치다 들켜  
그만, 엉엉 울어버린 그대

길 잃은 휘파람새 한 마리
파르르 품으로 날아들자
가여워 오지랖에 살포시 안고
고이 지새운 밤 진정 잊으셨나요.

 

 

 

 

 

 

 

사모곡(思母曲) 1 

 

 

 

 

아들딸 맘대로 둘 수 있냐고

둘러앉은 손자들 어르며

얼른 꽃 터 하나씩 팔아보라고

훤히 웃으시더니

 

사는 것 맘대로 할 수 있냐고

허줄히 지나는 이 손짓하여

옷가지 요깃거리 챙겨 주시며

흔흔해 하시더니

 

죽는 것 맘대로 안 된다고

저승사자 야속타 원망하며

용한 의원 예제 찾아 헤매다

삼베옷 한 벌로 떠나신 당신

 

어머니, 이젠 편안하신가요

하늘 세상 참으로 좋으신지

한 아름 미소 머금고

가끔은 꿈길에 들러 가시고.

 

 

 

 

 

 

성묘 1

 

 

 

 

설날 아침 서둘러 차례를 지내고 
큰집 작은집 조카들 데리고 
장형 막내랑 삼형제 나란히    
부모님 산소에 성묘 드린다.
두 아들은 지난밤 꿈길에 다녀갔다, 
올 한 해도 우리 새끼들 모두 다 
들은 말 들은 데 버리고 
본 말 본 데 버리도록 해라, 
가슴은 따뜻해야 이뿐 꽃 안는다.
아버지 금싸라기 같은 덕담에 
벌안 가득히 영롱한 햇살 넘실거린다.
돌아서는 발길 가벼운데 
어머니는 서낭당 고개 다 넘도록 
바라보고 서서 손사래 치신다.

 

 

 

 

 

 

 

 

 

 

그리움 2

-고향 노래

 

 

 

 

가신 님 그리워 찾아왔더니


보리밭에 까투리 뒷산 두견이


같이 듣던 고향 노래 불러댑니다


언덕배기 찔레꽃 봄날이 향기롭고


삐비꽃 들판 가득 하늘대는데


혼자 듣는 그 노래 눈물 납니다.

 

 

 

 

 

 

 

 

 

 

 

 

아픈 회상(回想)

 

 

 

 

밤중에 돌담이 와르르 무너지더니
서녘 노을빛 곱게 물든 장동 할매
어지럽다며 아랫목에 돌아눕더만
산들바람 자듯이 가셨답니다

가뭄에 앞도랑이 자작자작 마르더니  
집 떠나 고생을 사서 한 아래뜸 형
이슬길에 실족하여 된숨 내쉬더만
땡감이 떨어지듯이 가셨답니다

왕대밭에 대꽃 피고 시나브로 죽더니
축산에 원대한 꿈을 건 안고샅 양반
자꾸만 빈 우사 망연히 바라보더만
하늘이 내려앉듯이 가셨답니다

샘터길 감나무가 우지직 부러지더니
평생 밭고랑에 엎디어 산 기동 엄니
온 삭신이 쑥쑥 아려서 고생하더만
집스랑 끝 낮달 이울듯이 가셨답니다.

 

 

 

 

 

 

가을이 보내는 메일

 

 

 

 

행여 보고 싶으면 오시오

이왕 오려면 이 가을로

거기 순한 앞바다 안고 오시오

출구에서 새초롬히 기다리다

눈길 마주치면 통성명하고

불붙은 산 들앉은

호변 한갓진 데로 갑시다

개켜 둔 보고자움 붉게 털어내고

잠깐 사자산 턱 밑 산방 들러

시 향에 취해 봅시다

절집 없는 절도 둘러보고

꽃무릇 잉걸불로 그리움 사른 뒤

해 넘어가기 전 서둘러 돌아섭시다

다시 그리움 키워 살기로 하고.

 

 

 

 

 

 

 

 

 

 

 

가을을 두고 간 여자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

먼 하늘, 나의 별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지새워 목쉰 독백 나누었을까

 

팔려가는 송아지 같은 속울음 소리

차창 밖 가을 산은 알아챘을까

바람은 새살새살 달래 주었을까

 

하마, 망각의 강 질러 멀리멀리 갔을까

산책길 붉나무, 연신 떨구는 잎새 헤며

추억의 향기 헤적이고 있을까

 

계절이 오고 갈 때면 아리게 떠오르는

가을을 두고 낙엽 따라 간 그 여자

앙가슴에 꺼멓게 멍울지는 그리움.

 

 

 

 

 

 

 

 

 

 

골목길

 

 

 

 

골목길을 좋아한다
풀잎 향 그윽한 들판 오솔길이나
갯냄새 물씬 풍기는 바닷길도 좋지만
인정이 뭉뚝뭉뚝 묻어나는 골목길이 더 좋다 
먼동 트면 서로 먼저 내 집 앞 깔끔히 쓸어
새날을 기도의 마음으로 열어서 좋고

살살이 어느 틈에 종종걸음 쳐 나와
깔깔깔 그림자 쫓는 반가운 인사가 좋다 
울담 위로 슬그머니 고개 내민 장미
쏟아붓는 새빨간 미소를 만나 좋고
삐그시 열린 자그마한 쪽문 사이로
주인댁 소박한 일상 들여다보여 좋다
성근 울 틈으로 성깔지게 흘러나오는
갓난애 보채는 소리 절창처럼 좋고

개구쟁이들 모아들어 가댁질치다 쏟아내는
해맑은 웃음과 우정이 답쌓여서 좋다 

바람길 그늘터 평상에 모여 앉은 이웃사촌
도란도란 나누는 구수한 이야기꽃 좋고

손님을 맞고 보낼 때에는 대문 앞에 나와
주고받는 살가운 정이 정말로 좋다.
 

 

 

 

 

 

가을

 

 

 

 

여보,
저어기 보이소 !
 
멍석 위에 한가득 널린
버얼건 고추,
새색시 적 당신의 갑사 치마.  
  

 

여보 여보,
저어기도 좀 보이소 !
 
감낭 가지 덩그맣게 달린
두웅실한 호박,

큰애 가졌을 적 당신의 만삭.

 

 

 

 

 

 

 

 

 

 

3

 

오동꽃 피는 봄날

 

 

 

 

 

 

 

 

 

 

 

 

 

 

 

 

 

 

 

 

일출(日出)

 

 

 

 

앞냇물에 세수하고


슬그-미 일어서며


보드­득 보드­득 물기 훔치는


열일곱 큰애기

 

해맑은 얼굴.

 

 

 

 

 

 

 

 

 

 

 

 

 

 

 

봄비

 

 

 

 

그리도 뼈마디가 쑥쑥 쑤시고
온몸 소리 없이 아파 오더니
 
가까이 산 울어대는 소리
지붕 위에 바스러지는 정적
 
섬뜩섬뜩한 냉기 서성이는
긴긴 기다림의 창 열어젖히면
 
빼곡히 밀려든 어둠 속에서
갈한 대지를 어르는 속삭임

 

비가 내린다 다디단 봄비가
꼬박꼬박 기다린 착한 산천에.

 

 

 

 

 

 

 

 

 

 

격포의 봄

 

 

 

 

갈매기 실어 올린
향그러운 남녘 바람
어줍은 미소로 아장거리고


가쁜  토해내던 파도
시샘으로 종알대며
부푼 갯가에 입맞춘다


볕뉘 떨어지는 갯바위
이지렁스레 올라앉은 
수많은 부지런한 생명들


얼었던 계절 녹이며

도란도란
애잔한 봄을 캔다.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처마 밑 고드름 끝에선
송알송알 땀 영그는 소리

눈 덮인 텃밭에선
쫑긋쫑긋 마늘순 기지개 켜는 소리

깨어진 얼음 사이론
낮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

강바람에 실려오는
산까치 짝꿍 부르는 소리에
매화와 산수유 입술 터졌다.

 

 

 

 

 

 

 

 

 

 

 

 

담쟁이 2

 

 

 

 

지가 무슨 변강쇠라고

 팔이 부러지고도

담장 위에 올라앉아

앞집 큰애기 훔쳐보네.

 

 

 

 

 

 

 

 

 

 

 

 

 

 

 

 

오동꽃 피는 봄날 

 

 

 

 

오동꽃 향기 배인 봄바람 붙잡습니다 
서덜에 벌러덩 누워, 산새 소리 줍습니다
 
양에밭 너머 젊은 산 불러냅니다
영마루 걸린 흰 구름 훌쩍 올라탑니다
 
어느 결에 넓적넓적이 피어난 감잎
해맑은 햇살 속 은빛 날개 파닥거리면 
 
각시풀 캐는 지지배 소꿉 바구니에  
노오란 쌍 나비, 사랑놀이 한창입니다. 

 

 

 

 

 

 

 

 

 

 

 

 

 

석류화 지는 해거름

 

 

 

 

뜨락 한 켠
휘늘어선 짙푸름 속에
자지러지는 선홍빛

실바람
하르르 하르르르
꽃잎을 실어 내리고

석류 꼭지
토-ㄱ 도르르
스러진 꽃잎 찾아 나서면

졸고 있던 강아지
깨갱!
놀라 깨어지는 노을.

 

 

 

 

 

 

 

 

 

 

원추리꽃 

 

 

 

 

볕내 받아먹고 
쫑깃쫑깃 움터 올라 

어느결에 기른 청모(靑毛) 
찬이슬로 감아 빗고 

깊은 속 그리움인 양 
오롯 세운 꽃대 끝에 

별빛 모아 고이 빚은 
금쪽같은 꿈송아리

 

 

 

 

 

 

 

 

 

 

 

 

 

해변의 밤

 

 

 

 

해풍은 찌든 영혼 어르다
노송 가지 끝 새살대고
외로움 곱게 빗질한 달
바다에 떨어져 도도하다

쏟아지는 별빛에 취해
파도는 합주를 멈추고

속객의 발자국 닦는 갯돌
이슥토록 우리고 씻어낸다

벗들의 푸르른 정리에
밤은 늪인 양 깊어만 가고

멀리서 시새우는 등대
전설의 별로 숨 쉰다.

 

 

 

 

 

 

 

 

 

소래 포구

 

 

 

 

가슴에 달무리 진 사람은

시흥에서 가까운 월곶 소래 포구에

한 번쯤 가볼 일이다

징검징검 걸어 나가던 물살이

깃발 달고 연줄연줄 찾는 그곳

꼬옥 들려 볼 일이다

기차가 길 잃어 추억으로 남은 철교,

수없이 높고 낮은 어깨 스치면

안주는 거저라며 권하는 대포잔에

잠깐 마음 축여 볼 일이다

저잣거리에 종종걸음 내려놓고

서해의 퍼덕이는 은빛 얼굴로

질척이는 장바닥 좌판 위에서

풋풋한 눈망울을 맞아 볼 일이다

졸깃졸깃 씹히는 바다 한 접시에

권커니 잣거니 소주 몇 잔으로

자욱한 먹구름도 걷어내는 포구

꼭 한 번쯤 가 볼 일이다.

 

 

 

 

 

 

 

 

연동사(煙洞寺) 

 

 

 

 

빠-ㄴ한 길 없다

불이문 없다

 

절 집 없다

객님도 없다

 

마당에 나이 많은 석불 하나

오백나한 기다리며 경 왼다

 

긴 잠 깨어난 석탑

천 년 빛 품고 사바 중생 부른다

 

노천법당 피어오르는 향연

적막 속 극락 세상 연다.

 

 

 

 

 

 

 

 

 

 

 

늦은 귀갓길

 

 

 

 

서녘 하늘가에 눈 흘기는 반달

텅 비인 차도엔 주검 같은 적막 

어스름 골목길 엉금썰썰 고양이

문간 들어서자 냉가슴 앓는 철문.

 

 

 

 

 

 

 

 

 

 

 

 

 

 

 

 

홍시      

 

 

 

 

이파리 새에 숨어, 보일락 말락

숨바꼭질하는 홍안의 미녀

키가 훌쩍한 전짓대  술래

살금살금, 꼿꼿이 서서 손 내밀자

눈 아래 아스라한 돌팍 위로 훌떡

미안은 간 데 없고, 낭자한 선혈뿐.

 

 

 

 

 

 

 

 

 

 

 

 

 

 

 

가을 나그네

 

 

 

 

어이 보여드려야 합니까
이 깊은 속내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이 영롱한 속울음을


돌아서라, 돌아서라
하얗게 손 흔들어대


스산한 가슴 한 자락
여울목에 내려놓고


 처연한 바람 됩니다  
가을 나그네.

 

 

 

 

 

 

 

 

 

 

 

바람

 

 

 

 

잎도 꽃도 다 가고 없는

들녘 허둥대다가

 

하늘 바라 기도하는

마른 가지에 매달리다가

 

묵정밭 곰삭은 쑥대밭에

곤두박질치다가

 

어디에도 영원은 없다고

흐르는 샛강 같은 것이라고

울부짖다가

 

길 잃은 짐승 되어

송림 속으로 꽁지 감춘다.

 

 

 

 

 

 

 

 

 

 

겨울 나무 1

 

 

 

 

온몸에

계절로 매단

넘치는 희열

 

훌훌 털어

날려 보내고

심념(深念)에 젖다

 

찾아든 삭풍

목 쉰 노래에

별이 잠들면

 

하늘 바라

독백으로

언 강 넘는다.

 

 

 

 

 

 

 

 

 

겨울 산 1 

 

 

 

 

눈산에 갔습니다

냅다 시루봉에 올랐습니다

바위 밑에서 숨 돌리고는

산자락 바라보면

갓 한낮이 설핏한데도

이고 지고 옹옹대는 건 나뿐

건넛산으로 눈 돌리면

자잘한 바람에 흔들리다

벌러덩 나자빠진 것도 나뿐

산도 나무도 모두가 털털 털어내며

새하얀 숫눈밭에서

살풍을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4

 

부끄러운 날

 

 

 

 

 

 

 

 

 

 

 

 

 

 

 

 

 

 

 

수양산에 가다 1

 

 

 

 

턱 끝까지 차오른 숨
수양산 그늘에 내려놓고
먼 하늘 강물에 목 축인다

 

길을 가다보면
눈에 허깨비가 잡힌다
애먼 데로 향하기 쉬우니
눈에 쌍초롱을 켜 달아라

 

그늘 드리운 노송의 말씀
귓전을 울린다

 

손 내밀면 잡힐 듯 말 듯 한
욕망의 긴긴 여정
지름길 생각 솟대 같지만
참아낸 고통만큼 끝은 번듯하리

 

연신, 칙칙한 구름 걷히더니
별빛 청청히 쏟아져 안긴다.

 

 

 

 

 

 

 

걸레질

 

 

 

 

선뜻 동한 마음, 계단 걸레질한다

닦아도 이내 얼룩지는 발자국들

꼭대기부터 차근차근히

 

날마다 마주하는 청소원

생의 에움길 치닫다
때론 다친 마음의 날들을

 

등줄기 땀이 어느새 씻어낸 듯

늘 얼굴에 번지던 미소 떠올리며

샅샅이 닦아 내린다

 

연신 가벼워지는 손놀림

슬며시 밀려드는 기꺼움

배어든 얼룩까지 말끔히 지우고

 

걸레 바닥 같은 마음결도 함께

몇 번이고 헹궈

맑은 물에 우려놓고 나면

 

어느 결에 투명해진 머릿속

정갈한 내 몸 위로

고요가 땀의 언어로 흐른다

 

 

 

살아내기 1 

 

 

 

 

짜고 
맵고 
쓰디쓰지만 

꿀꺼덕

삼킨다 

지명의 日月.

 

 

 

 

 

 

 

 

 

 

 

 

 

 

 

살아내기 2

 

 

 

 

식솔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라치면     

칙살스럽더라도 납작 엎드려

끝끝내 살아남아야 한다

 

바람 앞질러

근지러운 데 찾아 긁어 주고
입 맞춰 그림자로 따라나서다가도

결단의 문턱에 서면

뾰로통 머리 내미는 내 안의 나

던지러워

스르르 접어 버리는 위선

비럭질 할망정 다리아랫소리 못해
물린 밥상 차지한 오늘도
 들어 부끄럼 없이 하늘 우러른다.

 

 

 

 

 

 

 

 

오늘 하루 2 

 

 

 

 

가슴에 대못이 들어와도
벌레 씹은 상은 말아야 한다
속에 방망이가 치밀어도
청강수 품어 삭혀야 한다.

알몸으로 불 속을 뒹굴고
벼랑에서는 훌쩍 굴러야 한다
바위산을 강 건너로 옮기고
대낮에도 별을 따와야 한다.

몰아치는 바람머리 돌리고
바닷물을 가로막아야 한다
원이라면, 땅을 핥아야 한다
속창아릴 빼놓고 살아야 한다
죽은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부끄러운 날

 

 

 

 

출근 시각 재며 뜨락 버정이다

햇살 놀지 않는 울 밑

웃자란 철쭉나무 사이

풋풋한 잡풀 하나 본다

 

실낱 줄기 훌쩍 하늘 바라보고

꽃은 어느새 피웠는지

씨알 몇 낱 노랗게 여물인다

 

쑥 뽑아버리려 하자

지지직 뼈마디 늘어나는 소리

손끝에 발동한 질긴 고집에

끝내 울컥 쏟아 내는 울음

 

컴컴한 땅속에서 얼마나 쓰디쓴

땀을 흘려 버둥질 쳤으면

이리도 튼실히 욕망을 다졌을고

 

흘렸을 땀방울 헤아리다

못 된 소가지에 갖은 여우 짓으로

알토란같은 세월 다 흘리며

안락만을 고무래질한 내게

 

돌멩이 날아들까 두려워 얼른

자리에 놓고 문을 나선다.

 

 

산 찾은 날

 

 

 

 

씻은 듯 잊었더냐
산이 문 열다가 혀를 찍찍 갈겼다
 
무엇에 발목 잡혔더냐
으루나무 같잖은 듯 캐묻는다
 
어디에 마음 흘렸더냐
바위가 부릅뜬 눈으로 쏘아본다
 
하여간 중심 단단히 잡고
허방 짚지 말라고 호통들 친다.

 

 

 

 

 

 

 

 

 

 

 

정도리 구계등에서

 

 

 

 

억겁의 매를 맞아
둥글둥글 만월보살 닮은 얼굴
오늘도 매를 벌고 있다

즐비하니 맨몸 맞대고 앉아
하루에도 수천수만 번
처얼썩 철썩 득도의 물매 받는다

몽돌밭 들어서다, 아직
모난 말의 가시 다 발라내지 못한 나
화끈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에
한 발짝도 달싹 못 하고

밤톨만 한 돌멩이 하나 집어 들고
우두망찰 먼 섬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 나오자

귓속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
앙가슴 저미는 물매 소리
종아리에 떨어지는 아버지 회초리 소리.

 

 

 

 

 

가을 산사에서

 

 

 

 

빠-ㄴ한 허공에 별이 총총

자욱한 안개 속 사려 깊은 산자락

 

벚나무 그늘 밑 아늑한 길등

돌멩이 구르는 소리에 깨는 졸음

 

적막에 잠긴 산사 풍경이 울고

창연한 석탑 밤을 지새우는 묵도.

 

 

 

 

 

 

 

 

 

 

 

 

 

 

 

산사 찾아가는 날 1

 

 

 

 

바람도 없는 가지에서
낙엽 한 잎
호수에 내려앉는다

 

물살에 흔들리고픈 욕망
떠도는 하늘에 실려 간다

 

산그림자 속 헤매이다
끝내 잡지 못한 바람
가라앉은 하늘마저 잃는다

 

잔물결에 너울지는 육신
어둑발 속 법고 소리에
훌훌 낙엽으로 털고
빈 바랑 메고 나선다.

 

 

 

 

 

 

 

 

 

 

마당 풀을 뽑다

 

 

 

 

토방에 선뜻 올라선 풀섶에 갇히어 
멀거니 사립만 쳐다보는 빈집 애틋하다


한생 풀과 씨름하셨던 어머니 떠올리며
마당에 엎디어 풀을 뽑는다 


온 몸 후줄근히 땀에 젖자
맷방석만치나 환해지는 뒷자리 
어느새 사그라진 마음밭 잡풀 


당신도 마음의 정처 없으셨을까 
그럴 때면 가슴에 맺힌 한 끌어안고 
처연히 온 밭을 지심매 가꾸셨을까 


힐끗힐끗 곁눈질하던 해 
앞집 그림자 마당에 기다라니 드리우고 
뉘엿뉘엿 서녘으로 기운다.   

 

 

 

 

 

 

 

화분을 들이며

 

 

 

 

천더기로 버려진 너 
측은지심에 귀갓길 품어 왔다 
초초히 진데 마른데 골라 주며 
때 맞춰 정을 챙겨 부었다 


천연스레 낯설음 딛고 
뜨락 한가득히 미소 날리더니 
스산한 바람결 속 달마중 하다 
무서리 먹고 숙연해진 너 


저어해 하지만 안으로 맞아 
삼동의 긴 강 함께 넘고자 함은 
좋아한다는 것은 끝내는 
목숨까지도 책임 져야 함을
믿기 때문이란다.

 

 

 

 

 

 

 

 

 

 

집 없는 달팽이

 

 

 

 

다음 역이냐 
종점까지 버텨 볼 것이냐
이슥토록 번뇌와 씨름하다
산새 울음소리에 여윈잠 깨어
호반 길 나선다

아내의 침묵 속 수심 훔치다
스멀스멀 자갈길 더듬어 가는
집 없는 달팽이 만난다

쪼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말 걸자
어느 결에 욕망의 촉수 접더니 
도르르 몸 사리고 죽은 시늉한다
 
물가로 조심조심 옮겨 주고 
수심 깊은 곳으로 눈길 돌리자
파리한 그림자 하나 어른거린다
초초한 내가 보인다.

 

 

 

 

 

사랑을 위하여 

 

 

 

 

스산하게 낙엽이 뒹군다
한 생 아름답게 살다
어느새 스르르 스러진 나뭇잎
하이얀 얼굴 지르밟고 고독히 걷는다
 
바사삭! 바람으로 다시 만나자
또 하나의 결별의 외마디
내 영혼 채질하는 찬란한 절규여!
 
결코 아파하지 말자
끝날까지 사랑으로 보듬자며
가슴 깊숙이 큼직한 바위 하나 품고
훌쩍, 성자처럼 미련 없이 떠나 왔건만
 
사랑꽃 꽃눈 하나 틔워내지 못하고
어스름 강둑에 눈 흘기고 서 있으니
어찌 죄 아니랄 수 있으랴
차마 사랑을 노래한다 하랴
 
꽃잎이 다시 피어날 그날까지
기어이 돌아서지 않으리라.

 

 

 

 

낙화를 꿈꾸다

 

 

 

 

지명이 되면 돈 버는 일손 거두고

비단옷 못 입었어도 고향 깊숙이 들어와

호수가 잘 보이는 산코숭이 양지 녘

봄이면 까투리 새끼 치고 푸두둥 날아오르고

밤에는 뻐꾸기 뒷산 지키는 그곳에

명매기집 같은 토막이라도 하나 마련하여

한적히 살기로 맘먹었지요

 

집 앞 길 마당에 두어 뙈기 텃밭 가꾸고

가축도 얼굴별로 몇 마리씩 치며

틈틈이 물가에 나란히 나앉아

못다 본 책 읽고 시도 짓고 살자고

당신과도 찰떡같이 약속했지요

 

허나, 낯바닥이 땅 두께 같은 욕심이 도져

눈귀 막고 입 딱 다물고 오 년은 더 벌어야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

제힘으로 숟가락 들게 한다고

내게 한 약속 손바닥 뒤집듯 저버린 터에

옷 벗을 정년마저 훌쩍 늦춰졌으니

 

떡 본 도깨비처럼 좋아 날뛸 일이련만

이정표 바라보면 앞길이 빤히 내다보여

얼마나 더 발등어리가 퉁퉁 부어올라야

번듯한 발자취 하나 남길 수 있을지

오늘도 저무는 하루해를 채질한다오

비움

 

 

 

 

메마른 바람 소리

저무는 둑길에 올라

 

애증(愛憎)의 긴 강줄기

거스르는 억새풀

 

이제 남겨진 일은

죄다 비워내는 일

 

쓰적쓰적 털어 내고는

순백의 계절로 채운다.

 

 

 

 

 

 

 

 

 

 

 

5

 

행복 예감

 

 

 

 

 

 

 

 

 

 

 

 

 

 

 

 

 

 

 

 

화롯불 곁에서

 

 

 

 

새해 초일,

소망을 비는 아내의 순수

마당에 화롯불로 놓인다

 

솟아오르는 파아란 정열

그물그물 바람 잡고 춤춘다

 

어느 결에 얼얼히 취하여

시린 손 녹인다

눈자위 쓸고 볼과 귀 훔쳐낸다

 

닫힌 속 문 스르르 열리자

들려오는 불의 혼령소리

제 몸 태운다.

 

 

 

 

 

 

 

 

 

 

 

아들 전 하서(下書) 

 

 

 

 

한사코 좁은 길 고집하는 널 좇아

삼천지교(三遷之敎) 마다치 않은 것

부모 된 도리로 알았다

 

마음은 끝까지 모둠발로 받쳐주고 싶었으나

이내 손 닿지 않아 서글펐고

바둥대는 네 모습 안쓰러워

그저, 기도로 하얗게 지새울 뿐이었다

 

너는 칼 가는 바람 앞에서도

일순의 지체도, 돌아갈 기색도 없이

스스로를 회초리질 하며

맨발로 거친 차돌밭 용케 건넜구나

 

하지만 앞길에 더 큰 산 있으리니

부디 쥔 주먹을 단단히 다잡거라

혹여 못 버리고 한쪽에 밀쳐둔 욕심 있다면

그마저 죄다 살라버리거라

 

더딘 걸음 같아도

종국에는

꼬옥, 우듬지 끝 환히 볼 날 오리니.

 

 

 

그대의 고독을 위하여

 

 

 

 

이웃도 우정도 사랑까지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뒤돌아보지도 않는 세상 

얼굴 알아보고 
눈인사 건네는 이웃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이요 

이름 기억하고 
나직이 불러 주는 친구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일이요 

거처 어이 알고 
청장(請狀) 보내온 일가 있다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요 

고독에 슬픈 그대여! 
그대 슬픔에 함께 앓는 나 있음이
이 얼마나 살맛 나는 세상이오.

 

 

 

 

 

 

세상 눈뜨기

 

 

 

 

짙어 오는 풀 뽑고
흩널린 돌멩이만 치워도
길이 빤히 보이는 것을
 
창을 가린 책장 옮기고
한 쪽 문만 열어도
세상이 환히 보이는 것을
 
헌 누더기를 깔고 누워
문풍지만 풀질하는
맹목에 길든 눈, 눈.


(*註: ㈜비상교육 발행 고등학교
국어 상권에 수록 됨)

 

 

 

 

 

 

 

 

 

 

공(空)은 생(生)이다 1

 

 

 

 

물소리 실은 바람 영을 넘어옵니다
하늘 부끄러이 바라보지 않기로 합니다

먼 산자락 바람꽃, 거기서 스러질 듯
돈과 빛의 슬픈 집착 사르기로 합니다

가느다란 숨결 운명처럼 움켜쥐고
홀연히, 두 눈 귀 막고 가기로 합니다

까투리 비상하는 소리에 찢어지는 적막
마른 솔잎 하나 내려앉는 산정의 해름녘.

 

 

 

 

 

 

 

 

 

 

 

 

또 다른 출근

 

 

 

 

귀밑머리 새파랬던 시절

첫 출근의 벅찬 감격 떠올리며

지명의 한낮, 기운 그림자 드리운 채

면접도 이력서도 한 장 없는

새 터전으로 나선다

 

번질번질 다림질 된 와이셔츠에

때마다 갈아매던 넥타이도 버리고

자유로움 하나 걸치고 간다

 

손가방에 시집 한 권과 메모지

볼펜 하나 달랑 챙겨 들고

걸음걸음을 느긋이 헤아려도 좋고

찻길이 막혀도 여유롭다

 

문은 사방으로 열려 있고

일면식 없었어도 모두가 반갑다

꼭 하나는, 흠뻑 땀에 젖으란다

 

솔잎향 실어오는 바람에 취하고

산자락 타고 드는 산그늘에 안겨

겹겹 쌓인 고뇌 녹이라 한다.

 

 

 

 

 

행복 예감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들고   없는 부끄럼 많고 
일일이 따져보지 않고도 
드러난  헤아릴  없는지라 

가시관 쓰고 옹아리 앓느니 
차라리 죽어 진토 됨이 마땅하나 
질긴 것이 목숨인지라 
명줄 세월 강에 묻고 버텨 왔지만 

동기간에는 다정다감한 형제요 
이웃들은 잔정이라도 나누자 하고 
친구들 몹쓸 놈이라  배앝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직도 육신 멀쩡하고 욕망은 끓어 
마음은 앞산이라도 옮길  같으나 
피고  때를 알아 지키자고 
꽃자리 밤사이 잎새에게 내주고 

 찾으면 둘러서서 반기고 
하늘 더없이 높고 바람 서늘하니 
이제는 찾아올 행복 예감에 
마음은 새털같이 창공을 난다.

 

 

어느 여름날 1

 

 

 

 

벗님네들 얼굴 한 번 볼 양으로

너릿재 새털같이 사뿐 넘었지요

 

술 익는 냄새 졸졸 쫓아가다

도갓집에서 농주 큰 통 하나 실었지요

 

주춧돌 놓일 날만 손을 꼽던 집터

계절이 엉클어져 한마당 잔치인데

 

느릅나무 그늘 멍석 깔고 둘러앉아

막 한 잔 타는 목 축이려는 참에

 

솔밭 건너 앞산이 훌쩍 아는 시늉해

어서 오라 손나발 쳐서 옆자리 앉히고

 

건하게 들었지요 너나들이하면서

산들바람도 대취하여 따다바리고

 

어느덧 서녘 해, 설움에 겨워 벌겋고

텃새들 시나브로 제 둥지로 모여들어

 

흥얼흥얼 어둑발 붙들고 넘었지요

어느 여름날, 햇살 좋은 그 하루.

 

 

 

 

어느 여름날 2

 

 

 

 

갈맷빛 동산에

계절이 무르익고

 

청산에 열린 계곡

맑은 물 지줄대니

 

이 몸도

꽃나비 되어

시심에 젖는다.

 

 

갈매 치마 저고리

덧입은 시 동산

 

산새들 노래에

만화가 찾아드니

 

바람도

시새워하다

시 향에 취한다.

 

 

 

 

 

 

미움

 

 

 

 

마음의 뜨락에 
가시나무 키우는 일입니다 

온통 들어내 살라 버리지 않으면 
서슬 퍼런 청룡도가 됩니다 

구중 깊디깊은 데 도사리고 있다 
불이 일 듯 순식간에 되살아나
여지없이 찌르고 헤집어댑니다

끝내는, 개맹이가 풀려서
시도 때도 없이 도지고 
산이 뒤집히고 하늘이 빙빙 돕니다

아무에게나 찌그렁이 붙거나
스스로를 태질하여 몸을 잡치고
냅다, 천야만야 무저갱에 떨어져서 
남세를 사게 합니다.

 

 

 

 

 

 

 

고향에 띄운 편지

 

 

 

 

울 밖 빈터에 철마다 뿌린 푸성귀
시나브로 퍼져나가
들과 산에 달래, 냉이, 참취… 라니!
 
볕받이 막에서 쑥쑥 자라던 짐승들
한 마리 한 마리 뛰쳐나가
이 산 저 골에 까투리, 토끼, 멧돼지… 라니!
 
친구, 참말로 재수가 불붙었네
바쁜데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산열매, 칡뿌리, 산삼 녹아든 물 마시고
해와 달 별을 보고 우둥푸둥 살찐다니
 
여보게 친구,
올여름엔 불알친구 탁족회 날 잡히면
연락 주시게, 이제는 시간 낼 수 있네 나도
 
벼르던 모교에도 들르고, 어우렁더우렁
한 사나흘 죽마 타던 언덕 오르며
틈틈이 나물 캐고, 멧돼지도 한 마리 잡세

먹거리 넉넉히 해서 계곡물에 들앉아
친구네 잘 익은 가양주도 곁들이어
권커니 잣거니, 내 단단히 한턱 냄세 이번에.

 

 

 

산을 바라봅니다

 

 

 

 

산이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죄지은 듯 마음이 한 줌만 해지고
절로 먼 산에 눈길이 머물 때가 있습니다
 
욕망의 구렁에서 허우적이다
불현듯 내가 부끄러워지면
한정 없이 산을 바라봅니다
제 분수를 오롯이 알고 있는
 
오뇌의 동아줄에 꽁꽁 옥죄여
그지없이 내가 나약해지면
하염없이 산을 바라봅니다
비바람에도 흔들릴 줄 모르는
 
세월의 갈피에 놀빛 배어들고
속절없이 내가 허망해지면
시름에 겨워 산을 바라봅니다
오는 계절에 있는 그대로 부둥키는
 
외곬로 앞만 보고 걷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먼 산 바라봅니다
이젠 도반으로 함께 걷고 싶어집니다

 

 

제야의 세목(洗沐)

 

 

 

 

묵은 해 꼬리 감추는 섣달그믐
세파에 오염된 영육 씻어낸다

 

표피에 엉기어 땀의 분비 가로막는
나태의 각질 벗기고
이해득실 따져 입과 눈귀 속여 대는
구린내 밴 양심 우려내고
고열에 녹이고 땀으로 걸러
세포 사이 증오의 홀씨 뽑아낸다

 

얼굴과 심장의 검은 털 밀고
뇌 속 구태의 녹까지 벗겨낸 뒤
냉수에 헹구고 거울 앞에 서면
생기 넘치는 투명한 영혼
짐 벗은 아침 같은 마음이어라

 

옷까지 정갈히 갈아입고 나니
심금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
새해 새날이 활짝 열리고
새 부대에 간간한 꿈 장만한다.                  

 

 

 

 

 

새해 기도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바위 하나 품게 하소서,
모진 세파 몰아쳐도 굴하지 않고
앞만 보고 의연하게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다순 눈 뜨게 하소서,
그릇 된 편견 떨쳐 버리고
속내 읽고 다독여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호수로 채워 주소서,
굴욕과 가위눌림 안으로 삭여
화평과 평안 안고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촛불 하나 켜게 하소서,
질투와 외면의 빗장 살라버리고
축복을 기도하며 살게 하소서

밝아오는 새해에는
마음속 등불 하나 밝혀 주소서,
음울의 터널 허위허위 뚫고
광명과 진리 좇아 살게 하소서.

 

 

 

  해를 위하여 

 

 

 

 

 삼십 년쯤 흘러 길을 냈을까
 오십 년쯤 불어와 방향 잡았을까

 가운데 굽이쳐 흐르는  
노령의 낮은  넘나드는 된바람

해가 뜬다고 달리고 졌다 누웠을까
꽃이 좋아 웃고 싫다 하여 달렸을까

맵고 쓰겁고짜고 떫고 비리더라도 
업보로 알고 꿀꺽 쓸어 삼키지만

묻어  아픈 기억 하도 가슴 시려
뾰로퉁 돌아앉아 발등을 찧다가도

흔적이라도 남는 일은  길이라고
연륜의 거울 비추며 길을 독촉한다.

 

 

 

 

 

 

 

 

작가 소개 월정 강대실

 

 

 

 

강대실은 자연과 삶의 결을 응시하며 사유를 이어가는 시인이다.

일상의 소박한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감정과 생각을 절제된 언어로 풀어내며, 삶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한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섬세한 시선과 따뜻한 감성은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 보다 깊어지고 단단해진 모습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화려한 표현보다는 담백한 언어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내면을 조용히 비추며,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지켜내는 삶의 태도를 노래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의 경험은 시인의 언어 속에서 차분한 울림으로 되살아나고, 그 울림은 독자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의 시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지만, 그 안에는 삶을 향한 깊은 성찰과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시인의 시 세계는 비움과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며 더욱 또렷해지고 있으며, 오늘도 조용한 사유의 길 위에서 새로운 언어를 길어 올리고 있다.

 

 

 

 

 

 

 

 

 

 

 

 

 

 

발문

 

 

 

시와 고향의 만남

삶의 근원을 찾는 생명의식

 

 

 

문병란
(조선대 교수, 시인, 서은문학회 명예회장)

 

 

1

1999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발표된 첫 시집 잎새에게 꽃자리 내주고에는 시인의 원형적 고향 정서가 응축되어 있다. 그 출발점에는 여전히 자연과 생명, 그리고 유년의 기억이 깊이 자리한다.

 

대표적인 작품 고향의 여름밤은 다음과 같은 정서를 보여준다.

개구리 와글대는 소리 그친

으스름 달빛 아래

모낸 논다랑이 끼고 앉은
불 꺼진 외딴집


쑥불 타는 마당 한구석
누런 황소 한 마리 누워
어둠 씹어 삼키며

편히 쉬는 밤

 

검고 깊은 뒷산에서
밤 지새우기 외로운 소쩍새

소쩍! 소쩍! 처량한 울음소리
고향의 여름밤 지킨다.

 

이 시편은 농경적 삶의 정서와 생명의 원형적 풍경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고향을 떠난 이후에도 시인의 의식은 끊임없이 귀향의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찾으려는 의식이다.

뜬소문은 그 갈등을 드러낸다.

돈 버는 일 그만두고 나면 
이왕이면 탯줄 묻힌 향리 쪽에다 
토막집이라도 하나 마련하여 
詩도 쓰고 고즈넉이 살고 싶었다
 
이젠 다 망해 굽도 젖도 못 하고
기어드는가 보다 비아냥대고
몰래 숨어든 게 틀림없다고
수군댄다는 소문 자자했었지.
 

그러나 비아냥과 소문은 되돌아오는 길을 가로막는다

이 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적 욕망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생가를 찾다에서는 기억 속 고향이 이미 변형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주춧돌에 붙들린 기둥뿌리 삭고
바람은 벽 여기저기 구멍 내며 다닌다

홍시 떨구던 늙은 감나무 베어져 없고
자두나무랑 까치발 딛던 나무들만 남아 있다

 

여기서 고향은 이미 생명 공간이 아니라 붕괴된 기억의 장소로 변해 있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생명성과 기쁨의 세계로 시선을 옮긴다.

꽃마중에서는 자연이 다시 살아 움직인다.

꽃마중 간다
꽃 같은 내 님이랑

매화꽃 소식에 하늘과 산천이
꽃보다 더 고운 눈꽃을 날린다

 

 

동네 경사가 났다!는 유년의 농경사회적 정서를 회상하는 작품이다.

송아지 순산했는갑다
동네가 쩌렁쩌렁 울린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망각의 강을 건너 다시 들려온다

 

 

오늘 하루 2는 삶의 극한적 자기 성찰을 드러낸다.

가슴에 대못이 들어와도
벌레 씹은 상은 말아야 한다

바위를 옮기고 별을 따와야 한다
속창아릴 빼놓고 살아야 한다

 

 

양각산 산보길에서는 상실된 유년의 시간과 만난다.

상수리 한 톨 투두둑
내려앉는 소리에
멧새 한 마리 찬 공기를 가른다

 

 

산 찾아가는 날에서는 자연이 인간을 향해 말한다.

산이 문 열다가 같잖은 듯 내뱉는다

무엇에 발목 잡혔더냐
바위가 쏘아본다

 

 

말바우 시장 2는 삶의 현실과 인간 군상의 생생한 단면이다.

웃음과 눈물과 한숨이 뒤범벅되어
온통 질척질척한 장바닥
파장 막걸리에 취해 절뚝인다

 

 

소래포구에서는 고향이 공간을 넘어 확장된다.

서해의 은빛 얼굴
질척이는 좌판 위에서
바다는 다시 사람을 부른다

 

 

2

한국 사회의 변화와 함께 고향의 의미 또한 변해왔다. 농촌의 해체, 도시 중심의 경제 구조는 전통적 삶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시인은 그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의 원형을 찾는다.

그의 시는 단순한 향수의 기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문학적 실천이다.

 

 

3

시인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으로 인식한다. 이는 곧 생명 윤리의 문제로 확장된다.

4

결국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귀결된다.

고향 =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원형

자연 = 도덕적 존재

= 삶을 회복하는 언어

 

 

다양한 시편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시인이 끊임없이 잃어버린 고향을 향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귀향은 공간적 회귀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향한 정신적 귀향이다.

 

 

 

 

 

 

 

 

 

 

 

 

 

 

 

 

 

 

 

 

 

 

 

 

 

 

 

 

 

 

 

 

 

 

 

 

 

 

 

 

 

 

 

 

 

 

 

2시집

먼 산자락 바람꽃

 

지은이 | 강대실

펴낸 곳 | 유페이퍼

 

내페이퍼 | https://dskang100.upaper.kr

E-MAIL | dskang100@hanmail.net

 

전자출판 | 2026512

전자책 가격 | 4,000

 

ISBN |

© 강대실, 2026

 

이 책의 판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